여성, 약자 그리고 ‘아줌마’ [남인숙의 귀여겨듣기]
  • 남인숙 작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5.18 12:00
  • 호수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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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터칼로 난도질된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 스티커에 호응하는 댓글 잇따라
‘여자는 약자인가’에 대한 우리 사회의 동상이몽

얼마 전 한 남성이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 표시 스티커를 커터칼로 난도질한 사건이 보도되었다. 그가 왜 그런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후속 기사가 없었다. 필자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 건 정작 그 기사가 아니라 그 기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임산부 배려석 없애라’ ‘배려는 의무가 아니다’ 등의 내용이 태반이었다. 소수, 여성들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댓글도 ‘어차피 자리를 양보받은 적도 없다’는 경험담이 전부였다.

예전, 임신했을 때 모든 사람에게 여왕처럼 굴어도 된다고 좀 더 건방지게 굴라는 주변의 농담 섞인 권유를 받았다는 교민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겹치기도 한다. 약자에 대한 배려는 그 사회의 성숙도와 비례한다. 그런데 경제와 문화 면에서 세계 정상권에 올라선 우리 사회가 유독 여성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을 오로지 시민정신의 미성숙으로만 해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여성에 대한 혐오가 공기처럼 떠다니는 우리 사회는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5월11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내 임산부 배려석이 비어있다.ⓒ시사저널 이종현

서구에서 온 로맨스와 페미니즘의 오독

차별의 주체들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신념에 정당성을 부여하곤 한다. 한 가지는 ‘차별이 아닌 다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차별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전자는 이전 세대의 주된 관념이었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후자의 논리가 일반화되어 있다. 차별이 없다는 것을 넘어 역차별로 남성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치와 통계가 가리키는 현실은 OECD 국가 중 바닥권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성격차지수와 유리천장지수가 증명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 결코 희귀하지 않은 역차별 정서는 무엇 때문일까? 필자는 그 원인 중 하나가 서구에서 직수입된 로맨스와 페미니즘의 오독이라고 풀이한다.

최근의 양성평등 논쟁을 들여다보면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기보다는 여성을 약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강하다. 그 정서를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에는 ‘아줌마’라는 단어가 있다.

한국에만 그 개념이 있는 ‘아줌마’는 사전적 의미로는 나이 든 여성을 가리키지만, 용례로 볼 때 거기에 ‘억척스러움’을 더한다. 가족의 카테고리 안에서만 헌신적이고 그들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몰염치한 여성상이다. 그런 ‘아줌마’는 배려받아야 할 약자의 이미지가 아니다. 심지어 그 스테레오타입은 남성들만의 시각에만 박혀있는 것도 아니다. 같은 여성들에게조차 멸칭으로 쓰이는 아줌마의 전형성은 배려보다는 혐오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20대 이전의 필자는 중년 여성들에게 치이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느꼈다. 그들은 늘 새치기를 하고 사람이 붐벼 움직일 수 없는 장소에서 손가락으로 낯모르는 내 등을 찔러댔다. 그때는 그들이 생존 자체에 대한 걱정을 경험해본 마지막 세대이자, 겨우 살 만해진 삶에 대해 불안을 품고 있는 첫 세대라는 걸 그 태도와 연결시키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세대 여성들은 왜 ‘아줌마’가 되어야 했을까?

애초 한국의 여성은 서양 민담에 나오는 공주처럼 보호와 구출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전 민담을 살펴보면 여성은 주로 남성을 일깨우거나 지키는 주체였다. 구미호와 우렁각시는 가부장으로서 탈락한 남성을 구제해 주고, 《박씨전》 《온달전》 등에서는 남편은 물론 나라까지 구한다. 몇 안 되는 이야기 속 공주 중 하나인 바리데기는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버림받았는데도 병든 아버지의 약을 구하기 위해 저승 문턱까지 넘어가 끝내 왕을 살린다.

 

가부장제 수호하는 멀티플레이어였던 여성

용을 물리친 왕자에게 구원을 받는 서양 민담 속 공주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이러니 ‘여자들은 왕자가 필요 없다(Girls do not need a prince)’는 서양 페미니즘 구호가 모두에게 어리둥절했던 것이다.

한국 사회가 근현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여성은 가부장제(남성이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가족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를 수호하는 멀티플레이어였다. 일제 수탈, 한국전쟁, 그에 이은 가난 속에서 도무지 혼자 가족을 부양해낼 수 없었던 가부장을 보조해 경제활동도 했고, 가사와 육아를 전담했다. 한국에서 여성은 용사에게 구원받는 대상이 아니었다. 여성 자신이 용사였다. 오늘날 각종 문화상품에서 남성에게 구출받는 연약한 여주인공상은 서양에서 로맨스가 수입되면서 재생산된 이미지다.

남성을 보조하는 가부장제의 용사로 길들여진 여자들이 살던 사회에 페미니즘이라는 현대적인 개념이 들어오면서 모두가 혼란스러워졌다. 그것이 초기 천주교처럼 일부 배운 여성의 전유물일 때는 그래도 괜찮았다. 10여 년 전부터 젊은 여성 대부분이 양성평등 개념을 흡수하면서 지금 우리 사회는 질곡을 넘고 있다. 가족을 위할 때만 억척스러웠던 여성들이 느닷없이 개인을 내세우며 그동안 자신이 약자였다고 인정하는 건 서로에게 어색한 일이었다. 교육 수준이 높고 사회적 성취를 이룬 여성들의 양성평등 인식이 반대의 경우보다 낫지 않은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요즘 20대들의 어머니는 아들을 낳아야만 인정을 받던 가부장제의 전사들인 동시에 딸에게도 기회를 주는 첫 세대다. 전사인 어머니는 아들에게 여성을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고 가르칠 수 없었는데, 그사이 딸들은 독립을 갈망하는 예비 전사로 성장해 버렸다. 여성들은 독립적인 개인이 되기 위해 넘어야 하는 허들이 훨씬 많은데도, 그래서 아들들은 딸들을 약자로 보지 않는다.

초기 사회화 단계에서 학습만이 강조되는 한국 교육 환경에서 남아는 대체로 여아에게 밀린다. 어른들도 발달이 빨라 소통이 쉬운 여아들에게 더 호의적이다. 자라면서 열등감과 박탈감을 경험한 남성들은 왜 여성이 약자인지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전사인 임산부가 왜 약자이며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받아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특유의 억척스러움으로 내 안식을 빼앗으려는 것으로 느껴질 뿐이다.

유례없는 성별 갈등으로 많은 걱정을 사고 있는 MZ세대의 분열은 우리 사회 특유의 성별 인식에 대한 이해에서 재해석되어야 할 것 같다. 공주였던 적이 없는 여자들의 왕자 보이콧, 완전하게 가정을 부양한 적이 없었던 가부장으로부터의 독립 같은 것은 이런 바탕 없인 허상일 수 있다.

남인숙 작가
남인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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