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우대’ 독일 정치가 낳은 표절 논란
  • 이수민 독일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2.01 11:00
  • 호수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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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진학 불필요하다는 교육계와 ‘박사 학위’ 강조하는 정치권의 모순

독일의 가족부 장관 프란치스카 기파이의 이름이 언론에 뜨겁게 오르내리고 있다. 그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한 베를린자유대에서 표절 시비를 다루는 위원회가 다시 열렸기 때문이다. 기파이는 지난해에도 박사 논문 표절과 관련해 구설에 오른 적이 있다. 당시 유명인의 박사 논문 표절 여부를 고발하는 플랫폼 ‘프로니플락위키’가 기파이 논문의 문제점을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밝히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이에 따르면, 205페이지에 육박하는 그의 논문 중 76장 분량에서 표절로 의심되는 구절이 발견됐다. 특히 인용이 제대로 명시되지 않은 점이 문제가 됐다.

프란치스카 기파이 독일 가족부 장관(왼쪽)이 2018년 3월14일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으로부터 장관 임명장을 받고 있다. ⓒEPA연합
프란치스카 기파이 독일 가족부 장관(왼쪽)이 2018년 3월14일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으로부터 장관 임명장을 받고 있다. ⓒEPA연합

27개 부분 표절에도 결과는 견책뿐

논란이 커지자 기파이는 스스로 2019년 2월 베를린자유대에 조사를 요청했다. 이어 그해 8월에는 대학 측에서 박사 학위를 박탈하기로 결정할 경우, 장관직을 사직하겠다고 발표했다. 반년 넘게 조사한 자유대는 논문의 27개 부분에서 확실한 문제를 확인하고 추가로 22군데에서 인용이 적확하게 표시되지 않았음을 발표했다. 다만 문제의 구절들이 자립적 학술성을 위배하진 않는다고 최종 판단했다. 대학은 기파이에게 견책처분만 내렸고 그는 박사 학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1년이 경과한 지난 11월6일, 자유대는 재조사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기파이 역시 전과 달리 자발적으로 박사 학위를 반납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논문이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놓이는 걸 더는 원치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자신의 능력은 ‘박사’ 타이틀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정치권에 계속 남아 있겠다고도 했다. 실제 슈피겔의 자체 설문조사에 따르면, 사민당 지지층 중 75%가 기파이의 박사 학위가 박탈돼도 그의 정치적 커리어가 계속 이어지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베를린 노이쾰른 구청장 시절부터 시민들의 지지가 높았던 그였기에, 논문 표절 시비 정도로 신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걸까. 박사 학위 논문의 표절 문제는 비단 기파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독일 정치권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 다수의 지적이다. 정치인의 박사 논문 표절 논란이 불거진 것은 2011년 카를테오도어 추 구텐베르크 전 국방부 장관의 박사 학위가 취소되면서부터다. 그의 정치적 커리어는 화려했다. 2002년 연방의회에 들어가 2008년부터 이듬해까지 기민련 총비서를 맡았다. 2009년 2월부터는 연방 기술경제부 장관을, 같은 해 10월부터는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단기간에 높은 지위까지 단숨에 오르면서 그는 대중적으로도 많은 지지를 받았다. 2010년에는 메르켈 이후 총리 후보로 거론될 정도였다.

하지만 2011년 2월 그의 박사 학위 논문 표절이 터지면서 전부 물거품이 됐다. 학위를 수여한 바이로이트대학이 그의 박사 학위를 취소했지만 추 구텐베르크는 장관직을 유지하겠다고 버텼다. 하지만 여론이 악화되자 얼마 못 가 정치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논문의 인용 표기가 제대로 안 된 탓에 저작권 위반으로 형사 고발도 이어졌지만, 심각한 위반이 아니라는 이유로 고발은 취하됐다. 이후 그는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며 독일 정치권과는 거리를 뒀지만, 최근 독일 핀테크 업체 ‘와이어카드’ 회계부정 스캔들 등과 관련해 꾸준히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교육부 장관 역시 표절의 주인공이 됐다. 아네테 샤반 전 장관은 2005년부터 연방의회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부터 2013년까지 교육부를 맡았다. 2013년 그가 1980년 뒤셀도르프대학에 제출한 박사 논문이 프로니플락위키 레이더망에 걸렸다. 그의 지도교수는 인터뷰를 통해 현재의 기준으로 30년 전 논문을 평가할 수 없다며 옹호했지만, 대학 측은 적절한 인용 표기 없이 타인의 업적을 이용했다고 판단해 학위 취소를 결정했다. 이후 샤반은 장관직에서 물러났지만, 그 후에도 주교황청 독일대사로 활발히 활동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정치인인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역시 표절 시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2005년부터 15년가량 각 부처 장관직을 도맡은 후, 현재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인 그 역시 2015년 박사 논문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하노버대학 조사위원회는 논문의 20%가 부적절한 인용 표기로 표절에 해당되고 세 군데에선 ‘심각한 문제’가 발견되었지만, 핵심적인 결론 부분에서 학술적으로 새로웠으므로 문제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박사 학위를 박탈당하진 않았지만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비판에 시달렸다.

프란치스카 기파이 독일 가족부 장관(왼쪽)이 2018년 3월14일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으로부터 장관 임명장을 받고 있다. ⓒEPA연합
독일 정치인들의 기자회견을 보면 박사 학위 소지자들은 자신의 이름 앞에 ‘Dr.’를 붙이며 학위의 중요성을 무의식적으로 강조한다. ⓒEPA연합

박사 학위 정치인, 이름 앞에 ‘Dr.’ 붙여 과시

이 외에도 독일 정치인들의 학위 논문 표절 사례는 손에 꼽기 어려울 만큼 많다. 학계에서는 박사 학위 취득자가 점점 많아지면서 질보다는 ‘양’에 초점이 맞춰진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이는 독일 교육제도권의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대학 졸업을 하지 않아도 구직에 어려움이 없던 독일 사회가 점점 신자유주의적 모델에 익숙해지면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증가하는 추세다. 하지만 이러한 추세에도 아직 대학 졸업자는 독일 전체 인구의 18%에 불과하다. 박사 학위는 전체 인구의 1.5%만이 갖고 있다.

반면 정치권은 이러한 수치와 거리가 상당하다. 독일 연방의원들만 놓고 봐도 학사 학위 소지자는 82%에 육박하며 박사 학위 소지자는 평균 17%에 달한다. 정치인들의 기자회견을 보면 박사 학위 소지자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Dr.’를 붙이며 학위의 중요성을 무의식적으로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독일 사회는 ‘학위’에 대해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전통적 교육제도의 장점을 강조하며 대학 진학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정치계에 입문하거나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박사 학위가 기본인 것인 양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독일 정치인의 박사 학위 논문 표절은 오로지 기파이 개인의 문제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이번 사건을 통해 표절이 단순히 학계의 안일함에 기인한다는 협소한 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독일에서 정치를 하기 위해 ‘박사’ 타이틀이 꼭 필요한지, 정치권에 들어가기 위해 교묘한 ‘표절’을 서슴없이 택하는 이들을 과연 국민의 대표라고 볼 수 있는지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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