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광주 땅 밟은 전두환…유죄선고 순간 “멍했다”
  • 정성환·조현중 호남본부 기자 (sisa610@sisajournal.com)
  • 승인 2020.11.30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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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남짓 선고 재판에서도 ‘꾸벅꾸벅’ 졸아
“왜 사죄 안 하냐” 등 빗발친 질문에 ‘묵묵부답’
자택 출발 땐 ‘대국민 사과’ 요구에 “말조심해 이놈아”

‘5·18 피고인’ 전두환(89) 전 대통령이 다시 광주 땅을 밟았다. 지난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고(故) 조비오 신부를 비난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돼 피고인으로 1심 선고 재판 법정에 서기 위해서다. 지난해 3월 11일, 올해 4월 17일에 이어 세 번째다. 전씨는 11월 30일 낮 12시 27분, 승용차를 타고 광주지방법원에 도착했다. 오전 8시 42분쯤 부인 이순자(81)씨와 함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출발한지 3시간 40여분만이다. 

광주지방법원 법정을 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 ⓒ연합뉴스
광주지방법원 법정을 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 ⓒ연합뉴스

전씨, 유죄 선고되자 무표정하게 판사 빤히 쳐다봐

경찰의 삼엄한 경비 속에 광주지법 후문 법정동 출입구에 도착한 전씨는 검정 양복과 중절모 차림으로 부인과 함께 검정 대형 세단 뒷좌석에서 내렸다. 하차 뒤 1분 가까이 서서 잠시 벗었던 모자를 고쳐 쓴 전씨는 수행원과 법정 경위·경찰에 둘러싸여 법정동으로 향했다. 

그는 특별한 도움 없이 혼자서 20여 걸음을 걷다가 계단을 오를 때에는 수행원의 부축을 받고 느린 걸음으로 법정에 들어섰다. 6m가량을 이동하는 동안 부인 이씨도 묵묵히 전씨의 뒤를 보좌하며 조용히 법정으로 향했다. 취재진들이 “5·18 책임을 인정하지 않느냐”, “아직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느냐. 왜 사죄하지 않느냐. 발포 명령을 부인하느냐”는 등 질문 세례를 퍼부었지만, 묵묵부답인 채 발걸음을 옮겼다. 

전씨는 법정동 2층 내부 증인지원실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한 뒤 대기하다 오후 2시부터 열린 재판에 출석했다. 법정에 피고인으로 나올 때마다 꾸벅꾸벅 졸았던 그는 1시간 남짓한 이날 선고 공판 시간에도 꾸벅꾸벅 졸았다. 심지어 유죄가 선고되는 순간조차 잠에서 덜 깬 듯, 멍한 모습이었다. 

김정훈 형사8단독 부장판사가 “전두환에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다”고 했지만 전씨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김 판사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반면 전씨의 신뢰관계인으로 피고인석에 나란히 앉은 부인 이씨는 유죄를 예상이라도 한 듯 고개를 떨궜다. 전씨에 대한 유죄 소식이 전해지자 법정 밖에선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가 법정을 빠져 나가자 유족들은 “전두환을 구속하라”고 구호를 외치며 항의했지만 충돌은 없었다. 

 

광주시민들 “전두환 구속하라” 울분…‘전두환 감옥’ 등장

‘전두환 감옥 등장’ 11월 30일 오전 광주 동구 지산동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와 5·18단체 관계자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벌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전두환 감옥 등장’ 11월 30일 오전 광주 동구 지산동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와 5·18단체 관계자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벌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선고재판이 열리기 전인 이날 12시 30분, 광주지법 앞에는 5·18 단체 관계자와 시민 100여명이 모여 그동안 쌓여온 울분을 토해냈다. 이들은 전씨의 혐의에 대해 ‘법정 최고형인 징역 2년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한다’는 내용의 판결문 형식의 손팻말을 만들어와 전씨의 구속을 촉구했다. 5·18 단체 관계자가 “피고인 전두환을 징역 2년에 처한다”는 가상의 주문을 읽자 시민들은 박수갈채를 보내며 호응했다. 

5·18 단체는 감옥을 형상화한 쇠창살을 법원 앞에 설치하고, 전씨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는 의지를 밝혔다. 뒤이어 전씨의 얼굴이 담긴 가면을 쓴 죄수복을 입은 사람이 포승줄에 묶여 등장해 쇠창살에 갇히는 퍼포먼스(행위극)가 펼쳐졌다. 시민들은 쇠창살 속에서 포승줄에 묶인 채 무릎을 꿇은 모습의 전씨에게 “사죄하라”“참회하라”고 호통을 쳤다.

자녀와 남편을 잃은 오월 어머니들은 검은색 옷을 차려입고 ‘오월 영령 통곡한다. 전두환 구속하라’ 등의 손팻말을 들었다. 이들은 목청껏 전씨의 구속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며 40년간 쌓여온 한 맺힌 심경을 표현했다. 5월 항쟁 때 남편을 잃은 김말옥(62)씨는 “교통사고로 접촉사고만 나도 미안하다고 사죄한다”며 “전씨는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고도 사죄 한마디 하지 않는다. 사람도 아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이어 “자신이 뭘 잘한 게 있다고 오늘 재판에 나오면서 악을 쓰느냐”며 “정말 독한 사람”이라고 꼬집었다. 

5·18 당시 광주상고 1학년이었다가 희생당한 문재학씨의 어머니 김길자(81)씨는 “전두환씨가 골프치러 다니면서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고 주장한 것은 새파란 거짓말이다”며 “그날 새벽 우리 아들을 누가 죽였냐. 전두환은 역사 앞에 사죄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전씨는 지난해 11월 강원도 홍천에서 골프를 치고 그해 12월 12일, 12·12 가담자들과 오찬 회동을 한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일었다. 시민 박찬우(55) 씨는 “전씨가 구속돼야만 응어리진 한이 풀어질 것 같다”며 “그렇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들고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5·18단체, 엄벌촉구 문화제…“역사 앞에 사죄하라”

11월 30일 오전 광주 동구 지산동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5·18 민주화운동 유가족 등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벌을 촉구하며 손팻말을 들고 ‘전두환을 구속하라“고 외치고 있다. ⓒ시사저널 조현중
11월 30일 오전 광주 동구 지산동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5·18 민주화운동 유가족 등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벌을 촉구하며 손팻말을 들고 있다. ⓒ시사저널 조현중

같은 곳에서 5·18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와 시민단체가 주관한 ‘전두환 엄벌 촉구’ 문화제가 이어졌다. 5월 영령에 대한 묵념과 님을 위한 행진곡 제장으로 시작된 문화제에서 발언자들은 한 목소리로 5·18 역사 왜곡 근절과 진상규명, 엄중 처벌을 촉구했다. 이철우 5·18기념재단 이사장은 “오늘 재판은 단순히 사자명예훼손혐의가 아니라 진실과 왜곡, 거짓을 가려내는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며 “재판부가 반드시 역사의 진실을 밝혀내고 엄중한 처벌을 할 것”을 요구했다. 

고 조비오 신부의 조카이자 고소인인 조영대 신부는 “고소한지 2년 6개월이 흘러서 드디어 1심 선고하는 날을 맞아 만감이 교차한다”며 “(전씨가) 역사 왜곡을 위해 진실을 끝까지 부인하고 억지 주장을 한 덕분에 오히려 이 재판을 통해 광주 5.18의 진상이 훨씬 더 드러났고 전두환의 사악함이 더 많이 드러났기 때문에 이 긴 재판의 과정 또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재판부는 단순히 개인의 명예훼손 사건으로 치부하지 않고 역사적인 단죄를 내린다는 생각으로 엄벌에 처해 역사와 사법 정의를 바로 세워주길 바란다”고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조비오 신부를 회고록에서 비난하고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이날 1심 재판부로부터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앞서 전 씨는 이날 오전 8시42분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나와 광주 법정으로 향했다. 전씨는 “대국민 사과하라”고 외친 유튜버들을 노려보며 “말조심해 이놈아”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날 광주경찰은 전씨 재판이 열리는 광주지법 안팎에 동원 가능한 경력을 최대한 배치했다. 20개 중대 경찰관 2000여 명(추산)이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경찰은 경찰 기동대 버스로 화단 주변에 차벽을 세우는 등 법원 주변 출입 통제를 강화했다. 한때 법정동 후문 쪽에서 이동을 막는 경찰과 유족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으나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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