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바이처 같은 삶 사는 93세 현역 의사의 건강 비결
  • 유재욱 유재욱재활의학과의원 원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7.16 15:00
  • 호수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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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게 사는 법은 “그저 몸을 움직이는 것”

“이 초라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단 한 명의 위대한 인간.” 아인슈타인이 슈바이처 박사를 표현한 말이다. 슈바이처 박사 하면 단순히 아프리카에서 인술을 펼친 의사로 알려졌지만, 그의 행적을 보면 그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슈바이처는 젊은 천재였다. 그는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업적 대부분을 이뤘다. 20대 중반에 이미 신학-철학 박사가 됐고, 28세엔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하면서 성 스테판 루터교회 부목사로서 목회도 병행했다. 음악적인 성취도 대단해 18세에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시작해 30세가 됐을 때는 바흐 곡 연주와 이론 분야에서 유럽 일인자가 됐다.

슈바이처가 인류를 위한 봉사를 꿈꾸게 된 것은 그가 21살 되던 어느 날이었다. 문득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젊음과 건강, 지적 능력 등을 당연하게 누려도 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이런 특권은 세상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며, 세상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앞으로 10년 동안만 자신이 원하는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고, 30세가 되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누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가봉공화국의 적도 부근에서 포즈를 취한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 ⓒ 연합뉴스
가봉공화국의 적도 부근에서 포즈를 취한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 ⓒ 연합뉴스

세상의 고통을 함께 나눠야 한다는 생각

1905년 아프리카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인류를 위해 봉사하려면 우선 의사가 돼야한다고 생각해 30세가 되던 해에 본인이 강의하고 있는 학교의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교수와 학생을 병행할 수 없다는 학칙 때문에 교수직을 내려놓았다. 그의 뛰어난 재능을 아까워한 동료들이 학칙을 바꾸어 교수와 학생 생활을 병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의사 시험에 합격하고 박사 학위까지 받은 그는 1913년 아프리카로 건너가 람바레네(현재 가봉공화국)에서 의료봉사를 펼쳤다. 1965년 사망할 때까지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다.

많은 사람이 봉사활동을 한다. 어떤 이는 자신의 자아성취를 위해, 또 어떤 이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봉사한다. 정치적 목적으로 생색내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런 봉사의 가치가 낮다는 얘기는 아니다. 봉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슈바이처 박사처럼 내가 누리고 있는 특권이 세상에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 그리고 세상의 고통을 함께 나눠야 한다는 생각으로 평생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원래 노벨평화상은 수상자를 선정할 때마다 여러 가지 신념과 정치적 이유로 논란이 잦았지만, 그가 195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을 때 아무도 반대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노벨상 상금으로 나환자촌을 세웠다.

한국에도 슈바이처 박사처럼 환자를 위해 평생을 바친 의사들이 많다. 경기 남양주에 있는 한 요양병원에서 10년째 내과 과장으로 있는 한원주 과장은 93세의 나이로 아직도 현역으로 진료를 하고 있는 국내 최고령 여의사다. 1949년 의사가 된 그녀는 미국에서 내과 전문의를 따고 한국으로 돌아와 진료하던 중 1978년 남편과의 사별이 계기가 돼 그때부터 현재까지 무료 진료소를 차리고 아픈 사람을 치료해 오고 있다. 의사 생활만 70년인 그는 병이 있으면 병을 고쳐주고, 마음이 아프면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돈이 없으면 받지 않는 병원을 꿈꾼다. 그는 기쁘게 사는 법을 간단명료하게 정의했다. “그저 몸을 움직이는 것.” 그래서 그는 기쁘게 살아가면서 건강이 다하는 날까지 환자를 돌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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