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기 힘든 국보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4.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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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가운데 일반인들이 가장 보기 힘든 국보는 무엇일까요.
'수백 마리의 돌고래를 발견한 곳은 포항 동쪽 10마일 해상입니다. 같은 자리에서 1시간 만에 수천마리의 돌고래를 다시 만났습니다.' 6월28일자 MBC 9시 뉴스 방송 내용의 일부입니다. 저는 이 뉴스를 들으며 반구대를 떠올렸습니다. 경남 울산시 언양면 대곡리 계곡에 있는 국보 285호 반구대(盤龜臺`예로부터 거북은 장수, 벽사의 의미로 많이 쓰였습니다.)암각화는 '건너각단'이라는 절벽의 가로 6m, 세로 3m 바위벽에 그려져 있는 300여점의 암각화입니다. 바위 밑부분에 그려져 있기 때문에 물이 마를 때만 볼 수 있습니다. 일년 동안에 볼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암각화에는 호랑이 사슴 멧돼지 거북 그리고 고래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처럼 거대하고 구체적인 그림들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 암각화는 세계적으로 그 유래가 없습니다. 수천년 전에 새겨졌다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윤곽선이 선명합니다. 1970년 부근 불교 유적을 조사하던 동국대 문명대 교수가 이 세계적인 유적을 발견했습니다.
KBS는 이 암각화를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를 살펴보면 반구대 암각화에는 바다동물과 육지동물이 모두 등장합니다. 주로 암각화 왼쪽(동해바다쪽입니다)을 차지하고 있는 바다동물의 중심은 고래입니다. 떼지어 한 방향으로 헤엄쳐가는 모습인데 모양이 다채롭습니다. 어미고래 등에 업힌 새끼고래, 물을 뿜어대는 고래, 작살에 꽂힌 고래, 흰수염 고래, 돌고래, 거꾸로 뒤집힌 고래, 먹이를 걸러 삼키고 있는 고래 등등. 고래를 가까이서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서는 이런 그림을 새길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상어, 먹이를 물고 가는 물개도 보입니다. 암각화 오른쪽(육지쪽입니다)을 차지하고 있는 육지동물은 대개 오른쪽을 향해 있는데 표범, 떼지어 가는 사슴 등이 보입니다. 말 탄 몰이꾼이 사슴을 몰아주면 길목을 지키던 사람이 활을 쏘는 그림, 멧돼지에 칼을 들이대며 동물과 맞서는 그림도 있습니다.
암각화 그림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역시 고래입니다. 반구대를 돌아 나가는 태화강은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곳으로 한때 세계적인 고래잡이 어장이었습니다. 불과 15년 전만 해도요. 암각화에 새겨져 있는 바다동물 68점 가운데 고래가 43점입니다. 긴수염고래, 흰긴수염고래, 범고래, 귀신고래, 향유고래 등 고래별 특징이 드러나도록 새겼습니다. 암각화는 고래의 종류 뿐 아니라 생태도 표현했습니다. 귀신고래는 아기 고래를 업고 다니는 것이 특징인데 이런 모습이 그대로 새겨져 있습니다. 바닷물을 삼킨 뒤 물을 뿜으며 먹이를 걸러내고 다시 바닷물을 삼키는 고래의 먹이 섭취 과정을 표현한 그림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언제 왜 이런 암각화를 남겼을까요. 이 암각화는 3천년전 청동기시대에 새겨졌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합니다. 암각화에는 20여명의 사람들이 배를 타고 부구(浮球-고래와 배 사이를 연결해 작살을 맞은 고래가 저항할 때 충격을 흡수하고 고래가 죽어도 가라앉지 않도록 하는 도구)라는 도구를 사용해 고래를 잡아 끌고오는 그림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도 작살이나 통나무배를 이용해 실제로 고래를 사냥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견해입니다. 암각화에는 잡은 고래를 분배하는 그림도 볼 수 있습니다. 매우 사실적이지요.
이 암각화는 한 시기에 새겨진 것이 아니고 시차를 두고 새겨졌습니다. 면 전체를 쪼아서 파는 면새김으로 새겨진 뒤에 다시 그림의 윤곽만을 쪼아 만든 선새김이로 새겨졌습니다. 면새김에는 바다동물이 많은 반면, 선새김에는 육지동물이 훨씬 많습니다. 이 지역이 해양 문화에서 농경문화로 옮겨가는 흐름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새김 그림 중에 울타리 안에 있는 돼지나 소 그림이 등장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주거지도 아닌 이곳에 암각화를 새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암각화 가운데 그려진 20명의 사람 모습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합니다. 팔을 벌리고 선 사람, 악기를 부는 사람, 춤을 추는 사람 등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의식행위입니다. 고래를 많이 잡게 해달라고 신
에게 비는 것입니다. 고래는 고기와 기름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과장되게 표현한 성기가 등장하는 것은 다산을 기원하는 것인데 이것은 전세계적인 암각화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표현입니다. 이곳이 신성한 장소, 곧 제단이며 암각화는 청동기인들의 기원을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우리가 지금 만나는 동해바다 고래들은 시공을 뛰어넘어 이런 역사를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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