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은 제2의 반도체 될 수 있을까
  • 엄민우 시사저널e. 기자 (mw@sisajournal-e.com)
  • 승인 2023.09.27 07:35
  • 호수 1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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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현대차·두산·한화 등 경쟁적으로 시장 진출
분사·IPO뿐 아니라 해외 연구소 설립 눈길

한때 ‘흥미로운 볼거리’ 정도로 취급받았던 ‘로봇’이 올해 들어 기업들의 가장 뜨거운 키워드로 급부상하고 있다. 일부 사업 부문으로 로봇을 다루던 곳은 분사(分社)를 준비하고 있고, 이미 로봇 사업을 시작했던 곳은 상장을 앞두고 있다. 해외에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하고, 두각을 나타내는 회사의 지분을 인수하기도 한다. 이처럼 2023년은 국내 기업들의 로봇 시장 진출 원년이 되고 있다.

로봇을 바라보는 기업들의 시각이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올해 초부터다. 이전까지 기업들에 로봇은 산업이 무르익을 것을 대비해 준비해야 하는 일종의 ‘보험 성격’이었다. 지금은 상용화 단계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역량을 집중하는 핵심 사업 부문이 됐다. 최근 유동성 증가로 인한 인건비 상승과 노동력 부족 상황은 로봇 산업이 발전하는 데 좋은 토양이 되고 있다. 마치 큰비가 온 후 나무들이 자라듯, 코로나19 때 ‘돈뿌리기’가 불러온 노동 기피 분위기의 틈새를 로봇들이 채워나갈 채비를 하는 모양새다. 한 재계 관계자는 “노동시장이 변하면 기업도 생존하기 위해 그에 맞게 변할 수밖에 없다”며 “인건비 절감은 물론이고 로봇은 파업, 법적 분쟁 등 노사 갈등 리스크도 없다”고 전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2022년 1월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만달레이베이 호텔에서 열린 CES 2022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4족보행로봇 ‘스팟’과 함께 연단에 오르고 있다. ⓒAP 연합

본게임 시작된 재계 ‘로봇 대전’

이런 분위기 속에서 특히 각광받는 분야는 ‘협동로봇’이다. 협동로봇은 쉽게 말해 사람과 상호작용을 하고 협력하며 기능을 수행하는 로봇이다. 공장 라인에 설치되어 반복 작업을 수행하던 산업용 로봇과는 구분된다. 재계에서는 이 협동로봇 시장이 연평균 20%대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예상한다. 국내에서 가장 두각을 보이는 곳은 두산이다. 두산로보틱스는 2015년 설립됐다. 두산이 91%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협동로봇 부문의 선두주자로 평가된다. 2018년 양산을 시작했는데 지난해 기준 1400대를 판매했다. 또 해외시장에 안착해 매출을 만들어내고 있는 회사다. 작년 기준 해외 매출 비중이 70%에 달한다. 미국과 유럽 시장을 주 타깃으로 하고 있으며 해당 지역에서 60%의 매출이 발생하는데, 두 곳의 비중이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산은 올해 본격적으로 로봇 사업에 드라이브를 거는 모습이다. 특히 작년 말 인사 때 두산가(家) 4세 박인원 사장이 오면서 사업이 더 힘을 받기 시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인원 사장은 박용현 두산연강재단 이사장의 3남이다. 두산로보틱스는 오는 10월 상장을 앞두고 있는데 올 하반기 IPO(기업공개) 최대어로 평가된다. 공모가가 2만6000원으로 확정됐고 상장 후 시가총액은 1조6853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두산은 확보한 공모 자금을 인수합병 및 해외투자에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두산로보틱스와 비교되는 국내 협동로봇 기업은 레인보우로보틱스다. 다양한 협동로봇 라인업을 보유한 레인보우로보틱스는 4족보행로봇 부문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지난 4월 미국 법인을 설립하며 현지 영업 강화에도 나섰다. 레인보우로보틱스는 특히 삼성전자가 올해 초 지분을 사들여 주목받았다. 삼성전자는 레인보우로보틱스 지분 14.83%를 보유하고 있다. 또 삼성전자 윤준오 부사장이 기타비상임이사로 이사회에 합류했다. 사실상 삼성전자의 협동로봇 구상이 이곳을 통해 실현되는 모양새다. 삼성전자는 아직 독자적으로 협동로봇을 상용화하지 못한 상태인데, 레인보우로보틱스를 통해 간접적으로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아직 인지도가 부족한 레인보우로보틱스도 ‘삼성전자가 투자한 회사’로 소개할 수 있기에 두 기업에 ‘윈윈’을 이루는 모양새다.

삼성전자는 2021년 로봇 사업 TF를 신설하고 이후 TF를 DX 본부 산하 팀으로 승격시켰다. 최근엔 휴머로이드 로봇을 반도체 생산공정에 투입할 것이란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반도체 부문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로봇을 신성장동력으로 활용하게 될지 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정의선 회장 체제 이후 일찌감치 로봇 사업에 관심을 갖고 투자를 이어오고 있다. 특히 2021년 4족보행로봇으로 유명한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인수해 주목받았다. 인수 초창기엔 그룹 내외부에서 의구심을 갖기도 했으나 2년이 지나 산업계 로봇 전쟁이 치열해진 현재, 업계에선 정의선 회장의 결정이 탁월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연합뉴스
8월21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 로봇 컨퍼런스 2023 모습 ⓒ연합뉴스

“완숙한 시장 아니어서 후발주자들에도 기회”

현대차는 로봇 관련 연구개발이 활발한 미국을 중심으로 역량 강화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케임브리지에 로봇 AI 연구소를 설립키로 한 것도 현지 인력을 유치하기 위함이라는 전언이다. 로봇 AI 연구소는 현대차와 기아, 현대모비스, 그리고 보스턴 다이내믹스가 함께 출자해 출범한다. 초기엔 연구과제 등을 수행하지만 추후 로봇 AI 플랫폼을 공급하며 수익화 모델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사내벤처로 키운 배송로봇 전문기업 ‘모빈’을 분사시키기도 했다. 최진 모빈 대표는 “현대차도 자체 로보틱스 랩에서 서비스를 준비하는 만큼 (모빈 경영에) 따로 터치하는 것은 없다”며 “서로 다양성을 추구하며 가는 가운데 접점이 있는 경우 본사와 연결해 협력할 것은 하고 있다”고 전했다.

두산로보틱스 IPO(기업공개)가 예정돼 있는 10월에 한화그룹은 협동로봇 및 무인 운반차 부문 사업을 분사해 한화로보틱스를 출범시킨다. 특히 한화그룹 3남 김동선 전무가 있는 한화호텔앤드리조트가 조인트벤처 형식으로 회사 설립에 관여키로 한 사실이 알려져 더욱 주목받고 있다. 아직 독립회사로서 문을 열지도 않은 단계지만 장남 김동관 한화 부회장과 김동선 전무가 협력해 회사를 키울 것이란 기대감이 작용하고 있다.

이처럼 국내 기업들이 일제히 로봇 시장, 특히 협동로봇에 관심을 갖고 뛰어들면서 치열한 경쟁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기업들이 목표로 하는 시장 및 제품군 상당수가 서로 겹치기 때문이다. 결국 얼마나 지속적으로 투자를 이어갈지 여부와 공급망 및 차별화된 소프트웨어 확보가 승패를 가를 변수가 될 전망이다.

저마다 속도는 다르지만 글로벌을 기준으로 보면 국내 기업들은 아직 도전자 위치에 있다. 현재는 시장 1위인 덴마크의 유니버설 로봇을 비롯해 화낙 등 일본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국내 선두주자라고 평가받는 두산로보틱스도 글로벌 기준으로 보면 점유율이 유니버설 로봇의 10분의 1 수준(3%)에 불과하다. 다만 시장 형성 단계를 볼 때 향후 판도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업계 및 시장의 공통된 평가다. 양승윤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협동로봇 시장은 무르익은 시장이 아니라, 아직 형성되고 커가는 시장이기 때문에 후발기업들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며 “하드웨어는 상향 평준화된 만큼 가격, 판매 네트워크, 소프트웨어 쪽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기업이 시장에서 선전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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