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기부’ 두고 표정 갈리는 재계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2.04.06 07:30
  • 호수 1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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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포스코·삼성·LG, 직격탄 맞고도 선뜻 기부
경영환경 악화·러시아 눈총에 소수 기업만 동참

국내 각계각층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지지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다. 재계도 예외가 아니지만, 개별 기업의 표정은 제각각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양국과 비즈니스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들은 기계적인 중립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은 가운데 피해를 감수하고 기부에 동참하는 곳도 있어 화제다. 

우크라이나 구호활동의 최전선에 있는 대한적십자사는 2월28일부터 대국민 모금 캠페인을 진행해 한 달여 만인 3월28일 기준 56억여원(약정 포함)을 모았다. 빠른 시간 내에 적지 않은 기부금이 모인 데는 기업들의 참여가 주효했다. 시사저널이 대한적십자사로부터 1000만원 이상 기부한 법인·단체 명단을 받아 살펴보니 38곳 중 29곳이 기업 또는 기업에서 출연한 재단이었다. 여기엔 러시아·우크라이나와 무역을 하거나 현지에 진출해 있는 기업도 포함돼 주목을 받고 있다.  

3월6일(현지시간) 폴란드 코르초바 국경검문소 인근 우크라이나 난민 임시수용시설 앞이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연합뉴스

손해 막심하지만 ‘인도적 지원’ 위해 기부  

특히 가장 많은 100만 달러(약 12억원), 두 번째로 많은 50만 달러(약 6억원)를 각각 기부한 현대자동차그룹과 포스코인터내셔널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직격탄을 맞은 상태다. 

현대차그룹은 전 세계적인 반도체 부품난에 우크라이나 사태까지 겹치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가동을 3월1일부터 무기한 중단했다. 현대차와 기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에서 매년 평균 23만 대를 생산해 왔다. 러시아 내수 위축에 따른 매출 감소도 현실화했다. 현대차·기아의 러시아 내수 시장 점유율은 약 23%에 이른다. 현지 업체인 아브토바즈에 이어 2위다. 

현대차그룹은 우크라이나에도 계열사 로템에스알에스의 법인을 두고 있다. 로템에스알에스 우크라이나 법인은 전동차 90량에 대한 유지·보수를 2026년 5월까지 담당하기로 돼있다. 전동차 90량은 앞서 현대차그룹의 다른 계열사인 현대로템이 2010년 우크라이나 철도청 산하 차량운영기관 URSC(Ukraine Railway Speed Company)로부터 수주했다. 우크라이나 전역이 러시아군의 타깃이 되면서 로템에스알에스 우크라이나 법인의 전동차 유지·보수 시스템 운영에 비상이 걸렸다. 

포스코그룹의 종합상사인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우크라이나 미콜라이우항에서 운영 중이던 대규모 곡물 수출 터미널(창고)을 잠정적으로 폐쇄했다. 현지 주재원과 가족은 모두 인근 국가나 본국으로 대피시켰다. 전쟁 장기화로 인해 터미널 재가동 시점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포스코인터내셔널의 피해도 눈덩이처럼 불어날 전망이다. 

이는 포스코그룹의 미래와 직결된 부분이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식량 사업을 철강·에너지와 함께 3대 핵심 사업 중 하나로 삼고 육성하고 있는데, 이를 위한 주요 거점이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터미널이다. 2030년까지 곡물 취급량을 기존 800만t에서 2500만t으로 늘리고 연매출 10조원을 달성해 글로벌 10대 식량 사업자로 도약하겠다는 청사진에 적신호가 켜졌다. 

포스코그룹의 대(對)러시아 무역 확대 계획에도 그림자가 드리웠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러시아산 철강을 매입해 제3국에 수출하고, 러시아산 고철을 수입해 포스코 제철소에 공급하는 사업에 박차를 가하려던 중이었다. 

대한적십자사는 3월7일 KG그룹이 우크라이나 난민 긴급 구호를 위해 3억원을 기부했다고 밝혔다.ⓒ연합뉴스

20대 기업 중 5곳만 기부 동참 

우크라이나적십자사 등에 600만 달러(약 72억원)를 기부하기로 한 삼성전자 역시 어느 기업 못지않은 피해를 보았다. 삼성전자는 3월5일 글로벌 물류 차질 심화로 러시아에 수출하는 모든 제품의 선적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해외 생산기지에서 만든 스마트폰을 러시아 안으로 들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삼성전자는 러시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1위 기업이다. 

삼성전자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벌여온 사업도 타격을 입었다.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판매법인은 개점휴업 상태고, 러시아 칼루가에 있는 TV 생산공장은 가동 중단 위기에 직면했다. 

LG전자는 3월19일 러시아 선적 중단 소식을 발표한 후 국제 구호기관을 통해 주변국으로 피신한 우크라이나 난민들에게 세탁기,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 가전제품 현물을 지원하고 있다. 

중견기업군에선 대상그룹이 러시아 사업 차질을 무릅쓰고 대한적십자사에 우크라이나 구호성금 1억원을 기부했다. 임정배 대상 사장은 “전쟁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우크라이나 난민과 어린이들을 위해 성금 기부를 결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현대차그룹·포스코인터내셔널·삼성전자·LG전자도 우크라이나에 기부한 데 대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기업의 역할을 다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한적십자사 측은 “우크라이나는 전기, 수도, 도로, 교량, 주택 등 민간시설이 파괴되고 수도 키이우와 하르키우, 체르니히우, 헤르손 등 도시 곳곳이 인도적 위기 상황에 놓여있다”면서 “기업들의 기부 동참으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됐다”며 사의를 표했다. 

그러나 대한적십자사 등 구호기관들은 내심 규모가 큰 기업들의 기부 움직임이 좀 더 활발해지길 고대하고 있다. 국제적십자사연맹(IFRC)과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위해 국제사회에 긴급히 요청한 금액은 2억500만 스위스프랑(약 3250억원)인데, 현재까지 대한적십자사에 모인 기부금 56억원가량은 요청액의 1.7% 수준이다.  

국내 20위권 대기업 중에선 SK그룹이 3월3일 전쟁 난민 중 어린이 구호를 위해 써달라며 유니세프 폴란드 지부에 100만 달러를 기부한 데 이어 카카오(유니세프에 42억원어치 암호화폐 기부), 삼성, 현대차, 포스코, LG까지 6곳만 기부에 참여했다. 대외적으로 밝힐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아 익명을 요구한 한 재계 간부는 “미국 등 서방세계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고, 러시아는 이에 반발해 맞불 격인 경제 조치들을 속속 내놓는 ‘경제전쟁’도 함께 벌어지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 전쟁으로 인한 경영환경 악화보다 큰 문제는 전쟁 종식 이후를 대비하는 일”이라며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기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섣불리 나서기 힘든 측면이 있다”고 전했다.  

“전쟁 종식 이후가 더 큰 문제” 

당장 러시아 정부는 3월7일(현지시간) 정부령을 통해 자국과 자국 기업, 러시아인 등에 비우호적 행동을 한 국가와 지역 목록을 발표하면서 한국을 포함시켰다. 목록에는 또 우크라이나, 미국, 영국, 호주, 일본, 27개 유럽연합(EU) 회원국, 캐나다, 뉴질랜드, 노르웨이, 싱가포르, 대만 등이 들어갔다. 비우호국가 목록에 포함된 국가에는 외교적 제한을 포함한 각종 제재가 취해질 것으로 관측된다. 이로 인해 러시아와 거래하는 국내 기업들의 피해와 염려는 더욱 증폭됐다. 

미국은 미국대로 우방국 주요 기업들이 미국의 대러시아 수출 통제에 동참하지 않을 경우 사업에 심각한 피해가 가해질 수 있다고 압박하는 모습이다. 아시아 국가 중 한국과 일본, 싱가포르, 대만 등이 미국 주도 대러 제재를 준수하고 있다. 반면 세계 2위 경제대국이자 러시아의 우방국인 중국은 제재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국제 여론도 기업들이 간과할 수 없는 요소다. 애플이 3월초 러시아에서 모든 제품 판매를 중단하고 러시아 외 지역의 앱스토어에서 러시아 관영매체 러시아투데이(RT), 스푸트니크를 퇴출한다고 밝히자 갑자기 삼성전자에 불똥이 튀었다. 미국 CNBC 방송은 당시 “애플의 움직임이 삼성전자 같은 라이벌 회사들에 틀림없이 (글로벌 소비자들을 의식해 비슷한 조치를 취해야 할 거란)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애플이 이처럼 과감하게 결정한 배경엔 상대적으로 낮은 러시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이 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애플 아이폰의 러시아 시장 점유율은 15% 정도로, 삼성전자 갤럭시(30%)의 절반 수준이다. 삼성전자 측은 3월5일 러시아행 선적을 중단한 뒤 “애플, 인텔 등 미국 기업들이 제품 판매를 중단한 것과 달리 우리는 선박 문제로 불가피하게 이번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라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그리고 같은 날 우크라이나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신축적인 대처엔 러시아-우크라이나 무력전쟁과 동시에 촉발된 전 세계의 경제전쟁을 맞은 글로벌 기업의 고뇌가 녹아들어 있다.   

■ “전쟁 장기화하면 러시아에 수출하는 기업들 더 타격” 

국내 대기업들, 러시아에 53개·우크라이나에 12개 법인 운영 중  

현재 국내 대기업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설립한 해외법인은 각각 53개, 12개로 파악된다. 한국CXO연구소의 최근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내 72개 대기업 중 16곳이 53개 법인을 러시아에 설립한 것으로 집계됐다. 

그룹별로는 현대자동차그룹의 러시아 법인이 18곳(34%)으로 가장 많았다. 현대차그룹은 현대차, 기아차, 현대제철, 현대건설, 현대글로비스, 현대엔지니어링, 현대위아, 이노션, 현대머티리얼 등의 러시아 법인을 뒀다. 완성차 제조와 부품 판매를 비롯해 자동차 A/S 부품 판매, 소프트웨어 개발, 해외 스틸 서비스센터 운영, 건설, 운송 서비스, 광고대행, 금속·비금속 원료재생업, 경영 컨설팅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쳐왔다. 

삼성·롯데그룹은 각각 9개 법인을 러시아에 설립했다. 삼성의 경우 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중공업, 삼성SDS, 제일기획 등이, 롯데는 호텔롯데, 롯데상사, 롯데제과, 롯데쇼핑 등이 러시아에 진출해 있다. SK·CJ·두산·KT&G그룹은 2개씩, LG·포스코·DL·효성·SM·한국타이어·아모레퍼시픽·하이트진로·장금상선그룹은 1개씩 러시아 법인을 뒀다. 

우크라이나에는 6개 대기업이 12개 법인을 세웠다. 단순히 해외법인 수만 따지면 국내 대기업들이 우크라이나보다 러시아에 4배 이상 많이 포진해 있는 셈이다. 포스코그룹과 LG그룹이 우크라이나에서 각각 3개 법인을 운영 중이다. 이 밖에 삼성그룹과 GS그룹이 2개씩, 현대차그룹과 한국타이어그룹이 1개씩이다.

때문에 전문가들도 우크라이나보다 러시아에 진출한 기업의 피해를 더 우려하고 있다. 김꽃별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수석연구원은 “한국에 우크라이나는 68위 교역국이고, 그 비중도 해마다 낮아지는 추세다. 반면 러시아는 한국의 10대 교역국 중 하나다”면서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러시아 수출 비중이 높은 품목을 중심으로 국내 기업의 피해가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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