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식 의사 만들기’, 이제 아빠 역할은 필수가 돼버린 사회
  • 조귀동 《세습 중산층 사회》 저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5.03 11:00
  • 호수 1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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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직 입성한 자신의 성공 공식 이식하려 해
가장 효과적이자 안정적인 지위 재생산 방식

2000년대까지만 해도 자녀의 명문대 입학 필수조건은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그리고 아빠의 무관심’이었다. 치열한 경쟁 속에 대학입시 방식이 얼마나 빠르게 변하는지 모르는 아빠는 차라리 침묵하는 게 최선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2010년대를 지나면서 정보력과 네트워크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아빠들이 등장했다. 한국에서 ‘상위 중간 계급(upper middle class)’의 습속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2019년도부터 계속 ‘아빠 찬스’가 도마에 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내 언론을 통해 서울 대치동 등에서 아빠의 역할이 늘어났다는 기사가 등장한 것은 2010년 초중반부터다. 2013년 ‘돼지엄마 밀어내는 대치동 키즈 출신 아빠들’이라는 중앙일보 기사가 대표적이다. 기사는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한 가정을 소개한다. 엄마가 다른 엄마들의 텃세에 제대로 사교육 정보를 수집하지 못하고 있을 때, 대기업 연구원인 아빠가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학원 정보를 구해 오고 각종 입시설명회도 같이 다녔다는 것이다. 이들 ‘행동하는 아빠’는 사교육 수혜를 받고 전문직 입성에 성공했으며, 자녀들에게 자신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이식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시사저널 박정훈
4월26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한쪽 차로에 학생들을 태우러 온 학부모의 차가 줄지어 정차돼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시대정신이 된 집약적 양육

자녀 교육에서 아빠의 역할이 커지게 된 데는 뚜렷한 구조적 원인이 있다. 먼저 ‘집약적 양육(intensive parenting)’이라 불리는 행태가 상위 중산층을 중심으로 확산됐기 때문이다. 집약적 양육은 일차적으로는 교육비 지출뿐만 아니라 양육 시간 투입을 늘리는 것이다. 나아가 자녀를 세세하게 관리하고 그들이 목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당근과 채찍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코치 같은 역할 모델이 확산됨을 의미한다. 자녀에 대한 마이크로컨트롤은 필수다. 

마티아스 도프케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 등은 미국과 유럽에서 1980~90년대 집약적 양육이 등장했다고 설명한다. 1970~80년대 계층 격차 확대를 목도한 고소득 전문직 부모들이 자녀에게 계층 지위를 물려주기 위해 양육에 시간을 쏟아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학력과 직업에 따른 임금 격차가 커지는 상황에서 고만고만한 자산에 직업 지위에 주로 의존하는 상위 중산층 가정의 대응이었던 것이기도 하다.

남재욱 고용정보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발표한 논문에서 2008년 당시 취업한 청년이 소득 증가 유형에 따라 4개 집단으로 나뉜다고 분석했다. 14%를 차지하는 ‘급증형’은 2008년 월 350만원에서 2017년 월 550만원으로 57% 늘어났다. 그런데 바로 다음 ‘중간 증가형(37%)’은 월 220만원에서 310만원으로 급여 상승률이 40%로 떨어졌다. ‘낮은 증가형(40%)’의 급여 증가율은 33%(150만원→200만원)에 불과했다. 한국에서 집약적 양육이 각광받는 배경에는 소득 격차 심화가 있다 할 것이다.

집약적 양육 과정에서 가장 희소한 자원은 시간이다. 아빠의 참여가 늘어나는 건 필연적이다. 또 자녀가 어린 시절부터 유·무형의 ‘스펙’을 쌓기 위해서는 부모가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데 아빠의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대학 입학과 바로 이어지는 일자리 경쟁이 심화되면서 시험 성적 위주의 양적 경쟁에서 엘리트 중등학교 진학, 어학·과학 분야의 능력과 경험, 인턴 등 다양한 활동 경험 같은 질적 경쟁으로 바뀌는 것도 또 다른 원인이다. 제한된 자리를 두고 경쟁이 세질 때 결과를 잘 보여주는 게 2017년 사라진 사법시험 제도다. 사시 합격자 평균연령은 1986년까지 25.2세였는데, 1996년 28.4세로 상승한 뒤 28~29세 수준을 유지했다. 문제가 판례 위주로 바뀌면서 오랫동안 준비 학원을 다니는 게 필수가 됐다. 

2010년 당시 사법시험 출제위원인 지원림 고려대 교수는 “나도 처음 들어보는 판례를 들고 와 질문하는 경우도 있다”며 “지엽 말단적인 판례까지 출제되더라”고 혀를 내둘렀다. 초등학교 때 이미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끝내고, 고등학생 때 고가 기자재를 동원한 실험을 해 논문을 쓰며, 아빠 인맥으로 다양한 경험을 할 자리를 구해야 하는 건 근본적으로 입시제도의 문제가 아닌 셈이다.

 

무한경쟁의 종착역이 된 ‘의대’

행동하는 아빠들이 가장 바라는 자녀의 미래는 의대 진학이다. 중학생을 대상으로 의대 입시 전문을 표방한 학원들이 성업한 지가 이미 대치동이나 목동 등에서 10년이 넘었다. 수학·과학 올림피아드나 과학 영재캠프 등 의대 진학 준비 필수 코스를 밟기 위해서는 학원에 의존해야 한다. 영재학교와 과학고는 의대 입성 확률을 높이기 위한 베이스캠프로 여겨진다. 의대에 합격하더라도, 좀 더 서열이 높은 곳에 가기 위해 반수나 재수를 선택하는 이도 많다. 그에 따른 결원으로 의대 편입학 모집인원이 늘어나면서 관련 입시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기도 하다. 

강력한 의대 선호는 계층 대물림에 의사만 한 직업이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다. 교육평론가 이범씨를 비롯한 여러 전문가는 “IMF 이후 고용 불안정이 심해지면서 대치동 전문직 부모들은 자녀가 자신들의 지위를 물려받는 길은 의사 같은 전문직밖에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됐다”고 지적한다. 

급여 수준, 안정성 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입시라는 관문만 해결하면 그럭저럭 예측 가능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해 보인다. 변호사의 경우 서울대나 연·고대 로스쿨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먼저 비슷한 ‘급’ 대학에 입학한 뒤, 그곳에서 엄청나게 학점 관리를 하고 높은 법학적성시험(LEET) 점수를 확보해야 한다. 로스쿨에서도 학업 성적과 인턴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대기업에 입사해 임원이 되거나, 스타트업을 창업해 대박을 치는 건 기실 ‘운’의 영역이다. 잘 교육받고 부를 획득한 상위 중산층 부모들이 모두 ‘내 자녀 의사 만들기’에 목을 매는 것은 그것이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안정적인 계층 지위 재생산 방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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