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랑은 사람 사랑”
  • 이문재 편집위원 (moon@sisapress.com)
  • 승인 2003.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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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종로서적 사장 이철지씨/“올 봄부터 출판 일에 전념”
들켰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인천시 부평역 앞에 자리 잡고 있는 씽크빅문고. 인천 지역에서는 가장 큰 축에 속하는 대형 서점이다. 1998년 종로서적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가 3년 전부터 씽크빅문고를 위탁 경영하고 있는 그는 “내가 여기에 있는 줄 아무도 모르는데”라며 웃었다. 검정색 양복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차림. 혹시나 싶어 발치를 내려다보았더니, 여전히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지난해 6월, 100년 전통의 종로서적이 부도가 났을 때, 종로서적을 아껴온 출판인과 지식인, 문화예술계 인사들 사이에서는 이철지 전 사장(62)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았다. ‘그가 있었다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1978년 평사원으로 입사해 1990년 사장 자리에 오른 그는 창업주와 노조 사이에서 갈등이 일자, 1998년 환멸을 느끼고 종로서적을 뒤로 했다.


“종로서적 살릴 방법 있는데…”


1970년대의 종로서적은 단순한 대형 서점이 아니었다. 정식 상호가 ‘종로서적센터’였듯이, 거리 도서관, 즉 문화 공간 이미지를 심는 데 힘썼다. 돈이 없어 책을 사지 못하더라도 마음껏 책을 볼 수 있는 도서관이자, 유명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문학 강의실’이었으며(‘작가와의 대화’를 100회 이상 지속했다), 따로 출판부를 둔 양서의 산실이었다.


종로서적을 지식의 댐이자 문화적 랜드 마크로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 종로서적의 ‘죽음’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래서 오는 3월, 이씨가 출판계로 복귀한다는 뉴스보다, 지난 여름의 심경에 관해 먼저 물었다. 그에 따르면, 종로서적의 부도는 예고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서점 환경이 낙후해 있었다. 구식 건물에다가 임차료 비중이 너무 높았다. 건물주가 기독교 공익 기관이지만 상업적 마인드가 강해 임대료가 높은 업종을 선호했다. 현재 종로서적 건물 1~2층에는 은행이, 지하에는 술집이 들어가 있다. 이씨는 “종로서적을 되살리지 못한다면 기독교계와 출판·문화계 모두 죄인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종로서적을 부활시킬 수 있는 몇 가지 해결책을 갖고 있었다. 지난해 출판계 원로들이 자문했을 때 밝혔듯이, 먼저 거래 출판사와 종로서적은 서로 채권을 동결하고, 종로서적 노조 또한 퇴직금 수령을 뒤로 미루며, 건물주에게 임대료를 낮추고 은행을 내보내 달라고 설득한다면 회생이 가능하다. 그는 “이같은 조건이 충족된다면 여론을 모아 백의종군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지만, 그 이후 소식이 없다”라고 말했다.


이철지씨는 현재 두 가지 일을 하고 있다. 씽크빅문고를 경영하는 동시에, 한걸음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있다. 종로서적을 나와서 한 2년 쉬다가, 아내(정해순) 명의로 출판사를 설립해 그동안 책을 여섯 가지 펴냈다. 최근 그가 신문사 문화부 기자들의 전화를 자주 받게 된 것은 <권정생 이야기>(전 2권)을 펴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원래 1980년대 중반 종로서적 출판부에서 그가 기획하고 편집한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를 복간한 것이다. 그만큼 애정이 있는 책이었는데, 지난해 종로서적이 문을 닫으면서 절판되는 바람에 다시 살려낸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음식을 먹는지 알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서양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들과 친한지 알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말로 번역이 가능하다. 이철지씨가 꼭 그렇다. 그의 주위에는 십년지기가 아니라 20~30년 지기가 수두룩하다. 동화작가 권정생·이오덕 씨를 비롯해, 농사 지으며 글을 쓰는 전우익씨(최근 방송사의 독서 프로그램 덕분에 많은 독자를 확보했다), 판화가 이철수, 최완택·이현주 목사, 정호경 신부 등 ‘천하의 반골’들 말이다.




일터에서는 늘 검정 고무신 신어


<권생생 이야기>를 다시 펴낼 때의 내면 풍경이 이 책의 앞머리에 실려 있는데, 그가 아끼고 존경하는 20~30년 지기들은 바로 그의 고향과 같은 존재였다. 서울 토박이여서 고향에 대한 애틋함이나 설렘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고향을 찾고 싶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오랜만에 핸들을 잡았다. 서울을 벗어나서야 목적지가 정해졌다. 제천에서 판화가 이철수씨를 만난 다음, 이현주 목사와 이오덕씨를 떠올리며 봉화로 내려가 전우익씨를, 다시 안동으로 가 권정생씨를 마주한 것이다.


이 ‘아름다운 반골’들은, 이씨가 종로서적 출판부에서 책을 만들 때 인연을 맺었다. 다른 출판사에서 수지 타산이 맞지 않을 것 같아 포기했던 종교·철학·문학 관련 서적들을 펴내며 이현주 목사를 만났고, 이목사의 소개를 받아 두루 알게 되었다. 모두 이씨에게는 하늘 같은 분들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전우익씨는 권정생씨 못지 않게 각별하다. 15년째 검정 고무신을 보내오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시멘트 부대에 포장해 우송되는 고무신이 민망하기도 했다. 사무실 한켠에 처박아 두었다가, 전씨가 사무실을 찾아올 때면 마지못해 몇 번 신었다. 몇 번을 벼른 끝에 한번 물었더니 전씨는 “검정 고무신을 신는 사람들이 누구냐? 감옥에 있는 의로운 사람이나 흙을 가꾸는 농부들이다”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농부처럼 겸손해지라는 가르침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후 이씨는 일터에서 늘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이씨는 오는 3월 씽크빅문고에서 손을 뗀다. 애초 약속했던 기한이 지났을 뿐더러, 서점 매출도 증가하고 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물러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내게서 책냄새가 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양복 차림으로 매장을 오가다 보면, 처음 보는 고객인데도 다가와 책을 찾아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씨는 영락없는 서점 사장이다. 계산을 하다가 책값이 모자라 안타까워하는 학생이 있으면, 선뜻 제 주머니에 손이 들어간다. 그렇게 책을 사들고 간 학생들은 책뿐만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다시 보게 된다. 그는 “그 학생이 나중에 화분을 보내왔는데, 기분이 썩 괜찮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서점 경영의 관건이 ‘사람 사랑, 책 사랑’이라고 말한다.


다시 가난한 출판인으로 돌아가는 이씨는 종로서적 출판부 시절부터 고향과 같은 스승들에게서 받은 가르침을 편집 방향으로 정해놓고 있다. 상업적인 책은 내지 않는다는 것이 제1 원칙이다. 대신 이 땅에 숨어 있는 ‘귀한 삶과 정신’을 발굴해 소개할 생각이다. <권정생 이야기>를 내놓기 직전, 그는 장기려 박사와 채규철 씨의 평전을 1,2 권으로 한 ‘아름다운 사람 시리즈’를 펴냈다. 평생 자기 뜻을 지키며 미래를 위해 분명한 길을 개척한 인물들이다. 검정 고무신을 신은 대형 서점 사장, 안 팔리는 책만 내겠다고 고집하는 작은 출판사 사장 이철지씨 역시 ‘천하의 반골’ 가운데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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