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간 ‘초심’과 ‘도전정신’ 되찾아라”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2.08.30 10:00
  • 호수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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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현대차·롯데·한화·한진·신한은행 등 줄줄이 창업주 소환
재계가 때아닌 ‘창업주 마케팅’에 골몰하는 까닭은?

‘초심’과 ‘도전정신’이란 화두가 재계를 관통하고 있다. ‘창업 초기 같은 마음으로 도전해야 살아남는다’는 기업들의 절실함은 과거와 확연히 차별화된다. 복합 경제위기를 맞아 경영환경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다 할 반등 모멘텀을 좀처럼 찾지 못하고 있기에 작금의 위기가 더욱 뼈아프다. 쇄신을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과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무(無)에서 유(有)를 일궈낸 창업주들이 속속 소환되는 이유다. 

1982년 7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이 대한항공 부산 사업본부를 방문했다. 왼쪽부터 현대그룹 정주영, 한진그룹 조중훈,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 등이다.ⓒ연합뉴스

이재용, ‘이병철 부각’ 직접 계획 

시사저널 취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최근 창업주의 업적과 기업가 정신을 기리고 적극적으로 알리는 기업이 부쩍 늘어났다. 재계 10위권 내 대기업을 중심으로 이 같은 움직임이 확산하는 분위기다. 한상만 한국경영학회장은 창업주 정신이 강조되는 이유에 관해 “코로나19 팬데믹 등으로 인한 글로벌 경기 침체에 경영 패러다임 대전환, 미·중 갈등까지 겹친 시기다. 기업사적으로 지난 60년간 이 정도 위기는 없었다”면서 “개별 기업 차원의 위기 대응 전략이 절실해지니 기업가 정신, 더 나아가 기업가 정신이 가장 높았던 주요 기업 태동기와 1세대 창업주들에게 이목이 쏠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복권 후 첫 공식 행보로 8월19일 경기도 용인의 삼성전자 기흥캠퍼스를 방문해 할아버지인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를 대대적으로 부각했다. 차세대 반도체 R&D(연구·개발)단지 기공식이 열린 자리였다. 기흥캠퍼스는 39년 전 세계에서 3번째로 64킬로비트 D램을 개발한 것을 시작으로 삼성의 반도체 사업이 태동한 곳이다. 이날 기공식 행사장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이병철 창업주의 발언과 유품인 기흥캠퍼스 모형 사진이 담긴 기념 영상이 상영됐다. 이 부회장이 ‘조부의 의지를 본받아 재도약하겠다’는 뜻으로 직접 영상에 두 가지를 포함시켜 달라고 요청했다고 알려졌다. 

이 창업주는 1983년 73세의 나이로 미국 실리콘밸리를 돌아본 뒤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기로 결심했다. 기술이나 경험이 전무한 변방국 기업 삼성이 미국, 일본 등 선진국 기업들이 선점한 반도체 시장에 도전한다는 건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이 창업주는 주변의 반대와 비웃음을 뒤로하고 이른바 ‘도쿄 선언’을 통해 사업 진출 계획을 발표했다. 

△“무자원 반도인 우리의 자연적 조건에 맞으면서 해외에서도 필요한 제품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곧 고부가가치, 고기술 상품, 즉 첨단기술 상품이다” △“반도체, 컴퓨터 등 첨단산업 분야는 세계시장이 무한히 넓다” △“반도체, 컴퓨터 산업은 그 자체로서도 시장성이 클 뿐만 아니라, 타 산업에의 파급효과가 지대하며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등 기공식 영상에서 소개된 이 창업주의 발언은 도쿄 선언의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기흥캠퍼스 모형은 이 창업주가 임직원들에게서 받은 선물이다. 삼성전자 측은 “이 부회장이 조부의 어록을 항상 곁에 두고 수시로 읽는다. 기흥캠퍼스 모형도 소중히 간직하며 반도체 사업 육성 의지를 거듭 다지고 있다”고 홍보했다. 

이 부회장이 현재 처한 상황은 1983년 못지않게 불투명하다. 앞서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 사건으로 징역 2년6개월형을 확정받고 복역하다가 지난해 8월 가석방됐다. 형기는 올해 7월29일 종료됐으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5년간 취업이 제한된 상태였다. 경영활동에도 제약이 불가피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이 부회장과 삼성전자에 대해 우려의 시선이 쏟아졌다. 천신만고 끝에 이 부회장이 8·15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복권돼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할 수 있게 되면서, 그의 리더십은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다. 

한화·한진, 변화 앞두고 先代 기념 

재계 7위 한화그룹은 7월29일 방산 계열사를 통합하는 등 사업 재편에 나선다고 밝혔다. 한화는 그동안 유사 사업군 통합 등 사업 재편 활동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체질 개선으로 경영 효율성을 높이고 사업 전문성을 강화한다는 취지에서다. 일각에서는 이를 지주사로의 강제 전환을 막으면서 경영 승계의 밑그림까지 완성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분석했다. 

김승연 한화 회장은 1981년 7월 한국화약그룹(한화 전신) 창업주인 아버지 김종희 회장이 갑작스레 타계한 뒤 29세의 나이로 총수가 된 바 있다. 모두 30대인 김 회장의 세 아들도 일찍부터 총수가 되기 위한 절차를 밟아왔다. 그룹의 변화가 가속화하는 시기를 맞아 찾게 되는 존재는 역시 창업주였다. 한화는 오는 11월10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릴 김 창업주 탄생 100주년 행사를 태스크포스(TF)까지 구성해 면밀히 준비하고 있다. 

김 창업주는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10월28일 한국화약을 세웠다. 한국화약은 1956년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자체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김 창업주는 ‘한국의 노벨’ ‘미스터 다이너마이트’ 등으로 불렸다. 2대 김 회장은 1993년 회사 명칭을 한화로 바꾸고 화학을 비롯해 방산, 기계, 금융 등을 망라하는 대기업집단으로 키웠다. 한화가 3세 승계 이후에도 지금과 같은 위치를 유지할지는 누구도 가늠하기 어렵다.  

3세 승계 전후로 총체적 난국에 휩싸였던 재계 14위 한진그룹은 지난 6월 조양호 전 회장(2대 회장) 추모 사진전을 개최했다. 전시회에는 조 전 회장이 생전에 촬영한 사진작품 45점을 비롯해 고인의 작품이 담긴 달력, 카메라, 사진집, 가방, 수첩, 여권 등 유류품도 함께 전시됐다. 6월7일 개막식에는 아내 이명희 정석기업 고문과 아들 조원태 한진 회장(3대 회장), 차녀 조현민 ㈜한진 사장 등 오너 일가와 그룹 전·현직 임원, 외부 초청 인사 등이 총출동했다. 조 전 회장의 흉상 제막 행사도 열렸다. 

조 전 회장은 조중훈 한진 창업주의 장남이다. 1974년 대한항공에 입사해 45년간 정비, 자재, 기획, IT, 영업 등 항공 업무에 필요한 실무 분야를 두루 거쳤다. 국내 항공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한 인물이지만, 말년은 불행했다.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한 한진해운을 살리려 노력하다가 2017년 끝내 실패했고, 2014년 장녀의 ‘땅콩 회항’, 2017년 차녀의 ‘물컵 갑질’ 등 가족이 잇달아 구설에 오르는 수난을 겪었다. 별세 직전인 2019년 3월엔 대한항공 정기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하기도 했다. 

조 전 회장에 이어 총수 자리에 오른 아들 조원태 회장은 누나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과의 경영권 분쟁과 코로나19란 추가 악재 속에서도 그룹 안정화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통한 경쟁력 강화와 항공산업 재편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조 회장은 선대 회장들을 떠올렸다. 조 전 회장 추모 사진전에서 한진은 조 전 회장이 중학생 시절 부친인 조 창업주로부터 카메라를 선물받은 게 계기가 돼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한진의 경영 행보에 탄력이 붙어갈수록 선대 회장들을 기념하는 작업은 더욱 적극적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기념관 개관·자서전 출간에 집 공개도 

재계 5위 롯데그룹은 지난해 신격호 창업주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창업주 정신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롯데월드타워에 신 창업주 흉상을 설치하고 기념관을 연 데 이어 회고록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도 출간했다. 신동빈 롯데 회장은 당시 임직원들에게 “새로운 롯데를 만들어가는 길에 명예회장님(신 창업주)이 몸소 실천한 도전과 열정의 디엔에이(DNA)는 더없이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면서 “명예회장님의 정신을 깊이 새기면서 모두의 의지를 모아 미래의 롯데를 함께 만들어 나가자”고 당부했다. 

신한은행의 경우 국내 4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우리·하나은행) 중에선 유일하게 창업주를 두고 있다. 신한은행 창립을 주도한 이희건 전 명예회장이 주인공이다. 신한은행은 올 6월 이 전 명예회장 회고록 《여러분 덕택입니다》를 출간했고 7월 재개관한 ‘한국금융사박물관 및 재일한국인기념관’에서 이 전 명예회장 일대기를 다룬 애니메이션을 상영하고 있다.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회고록 추천사를 통해 “팬데믹의 혼돈과 국제정세의 불확실성을 경험한 지금, 이 전 명예회장의 꿈을 향한 일관된 열정은 위기의 해법을 제시한다”며 창업주 정신을 환기했다. 

이 밖에 현대자동차그룹과 효성그룹은 창업주의 집을 공개하며 그 정신을 기렸다. 현대차는 지난해 3월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20주기를 맞아 그의 서울 청운동 옛 자택을 공개했다. 1962년 7월 지어진 청운동 옛 자택은 정 창업주가 줄곧 살면서 현대의 역사를 만들어낸 상징적인 장소다. 효성그룹도 2019년 이후 조홍제 창업주의 경남 함안 생가를 상시 개방해 왔다. 대외적으로 밝힐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아 익명을 요구한 한 재계 관계자는 “재벌 총수 입장에서 선대의 경영능력을 부각하는 게 자칫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다”면서 “대내외 경영환경이 워낙 좋지 않기에 창업주와 비교되는 부담을 무릅쓰고라도 (창업주 정신 환기를 통한) 분위기 쇄신에 매진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정부·재계의 ‘K기업가 정신 띄우기’도 활발 

일각에선 “현실 외면한 채 맹목적으로 강조하면 안 돼” 지적도 

중소벤처기업부 산하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은 올해 3월 경남 진주 지수면의 옛 지수초등학교에 ‘K-기업가 정신센터’를 열었다. 대도시가 아닌 소도시, 그것도 작은 마을의 폐교에 센터를 마련한 배경을 알아보면 실로 놀랍다. 

1921년 5월9일 지수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옛 지수초는 수많은 대기업 창업주나 대표를 배출했다. 삼성그룹 이병철·LG그룹 구인회·효성그룹 조홍제 창업주가 1회 졸업생이다. 구철회 LIG그룹 창업주, 구자경 LG 명예회장, 구태회·구평회·구두회 LS그룹 공동창업주, 허준구 GS건설 명예회장, 허신구 GS리테일 명예회장, 허완구 승산그룹 창업주, 구자신 쿠쿠그룹 창업주 등도 지수초를 졸업했다. 

지수초는 학생 수 감소 등을 이유로 2009년 송정초와 통폐합됐다. 이후 송정초가 지수초로 교명을 바꿔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중진공은 진주시와 함께 그간 방치됐던 옛 지수초 건물을 기업가 정신 소개·교육의 구심점으로 삼자는 데 합의했다. 이어 8개월여 만에 본관 교육동과 전문 도서관, 체험센터 등으로 구성된 K-기업가 정신센터를 개소했다. 

중진공은 대기업 창업주들이 살던 지수면 승산마을에서 그들의 기업가 정신과 경영철학을 되새길 수 있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예비 창업자, 청년 기업인, 중소기업 대표 등이 대상이다. 아울러 중진공은 올 4월 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과 한국생산성본부, 한국경영학회, 한국창업학회, 기업가정신학회 등 5개 기관과 다자간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들 6개 기관은 K기업가 정신 확산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운영과 사업 개발, 연구·조사 등 부문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대기업들을 주축으로 한 전국경제인연합회도 기업가 정신 띄우기에 여념이 없다. 전경련은 7월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한국경영학회와 ‘대한민국 기업가 정신 전국 확산 발대식’을 열고 협력 확대를 결의했다. 양측도 교육 프로그램 연계와 공동사업 개발, 연구·조사 지원 등에 손을 맞잡을 계획이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GS그룹 명예회장)은 “기업들이 클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바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가 정신”이라며 “기업가 정신이 전국적으로 확산돼 지역에서 성공하는 기업들이 나오고 지역 균형발전이 정착하는 데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그러나 산업 발전 역사와 구조적 현실을 외면한 채 창업주 내지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기만 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한국 경제가 과연 기업가 정신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는, 도전하는 기업이 계속 나올 수 있는 구조인지에 대해서도 곱씹어봐야 한다”면서 “특히 새로운 도전자가 나올 기회를 차단하고 기득권을 더 공고히 하기에 급급한 재벌기업들이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거나 창업주 정신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은 다소 공허하게 느껴진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이어 “재벌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1세대(창업주 시대) 이후 2세대까지는 개발독재 시대 아래서 나름의 (수출) 경쟁을 통해 성공을 이루는 기업가 정신이 존재했으나, 3세대 이후로 오면서 이것이 대폭 약화됐다”며 “경제력 집중을 해소해 도전과 경쟁이 활발히 일어나게끔 토양부터 만들어주는 게 급선무다. 그래야 기업가 정신이 널리 퍼지고 건강한 경제구조를 구축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왜 기업은 지금 '창업주 정신'을 소환하나]

“집 나간 ‘초심’과 ‘도전정신’ 되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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