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 시대 가고 스튜디오 시대가 왔다
  • 정덕현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5.07 13:00
  • 호수 1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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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시작된 스타 PD 엑소더스…방송가 ‘빅뱅’ 초읽기

최근 방송가에서 스타 PD들의 퇴사가 잇따르고 있다. 알다시피 이런 변화는 지진이 일어나기 전 변화를 감지해 이동하는 동물들처럼, 콘텐츠 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빅뱅을 얘기해 준다. 이른바 ‘스튜디오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2010년대 초반 지상파 방송사에서 맹활약하던 스타 PD가 대거 케이블과 종편으로 이적하는 일이 벌어졌다. KBS 《해피선데이》를 이끌던 이명한 PD가 CJ ENM으로 이적한 후 나영석 PD, 신원호 PD, 김석현 PD 등 KBS PD가 대거 tvN으로 이적했고, 역시 그 《해피선데이》의 CP였던 김시규 PD가 JTBC로 이적하면서 조승욱 PD와 이동희 PD도 그 뒤를 따랐다. MBC 《황금어장》을 만들었던 여운혁 PD 역시 JTBC로 이적했고, 그 후 MBC PD들도 이 엑소더스에 동참해 CJ ENM과 JTBC로 옮겨갔다. 

ⓒSLL 제공
SLL 정경문 대표, 클라이맥스 스튜디오 변승민 대표, SSL 박준서 제작1본부장, 앤솔 로지 스튜디오 최재원 대표, 필름몬스터 이재규 감독, SLL 최재혁 전략실장(왼쪽부터) 이 4월19일 SLL 미디어데이에 참석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SLL 제공

스타 PD 탈출 행렬의 종착지는? 

당시 이런 엑소더스가 생긴 건 케이블이나 종편에서 PD를 스카우트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지상파가 갖는 한계를 이들 새로운 채널이 채워줄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단적인 사례는 나영석 PD다. KBS에서 매주 쉬지 않고 《1박2일》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았지만 시즌제 같은 걸 생각할 수도 없는 지상파에서 그는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결국 CJ ENM으로 옮긴 그는 tvN에서 《꽃보다》 시리즈와 《삼시세끼》 《윤식당》 《신서유기》 같은 시즌제 예능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바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방송가에서 또다시 스타 PD들의 엑소더스가 이어지고 있다. MBC에서 《무한도전》과 《놀면 뭐하니?》를 성공시킨 김태호 PD가 퇴사해 독립적인 제작사를 차렸고, tvN 《유퀴즈 온 더 블럭》의 김민석 PD와 박근형 PD는 퇴사해 JTBC와 이적을 논의하는 중이다. 또 tvN 《더 지니어스》 《소사이어티 게임》 《대탈출》 《여고추리반》 같은 추리 블록버스터 예능을 시도해온 정종연 PD는 김태호 PD의 제작사와 손을 잡았고, 《이타카로 가는 길》 《엄마는 아이돌》 같은 음악 예능을 만든 민철기 PD와 채널A에서 《도시어부》를 연출한 장시원 PD도 JTBC를 선택했다. 이 밖에 KBS 《불후의 명곡》 연출자인 권재영 PD는 위지윅 스튜디오 계열 제작사 A9미디어로 이적했고, 《날아라 슛돌이》 《천하무적 야구단》 같은 스포츠 예능을 연출했던 최재형 PD는 KBS를 떠나 독립적인 제작사를 차린다고 밝혔다. 과거 나영석, 신원호, 여운혁 같은 스타 PD들이 엑소더스를 했을 때 그 목표지는 새로운 플랫폼인 케이블과 종편이었다. 그렇다면 최근의 엑소더스는 어디가 목표지일까.  

이미 2016년 CJ ENM이 스튜디오 드래곤을 설립해 본격적인 드라마 스튜디오를 표방하고 나섰을 때부터 어느 정도 빅뱅은 예고된 바 있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제작비가 들어가는 드라마의 경우 방송사가 자체 제작하기보다 독립적인 스튜디오를 세워 다양한 투자의 길을 열어놓고 또 제작된 콘텐츠를 다양한 플랫폼에서 소비시키는 방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돼가고 있었다. 스튜디오 드래곤의 성공으로 다른 방송사들 역시 자회사 형태의 스튜디오 설립에 힘이 실렸다. KBS는 몬스터 유니온을 세웠고, JTBC는 JTBC스튜디오, SBS는 스튜디오S를 설립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예능으로도 조금씩 이어졌다. tvN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나영석 사단은 그 선구적인 물꼬를 이우정 작가를 중심으로 하는 ‘에그이즈커밍’으로 열었다. 물론 나영석 PD는 현재도 CJ ENM 소속이지만 사실상 일은 에그이즈커밍에서 하고 있는 상황이다. 에그이즈커밍은 나영석 사단의 tvN, 유튜브 예능은 물론이고 신원호 PD의 《슬기로운 의사생활》 같은 드라마도 제작하며 스튜디오의 영향력을 확장시키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최근에는 JTBC스튜디오가 아예 스튜디오 룰루랄라(SLL)를 만들어 감독들을 중심으로 하는 15개의 레이블을 꾸려나가겠다는 야심 찬 비전을 내세우기도 했다. 

왜 방송국이 아닌 스튜디오인가는 최근 넷플릭스·디즈니플러스 같은 해외의 글로벌 OTT는 물론이고 티빙·웨이브·왓챠·카카오TV 등 토종 OTT들, 또 유튜브 같은 새로운 플랫폼들이 등장하면서 생겨난 방송 소비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많은 이가 넷플릭스 같은 공룡 OTT가 등장함으로써 콘텐츠 제작자들은 이 플랫폼에 종속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했지만, 실상은 정반대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게임》을 성공시킨 황동혁 PD는 물론 그 시즌2는 넷플릭스에서 하겠지만 다른 작품을 굳이 넷플릭스와 할 이유는 없다. 작품을 가져갈 수 있는 글로벌 OTT가 다수 포진돼 있어서다. 즉 스타 제작자는 한 명이고 그를 원하는 OTT는 다수이기 때문에 결국 그 열쇠는 콘텐츠 제작자가 쥐게 된다는 것. 이런 흐름 속에서 스타 PD들은 더 이상 자신을 방송국에 가둬둘 이유가 없게 됐다. 이제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이나 《지금 우리 학교는》의 이재규 감독, 《슬기로운 의사생활》 등을 만든 이우정 작가 같은 콘텐츠 제작자들이 ‘슈퍼갑’인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연합뉴스
김태호 PDⓒ연합뉴스

스튜디오 체제가 일으키는 변화의 바람 

나영석 PD도 그랬지만 김태호 PD 역시 MBC를 퇴사하면서 가장 반가워하는 건 콘텐츠의 완성도를 좀 더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1박2일》이나 《놀면 뭐하니?》처럼 지금도 여전히 매주, 어떻게든 방송을 채워나가는 방식의 제작은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시간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매주 방송은 완결성이 없어 드라마나 영화, 다큐멘터리처럼 하나의 완성작으로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즌제로 하면 한 시즌이 완결되면서 좀 더 분명한 세계관과 메시지를 담을 수 있게 된다. 물론 시즌제 예능은 현재 지상파나 케이블에서도 시도되곤 있지만, 그것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시즌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스튜디오에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앞뒤 이야기가 통일성 있게 짜인 콘텐츠라야 진정한 시즌제 예능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JTBC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솔로지옥》이나 티빙 오리지널 《환승연애》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 단적인 사례다. 

또 글로벌 OTT 같은 플랫폼을 염두에 둔 작품들이라면, 이제 과거 방식의 스타 캐스팅이 그다지 가성비 있는 선택이 아닐 수 있다. 예를 들어 《오징어게임》의 정호연 같은 배우나 《지금 우리 학교는》의 젊은 배우들 같은 참신한 얼굴들이 의외로 가성비 높은 성과를 낼 수 있다. 국내에서의 인지도가 해외시장에서는 그다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스타가 캐스팅돼야 편성을 얻던 국내용 콘텐츠의 제작방식은 글로벌 OTT와 스튜디오 체제 속에서 변화될 가능성이 높다.  

모델 겸 배우 정호연ⓒ연합뉴스
모델 겸 배우 정호연ⓒ연합뉴스

당연히 소비 방식도 바뀐다. 스튜디오 체제는 다양한 플랫폼에 맞는 다양한 콘텐츠를 생산할 것이고, 그것을 독점적으로 가져옴으로써 플랫폼 구독을 늘리려 할 것이다. 따라서 구독자들은 이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스튜디오를 찾아 방송을 소비하려 할 것이고, 이런 구독자들의 변화는 OTT들의 스튜디오와의 협업 경쟁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건 그래서 또 다른 방송사가 생겨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방송사 중심 체제에서 콘텐츠를 중심으로 하는 스튜디오 체제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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