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자식같은 오리 2만 마리 땅에 묻어” 망연자실
  • 정성환 호남본부 기자 (sisa610@sisajournal.com)
  • 승인 2020.12.0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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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발생 정읍 소성면 기린리 오리사육 농가 가보니
농장주의 한숨…“언제 재입식될지 몰라 생계 막막”
“방역 철저히 했는데, 왜 AI 발생했는지 이해되지 않아”

“자식같이 애써 키운 오리를 모두 땅에 묻으며 저도 누웠습니다.”

올 들어 처음으로 지난달 28일 H5N8형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가 확인된 전북 정읍시 소성면 기린리 오리농장 주인 안 아무개(여·60)씨의 한숨이다. 역학조사 당시 넘어져 입은 왼쪽 발목 골절로 깁스를 해 거동이 불편한 농장주 안씨는 “방역당국으로부터 AI 확진 소식을 전해 듣고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다쳤다”며 “몸이야 치료하면 낳겠지만 자식같이 애써 키운 새끼 오리를 땅에 묻으며 마음 고생으로 드러누웠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의 축사는 지금 텅 비어 있다. 자식처럼 키우던 오리를 무더기로 살처분했던 지난 28일 새벽 시간이 안 씨에게는 ‘악몽’으로 기억될 뿐이다. 오리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는 듯 축사 안쪽을 기웃기웃하다가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만 연신 내쉬었다. 안씨는 서울에서 귀농한 지 10년만에 이같은 변고(?)를 당했다. 축사 3동에서 모두 1만9000수의 육용오리를 키웠던 그는 “이번 사태로 마을 사람들과 주변 가금농가에 죄송할 뿐이다”고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최근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H5N8형 AI)가 발생한 전북 정읍시 소성면 기린리 육용오리 농장 ⓒ시사저널 정성환
최근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H5N8형 AI)가 발생한 전북 정읍시 소성면 기린리 육용오리 농장 ⓒ시사저널 정성환

“오리 땅에 묻는 시간, ‘악몽’으로 기억될 뿐”

12월 2일 오후 2시쯤, 정읍 소성면 기린리 신천마을 일대 논 가운데 위치한 안씨의 오리 사육농가 주변은 인적이 끊겨 황량한 기운이 감돌았다. 소성면 면사무소로부터 2km남짓 떨어진 이곳에 닿기까지 왕복 2차선 도로는 막 소낙비가 내린 것처럼 길바닥이 온통 소독약품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농장입구에는 ‘방역상 관계자 외에는 출입금지’라는 팻말과 함께 희뿌연 소독용 생석회가 뿌려져 있었다. 

이 농장은 11월 27일 저녁 오리 출하 전 실시한 검사에서 H5형 항원이 검출됐고, 정밀검사 결과 다음날 오후 3시께 H5N8형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확진 판정을 받았다. 방역당국은 예방적 차원에서 이날 밤 해당 농장 오리 1만9000마리를 살처분했다. 정부는 역대 최악으로 꼽히는 2016년 AI 사태의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AI 위기 경보 단계를 ‘심각’으로 상향 조정하고, 해당 오리농장과 반경 3㎞ 이내 6 농가의 86만8000마리의 닭과 오리를 예방 차원에서 살처분했다.

또 발생농장 반경 10㎞를 방역대로 설정해 방역대 내 가금농장 68농가 290만5000마리의 이동을 30일간 제한하고 예찰·정밀검사를 진행 중이다. 정확한 발병원인 등은 앞으로 추가적인 역학조사를 통해서 증명해 나갈 예정이다.

AI 발생 정읍 소성면 기린리 오리농장주 남편이 취재진에게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12월 2일 오후 AI 발생 정읍 소성면 기린리 육용오리사육 농장주의 남편이 취재진에게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슈퍼 갑’ 당국·계열사 사육농가에 책임 떠넘겨

안 씨는 왜 자신의 농장에서 AI가 발생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는 “그간 타 지역 야생조류에서 고병원성이 발견돼 어느때보다 사육환경과 방역에 신경썼는데 감염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소독작업 중이던 안 씨의 남편도 가세해 “매뉴얼대로 방역을 철저히 했다”며 “철새도래지인 고창 동림저수지가 가깝고 농장 옆 100여m 거리에 소류천이 있다 보니 AI를 퍼뜨린 주범이 철새로 짐작될 뿐이다”고 말했다.  

그는 “28일 심야 1시 30분부터 살처분업체가 들이닥쳐 2만여 마리의 오리를 땅에 묻었는데, 보상이 얼마나 나올지도 모르겠다. 복구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알기도 어렵고 재입식이 언제가 될지도 짐작할 수 없다”며 “이대로 도산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고 불안해 했다.

일단 고병원성 AI가 발병하면 가금류 사육농가들은 큰 타격을 입는다. 발생한 곳과 주변 반경 3km 이내 닭과 오리 등은 모두 살처분당한다. 키우던 가축이 죽은 것도 억울한데 사육 제한 등 각종 규제도 뒤따른다. 여기에 책임소재를 둘러싼 당국과의 줄다리기도 현재까지 AI 발생을 사실상 ‘운’에 내맡길 수밖에 없는 해당 농가에 큰 어려움을 안겨준다. 

농장주 안씨는 역학조사라는 말만 들어도 분통이 터질 지경이라고 말했다. AI 발병 책임을 모두 축산농가에 떠넘기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안 씨는 “행여 방역당국의 괘씸죄에 걸리까봐 말하기조차 조심스럽다”면서 “AI가 발생하면 망하는데 어느 농가가 신고와 방역을 소홀히 하겠느냐. AI는 천재지변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고 항변했다. 

지난달 26일 출하하기 위해 시료 3마리를 서부동물위생시험소에 보낸 것 자체가 ‘신고’나 마찬가지인데 역학조사반이 이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폐사하거나 감염 증상을 보인 오리가 없어 신고하지 않았는데도, 역학조사반이 일방적으로 신고의무 위반과 차단방역 소홀 등의 꼬투리를 잡아서 농가에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당국에 의해 신고의무 위반이 확정되면 이 사육농가는 AI 최초 발생에 따른 보상비 20% 삭감에 이어 추가로 보상비 삭감 등 불이익을 받게 된다. 정부의 살처분 보상금 차별화 지급방안에 따른 것이다. 안씨는 “1마리당 900원에 해당하는 병아리 입식비용과 40여일 동안 사육에 들어간 사료비, 인건비, 운영비 등을 감당하고 나면 생계가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이뿐만 아니다. 이번 피해로 1년여간 오리를 사육할 수 없다. 수개월 동안 농장을 소독하고 새로이 사육환경이 마련될 때까지는 다른 농업에 종사해야 한다.

이 같은 사정은 살처분 당한 농가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살처분 보상금을 지급하고, 생활안정자금을 지원한다지만 계열화 농장 주인들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감당하기 어렵게 늘어날 빚 걱정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오리 사육농가 A(65)씨는 “보상금이 나와 일부를 받아도 새끼오리 입식비와 사료 대금 등을 빼고 나면 빚을 떠안아야 할 처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계열화 농장이 키우는 오리는 이들 소유가 아니다. 계열사가 지원한 새끼오리를 위탁받아 40여 일 키운 후 납품하면서 1000원 안팎의 사육 수수료를 챙기는 게 전부이다. 그렇다 보니 살처분 보상금이 나와도 소유주인 계열사가 대부분 챙겨간다. 축사 난방비나 인건비, 축사 바닥에 까는 톱밥 구입비 등을 달라고 하소연할 데도 없다 보니 농가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슈퍼 갑’의 위치에 있는 계열사들이 AI로 인한 피해를 축산농가에 떠넘기고 있다는 게 A씨의 주장이다.

전북 정읍시 소성면 기린리 오리사육 농가 ⓒ시사저널 정성환
전북 정읍시 소성면 기린리 오리사육 농가 ⓒ시사저널 정성환

“4년 전 악몽 재현되나”…전남 나주 농장 등도 걱정 태산 

정읍 인근 김제와 부안 등은 물론 국내 최대 오리 사육지인 전남 나주의 농가도 AI 확산 공포에 불안감과 초조함을 내비치고 있다. 나주는 국내 최대 오리 사육지인 데다가 두 번째로 사육량이 많은 영암과도 인접했다. 두 시·군의 오리 사육량은 전국 46~50%에 달해 AI가 번지면 걷잡을 수 없게 될 전망이다.

나주시 봉황면의 오리 사육농장주 김아무개(56)씨는 “4년 전 닭과 오리 수만 마리를 살처분한 기억이 아물기도 전에 또 AI가 발생해 농가가 불안에 떨고 있다”며 “정성을 쏟은 농사를 한순간에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농가들은 상당히 예민한 상태”라고 말했다.

올해 야생조류에서 잇달아 고병원성 AI가 확진됐으나 가금농장에서 AI가 발병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2018년 3월 이후 2년 8개월 만이다. 뒤이어 2일에는 경북 상주의 한 닭 농장에서 고병원성 AI가 확진됐다. 정읍 오리농장에서 고병원성 AI가 발생한 지 나흘 만의 일이다.

올해 고병원성 AI는 지난 10월 21일 충남 천안 봉강천 야생조류에서 처음 발견됐다. 이어 경기 용인 청미천, 천안 병천천, 경기 이천 복하천 등 철새도래지의 야생조류에서도 고병원성 AI 항원이 검출됐다. 이번 고병원성 AI가 발생한 정읍 소성면은 인근 철새도래지인 부안 동진강의 야생조류에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가 이미 검출돼 강화된 방역조치가 적용 중인 지역이다. 보통 고병원성 AI는 야생조류 발생 20일 전후로 농가에 전파된다. 올해는 36일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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