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혜진의 시론] 단오 무렵
  • 송혜진 숙명여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6.11 17:00
  • 호수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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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틈나는 대로 밝은 햇살을 받으며 앵두를 땄더니, 눈을 감으면 마치 빨간 별이 뜬 것처럼 반짝이는 것들이 쏟아진다. 앵두 따서 갈무리하는 일은 해마다 이 무렵쯤에 누리는 나만의 ‘소확행’인 셈인데, 올해는 유난히 앵두 알이 굵고 많이 열리는 바람에 좀 더 정신이 팔렸던 듯하다. 초록 잎사귀 사이사이에 다닥다닥 매달린 앵두를 한 알 한 알 따 모아 소쿠리를 가득 채울 때, 맑은 물로 깨끗이 씻어낼 때, 눈으로 혹은 손으로 스며드는 양기 가득한 앵두의 붉은 기운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예로부터 앵두는 초여름, 단오 무렵에 주고받는 선물로 사랑받았다. 봄에 꽃이 피는 열매 중 가장 먼저 익는 데다, 색이 붉고 아름다워 첫 수확을 조상에게 바치며 계절 인사를 드렸고, 왕실에서나 민간에서나 ‘산호 구슬’ 같은 앵두를 대바구니에 담아 보내며 건강과 행운을 기원했다. 지금은 모두 사라진 풍속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단오는 설날인 정월 초하루, 추석인 팔월 보름과 함께 조선시대 ‘삼명일’의 하나로 꼽히는 명절이었다. 왕실에서는 조상께 시즌 제사를 올린 다음 임금이 궁 밖으로 나가 백성들과 함께 돌싸움 놀이를 관람하기도 하고, 신하들을 궁 밖의 공관으로 초청해 활쏘기 대회를 열고 푸짐한 상을 내리며 정을 나눴다. 생업에 바쁜 보통 사람들도 이 무렵에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며칠 동안이나마 술과 계절 음식, 노래와 춤이 난만한 축제의 장에 빠져들어 흥건하게 즐겼다.

향기 좋은 풀을 우려낸 물에 깨끗이 씻고, 평소보다 멋진 옷차림으로 곳곳에서 펼쳐지는 놀이판에 어울리며 간혹 하늘이 점지한 인연을 맺을 수도 있는 날이었다. 성춘향과 이몽룡의 첫 만남도 이날 이루어졌다. 규모가 성대했던 강릉 단오제 무렵에는 인근 보리밭이 은밀한 발걸음으로 붐볐다고 하니, 오랜 옛날부터 단오절을 일러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축제 시즌이라 했다. 그야말로 누구나 가슴 설레며 기다리는 ‘천중지가절(天中之佳節)’,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더위와 장마, 가뭄, 계절 질병 등으로 힘겨울지도 모를 여름을 다 같이 대비하며, 나쁜 일들을 이겨낼 힘과 용기를 서로에게 빌어주는 기원의 계절이기도 했다.  

이렇게 하나둘 단오에 얽힌 여러 풍속의 의미를 되짚어보면 여름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보내고, 풍요로운 가을을 기약하자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나 혼자 버티느라 안간힘을 쓰기보다, 가까운 이들과 계절 인사를 나누고, 여럿이 크게 모이는 ‘대동(大同)’의 기회를 통해 공동체의 삶을 슬기롭게 살아가자고 권하는 메시지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서울 송파구 체육문화회관에 마련된 예방접종센터에서 어르신들이 백신을 접종받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서울 송파구 체육문화회관에 마련된 예방접종센터에서 어르신들이 백신을 접종받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음력 5월5일, 단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절, 때아닌 옛날 풍속을 되살리자고 꺼낸 얘기가 아니다. 사랑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밸런타인데이’ 같은 이벤트를 단오에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아무리 빨리 바뀌어도, 매일 들려오는 뉴스 속 세상이 아무리 어수선해도, 돈 셈 빠른 사람들 속에서 눈치 없이 나만 홀로 뒤처지는 것 같아 입맛이 쓰더라도, 하던 일, 떠오르는 생각들 잠깐 멈추고, 지난 반년, 다가올 반년을 헤아려 보는 2분기 점검 때임을 알아차려 보려는 것이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속도가 빨라지고 있으니, 아무래도 하반기의 일상은 지금보다야 나아지지 않을까 희망을 걸어볼 만하지만, 옛 사람들이 걱정하던 것처럼 한여름 고비를 잘 넘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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