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롯데 제쳐두고 일본에서 신격호 평전 출간된 이유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0.11.28 15:00
  • 호수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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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유력 출판사, 신간 《롯데를 만든 남자 시게미쓰 다케오論》 펴내

“2020년 1월19일, 며칠 전부터 위독한 상태였던 시게미쓰 다케오는 후계자인 두 아들의 도착을 확인한 듯 숨을 거뒀다. 시게미쓰 다케오와 신격호. 일본과 한국에서 각각 입지를 굳힌 거대 기업 롯데를 만든 남자는 평생 두 개의 이름을 사용했다.”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자 겸 명예회장의 평전이 11월25일 일본에서 출간됐다. 일본 유력 출판사가 신 회장을 오랜 기간 취재해 온 경제 저널리스트와 손잡고 책을 펴냈다. 

일본 대형 출판사 다이아몬드는 이날 마쓰자카 다카시 경제 저널리스트가 쓴 신격호 명예회장 평전 《롯데를 만든 남자 시게미쓰 다케오론(論)》을 출간했다. 시게미쓰 다케오는 신 명예회장의 일본 이름이다. 평전 저자 마쓰자카 다카시는 일본 경제잡지 ‘경제계’ 편집장을 지냈고 저명한 경영인에 관한 책을 다수 집필한 바 있다. 시사저널은 출간일인 11월25일 해당 소식을 단독으로 보도했다. 

1월22일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자 겸 명예회장의 영결식에서  장남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SDJ코퍼레이션 회장)과 차남 신동빈 롯데 회장이 영정을 뒤따르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한·일 격차 이용한 ‘타임머신’ 경영” 

《롯데를 만든 남자 시게미쓰 다케오론》은 1921년 울산에서 태어난 신 명예회장이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1949년 롯데그룹의 전신인 (주)롯데 창립과 사세 확장, 1966년 한국 진출 후 재계 5위 재벌 등극에 이르는 과정을 풀어냈다. 신 명예회장의 경영론과 못다 이룬 꿈에 대해서도 심층적으로 다뤘다. 

신 명예회장은 일본과 한국에 한 달씩 머무르며 양쪽 경영을 빈틈없이 챙기는 이른바 ‘셔틀 경영’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이에 더해 신 명예회장이 ‘타임머신 경영’을 통해 거대 재벌그룹을 일궈냈다고 평전은 분석했다. 타임머신 경영에 대해 평전은 “세계 최빈국(한국)을 버리고 일본에서 영광을 안은 희대의 경영자 시게미쓰 다케오는 거액의 자금을 한국 사업에 투자하고 한·일 간의 경제 발전 격차를 이용했다”며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지나며 당시 10위 안팎이었던 (한국 내) 재계 순위를 단번에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고 소개했다.      

《롯데를 만든 남자 시게미쓰 다케오론》은 신 명예회장의 가족과 그동안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관계자를 철저히 취재해 쓴 만큼 앞서 출간된 평전들과 차별화된다는 게 출판사 측의 설명이다. 책은 서두에 “경영자 시게미쓰 다케오의 인생을 통해 롯데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동안 베일에 싸였던 비밀을 최대한 밝힌다”며 “이를 위해 시게미쓰와 관련한 주요 인물들의 증언이 다수 실려 있다”고 적었다. 일본 롯데에서 껌과 과자의 연구·개발을 이끌며 신 명예회장의 ‘오른팔’로 불린 데즈카 시치고로를 비롯해 전 비서들, 대졸 채용 1기생이었던 한국인 최측근 등이 취재에 응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이번 평전은 일본 재계 시각으로 ‘신격호 리더십’을 집중 조명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전에 한국에서 출간된 신 명예회장 관련 책 대부분은 ‘신격호는 있는데, 시게미쓰 다케오는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재일교포 사업가인 신 명예회장의 일본 내 활동, 입지 등에 대한 정보가 태부족해 그 진면목을 알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롯데 측에서도 이렇다 할 평전을 낸 적이 없다. 이번 《롯데를 만든 남자 시게미쓰 다케오론》 출간에도 롯데는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에서 11월25일 출간된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자 겸 명예회장 평전 《롯데를 만든 남자 시게미쓰 다케오론(論)》 표지 ⓒ일본 다이아몬드사(社)

위기의 롯데에 日 ‘신격호 리더십 주목’ 시사점    

재계의 한 관계자는 “결국 이번에 일본에서 출간된 평전이 신 명예회장을 제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책이 아닐까”라며 “롯데가 심각한 경영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일본이 신 명예회장의 리더십과 성공 스토리를 주목한다는 사실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책도 “사실 신 명예회장의 업적을 일본인들은 잘 알지 못했다”면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창업자·오너 경영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마케팅, 리더십, 인사관리, 투자, 거버넌스 등을 둘러싼 차별화와 경쟁 전략, 나아가 독창적인 ‘매니지먼트’의 본보기”라고 강조했다. 이어 신 명예회장이 ‘발명’보다 ‘개량’에 중점을 두고 품질 면에서 최고를 추구하는 제조(제품화)에 힘썼다고 덧붙였다. 

《롯데를 만든 남자 시게미쓰 다케오론》 발매일은 공교롭게도 한국 롯데의 정기 임원 인사 하루 전날이었다. 롯데는 정기 임원 인사를 11월26일 단행했다. 통상 12월 중순 이후 하던 정기 인사를 한 달가량 앞당긴 데는 신 회장의 강력한 그룹 쇄신 의지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롯데는 이커머스 시대 등 시장 변화에 뒤처지는 가운데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국내외 경기 침체까지 맞아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올 1, 2분기 롯데의 양대 축인 유통과 화학 부문 모두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에 비해 추락한 뒤 3분기에 반등했지만, 코로나19 여파 등으로 실적 개선세를 지속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신 회장이 더욱 크게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쪽은 유통, 즉 롯데의 본업(本業)이다. 형과의 갈등이 상존하고, 아들 유열씨로의 3세 승계 준비에도 착수한 만큼 지배구조 개선 등 경영권 강화 작업이 절실한 신 회장이다.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없는 유통 부문 실적은 호텔롯데 상장을 가로막고 있다. 

 

日 여론에 촉각 곤두세우는 신동빈 

아울러 신 회장은 호텔롯데 상장을 위한 정지작업, 아들의 후계 구도 안착 등을 위해 일본 롯데 경영진 동향, 여론 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을 무릅쓰고 지난 3월에 이어 8월에도 일본으로 출국해 각각 두 달여간 머물렀다.  

한편 일본 언론들은 지난 1월19일 신 명예회장 타계 때 관련 소식을 발 빠르고 비중 있게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신 명예회장을 “10대에 혼자 (일본으로) 출국해 일본과 한국에서 거대 그룹을 구축한, 재일 한국인 중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신 명예회장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등 일본 정치권 내 인맥도 두터웠다고 교도는 전했다. 

ⓒ21세기북스·나남·이지출판·청림출판·조갑제닷컴·성안북스

앞서 출간된 평전들, 아쉬움·논란으로 점철 

현재 포털사이트 책 섹션에서 ‘신격호’를 검색해 보면 평전 7권이 검색된다. 1998년 처음 나왔다가 2015년 재출간된 《거인의 황혼》을 감안하면 총 6권이다. 여기서 《거인의 황혼》과 《롯데와 신격호 도전하는 열정에는 국경이 없다》(2010년), 《청년 신격호》(2010년), 《신격호는 어떻게 거인 롯데가 되었나》(2014년) 등은 신 명예회장 일가나 롯데 측이 아닌 외부 작가가 한국인, 한국 시장의 시각으로 신 명예회장을 분석한 책들이다.        

신 명예회장의 장남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SDJ코퍼레이션 회장)이 ‘제대로 된 아버지 평전이 없다’고 안타까워하며 2017년 《나의 아버지 신격호》를 펴냈지만, 이 책은 롯데가(家) 형제의 난과 맞물려 논란을 빚었다. ‘아버지를 한·일 양국에서 보좌한 장남이 가장 자세한 평전을 내놨다’는 평과 ‘동생 신동빈 롯데 회장과의 경영권 분쟁에서 사실상 패한 신 전 부회장이 자신의 적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책을 이용했다’는 평이 엇갈렸다. 

신 전 부회장은 평전을 통해 신 명예회장을 ‘회색 지대에 속한 중간자’라고 표현했다. 그는 “아버지 역시 한국과 일본,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어느 한쪽을 선택한다는 것은 당신의 운명과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재일교포 시게미쓰 다케오를 알아야 신 명예회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는 의미다.  

형제의 난이 점입가경이던 당시 신 전 부회장은 책에서 “롯데그룹 분쟁은 한국 최대의 재산 절취 사건이며 심각한 국부 유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또 동생 신 회장을 ‘일본인 경영진의 대리인’으로 표현하며 경영권 재탈환이 자신의 숙명이자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라고 주장했다. 

신 전 부회장의 책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나타냈던 롯데가 올해 6월 《신격호의 도전과 꿈》을 출간하면서 ‘신 명예회장 평전 논란’에 다시 불을 지피는 듯싶었다. 그러나 《신격호의 도전과 꿈》은 신 명예회장보다는 소공동 롯데타운, 롯데월드, 롯데월드타워 등 롯데의 대표 건축물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소개하는 데 방점이 찍혀 아쉬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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