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만들어 마시던 물리학자 셋, 원자로 개발에 인생 건 이유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2.05.20 09:00
  • 호수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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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트로엘스 쇤펠트 덴마크 시보그社 창업자 “한국 기업과 차세대 에너지원 개발해 620조원 시장 선점”
트로엘스 쇤펠트 시보그 공동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가 5월13일 서울 주한 덴마크대사관에서 시사저널과 인터뷰하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트로엘스 쇤펠트 시보그 공동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가 5월13일 서울 주한 덴마크대사관에서 시사저널과 인터뷰하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We were young and stupid.(우린 어리고 무모했다.)” 

10여 년 전 덴마크 코펜하겐대 닐스보어연구소(NBI) 지하에서 천재 물리학자 세 명이 맥주잔을 앞에 두고 모여 앉았다. 빡빡한 연구활동 가운데 틈틈이 접선해 맥주를 손수 만들어 나눠 마시는 게 이들의 낙이었다. 주조 기술이 점점 발전하면서 쓰기만 했던 맥주 맛도 제법 훌륭해졌다. 그사이 천재들의 대화 주제는 단순한 연구소 일상 공유를 넘어 신개념 원자로 개발 논의로까지 발전했다. 급기야 셋은 2014년 “세상을 바꾸자”며 원자로 개발 스타트업 시보그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시보그란 사명은 초우라늄 원소 발견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스웨덴계 미국인 핵물리학자 글렌 시어도어 시보그(1912~1999년)의 이름을 차용했다. 일론 머스크가 미국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를 기리며 세계 최대 전기차 제조사 테슬라를 설립한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세계적 MSR 기업이 한국 택한 이유   

시보그는 현재 소형모듈원자로(SMR)의 일종인 용융염원자로(MSR)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중이다. MSR은 고효율 전력은 물론 수소도 동시에 생산할 수 있어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평가받는다. ‘맥주 모임’ 멤버이자 시보그 공동창업자 중 한 명인 트로엘스 쇤펠트 최고경영자(CEO·41)가 5월13일 서울 주한 덴마크대사관에서 시사저널과 만났다. 그는 삼성중공업, 비즈 등 한국 기업과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자 방한했다. 특히 삼성중공업과는 최대 800메가와트(㎿)급 부유식(浮遊式) 원자력 발전 설비를 개발하는 대형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었다. 소형용융염원자로(CMSR)를 바지선에 탑재해 바다로 띄우는 방식이다. 800㎿는 서울 160여만 가구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양이다. 

쇤펠트 CEO는 “친구(공동창업자)들과 어렸을 때 단순한 호기심과 환경오염, 온난화 등 문제에 대한 관심만 갖고 회사를 만들어버렸다”면서 “어리고 무모했기에 가능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맨땅에 헤딩 식으로 사업을 시작해 힘겹게 이끌어오면서도 ‘목표 달성이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다’는 걸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며 “이젠 실험실 밖의 현장에서 (시보그의 CMSR 연구 성과) 얘기를 꺼내고 도움을 청할 때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믿을 만한 파트너를 애타게 구하던 시보그의 눈은 한국으로 향했다. 쇤펠트 CEO는 “한국은 세계 최고의 원자력 기술과 숙련된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면서 “삼성중공업 등 한국 기업들과의 협력을 통해 이른 시일 내에 상용화를 이뤄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삼성중공업과 연내 부유식 원자력 발전 설비 모델을 공동으로 개발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구체적인 일정을 알려 달라. 

“부유식 원자력 발전 설비 모델을 개발하고, 기본 설계에 대한 인증(AIP)을 받는 것까지가 2022년 목표다. AIP를 획득한 뒤 내년부터는 영업활동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후 CMSR을 탑재하는 바지선 생산라인 구축, 건조 등이 진행된다.” 

부유식 원자력 발전 설비의 송전 방식은. 

“바다에 떠있던 바지선이 항구에 정박하면 바지선에서 육상 전력망까지 연결된 케이블을 통해 송전된다.” 

바지선 크기는 어느 정도인가. 

“아프라막스급(적재물 중량 8만~12만톤·중형) 선박 사이즈로 길이 245m, 너비 31m, 높이 12m 수준이다.”  

부유식, 즉 배에 원자로를 실어 바다에 띄우는 방식을 택한 이유는. 

“우선 조선소 한 곳에서 동일한 품질로 부유식 원자력 발전 설비 여러 개를 만들어 여러 곳에 띄울 수 있다. 가동을 중단할 때도 (육지에 설치된 원자로와 달리) 광범위한 주변 환경을 청소하는 등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대형 선박을 건조하며 공정에 관한 규율을 철저하게 지켜온 조선사와 협력함으로써 안정감도 더해졌다.” 

ⓒ시보그 제공
ⓒ시보그 제공

원자로 파손 시에도 방사성 물질 유출 안 돼 

‘안전성’에 대해 부연하며 쇤펠트 CEO는 푸르스름하고 조그만 돌덩이를 들어 보였다. 불화소금이라 불리는 재료였다. 고체 상태의 불화소금을 고온으로 녹이면 액체 상태의 용융염이 된다. MSR은 바로 이 용융염과 핵연료를 섞어 연료로 사용한다. 용융염이 포함된 연료를 쓰면 설사 외부 충격에 원자로가 파손되더라도 걱정 없다. 유출된 액체연료가 상온에서 바로 굳기 때문에 세슘, 스트론튬 등 방사성 물질을 바다나 공기 중에 누출시키지 못한다. 쇤펠트 CEO는 “방사성 물질 유출 가능성이 0%”라며 “배 위에서 CMSR은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단언했다. 

미래 혁신 원자로로 꼽히는 MSR을 개발하고 있는 회사는 전 세계에서 시보그를 포함해 20곳 정도다. 쇤펠트 CEO는 “다른 회사들이 감속재(핵분열이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도록 제어하는 물질)로 흑연을 쓰는 반면 우리는 2년여 전부터 소다(molten sodium hydroxide)를 택했다”고 말했다. 특허를 받은 시보그만의 핵심 기술이다. 

소다를 감속재로 쓰게 된 계기가 있나. 

“크리스마스에 어머니 댁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배관 클리너 성분인 소다에 주목하게 됐다. 배관에 소다를 아무리 부어도 녹슬지 않는 점에 착안해 ‘이거다’ 싶어 MSR 감속재로 적용했다.” 

소다 감속재의 장점은 무엇인가. 

“(불이 잘 붙고 폭발성도 높은) 흑연은 원자로 용기에 균열을 낼 우려가 상존한다. 소다는 흑연의 이런 단점을 보완한다.” 

트로엘스 쇤펠트 시보그 CEO가 MSR의 연료로 쓰이는 불화소금을 들어 보이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트로엘스 쇤펠트 시보그 CEO가 MSR의 연료로 쓰이는 불화소금을 들어 보이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덴마크에 본사를 둔 시보그는 싱가포르와 한국을 해외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다. 두 나라는 발달한 선박·해양 산업과 선진화된 원자력 안전 규제 체계 등의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한국은 이에 더해 세계 최고의 원자력 기술과 숙련된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쇤펠트 CEO는 설명했다. 그는 “한국이 원자력 기술과 선박·해양 산업의 융합을 통해 수많은 나라에 원자로를 수출하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염두에 둔 수출 대상국이 있다면. 

“에너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서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저개발 국가다. 거기선 숙련된 인력을 확보할 수 없고 시간도 오래 걸려 육상 플랜트 건설과 운영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에서 고품질로 부유식 원자력 발전 설비를 만들어 수출하면 된다.” 

중장기적 목표는. 

“저개발국 등에서 10억 명가량이 전기를 필요로 하고 있고, 앞으로 (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수요가 더 커질 것이다. 그들에게 전기를 원활히 공급하는 회사가 되고 싶다.” 

목표 달성을 위해 한국 기업, 그중에서도 삼성중공업과 협력하기로 한 이유가 뭔가. 

“시보그는 스타트업으로 시작한 기업이다. 삼성중공업 같은 글로벌 조선사의 힘을 빌림으로써 (기업 운영상) 장애 요소를 극복해 나가기 용이하다. 우리의 선택지 중에서 최고의 옵션이 삼성중공업이었다.” 

올해 1분기 949억원의 영업손실을 내는 등 실적 개선이 절실한 삼성중공업 입장에서도 시보그는 놓칠 수 없는 파트너다. 당장은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수주 호조세에 기대고 있지만, 확실한 미래 먹거리를 확보하지 못하면 언제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삼성중공업은 시보그와 CMSR를 실을 바지선을 건조하는 데 이어 해당 원자로에서 생산된 전력을 활용한 수소·암모니아 생산 설비 개발까지 추진할 예정이다. 정진택 삼성중공업 사장은 “혁신적인 제품 선점으로 미래 사업 기회를 창출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삼성그룹 차원에서도 SK나 두산, GS그룹 등과의 SMR 개발 경쟁이 초미의 관심사다. 삼성은 삼성물산을 통해 경쟁사들처럼 육지 원자력 분야에, 삼성중공업을 통해선 차별화된 해양 원자력 분야에 진출하는 ‘투트랙’ 전략을 펴고 있다. 

“반핵·탈핵은 냉전시대 산물”  

영국 국립원자력연구소는 글로벌 SMR 시장 규모를 2035년 390조~62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SMR의 상용화는 2020년대 말이나 2030년대 초반부터 본격화할 전망이다. 황주호 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국가 주도인 중국과 러시아를 제외하고 미국, 캐나다, 영국, 덴마크 등 서방세계에선 SMR을 둘러싸고 시장형 기술 개발(상용화) 경쟁이 한창”이라며 “누가 먼저 시장에 진입하느냐가 상당 기간 시장 점유를 보장하기에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시보그와 삼성중공업 역시 남들보다 한발이라도 앞서 상용화하려 고삐를 죄고 있다. 

상용화 목표 시점은 언제인가. 

“CMSR을 탑재한 첫 번째 바지선을 6~7년 안에 건조할 계획이다. 5년 내로 단축시키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애초 서구권에서만 활동해선 상용화를 더 앞당길수 없다고 생각해 한국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적어도 중국보다는 먼저 상용화를 이뤄내고 싶다.” 

투자자들을 의식해 상용화를 서두르는 측면도 있나. 

“그렇다. 일반적인 원자력 개발은 숱한 단계를 거쳐야 해 10~20년 정도의 기간을 두고 진행되지만 개개인에게서 투자를 받은 우리는 시간을 지체할 겨를이 없다. 여러 단계를 한꺼번에 궤도에 올리며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 있다.” 

누적 투자 유치 규모는. 

“주로 유럽에서 유니콘기업과 개인투자자 등으로부터 총 5000만 유로(약 660억원) 이상의 투자를 받았다.” 

시보그가 본 현재와 미래의 에너지 지형 ⓒ시보그 제공
시보그가 본 현재와 미래의 에너지 지형 ⓒ시보그 제공

대전에 있는 에너지 기업 비즈와도 CMSR 개발·상용화를 위해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비즈의 경우 시보그가 한국 내에서 원자력 관련 규제에 대응(인허가 취득)하는 과정을 지원한다.” 

반핵·탈핵 여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반핵과 탈핵은 냉전시대에서 비롯된 관념이다. 이제 주요 이슈는 냉전이 아닌 온난화다. 원자력이 탄소중립의 핵심이 되고 있고, 심지어 상용화에 성공하면 막대한 돈까지 벌어다 줄 예정이다. 그때는 세간의 시선이 아예 달라지게 될 것이다. 국민의 반핵 감정이 강했던 덴마크도 이미 바뀌고 있다.” 

어떤 비전을 품고 사업을 펼치고 있나. 

“과거 스타트업이 원자력 산업에 뛰어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창업 초기 실험 재료도, 이렇다 할 벌이도 없이 계속 도전했다. 아직도 (소다 감속재에 관한) 핵심적인 가설을 제대로 증명해 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일념으로 무모하게 나서왔다. 지구를 위해 꼭 필요한 소명이라서다. 우리와 협력하고 있거나 앞으로 협력할 기업도 무모하리만큼 과감하게 이 분야에 뛰어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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