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는 타살 당했다” “아니다, 병사했다”
  • 장영희 전문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2005.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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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 패망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스펙트럼은 폭넓다. 6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대우 해체를 둘러싼 실체적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우는 죽었다. 주요 계열사들이 화려하게 부활했다고 하지만, 대우 부실을 떠안은 금융기관에 공적자금을 투입한 덕분이지 자력으로 갱생한 것은 아니다. 1999년 해체 시점부터 대우가 왜 죽었는지를 놓고 논란이 불거졌지만 이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자살인가, 타살인가? 대우 스스로 도산을 자초했다는 자살론과 당시 정부의 해체 사나리오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타살론은 접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자살도 타살도 아닌 ‘병사론(病死論)’으로 일축한 이도 있었다. 대우사태 처리를 진두 지휘했던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의 견해다. 최근에는 타살에 무게를 실은 ‘구타사론’이 등장했다. 당시 대우경제연구소장으로 대우그룹 해체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의 주장이다.

 
이처럼 대우 패망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스펙트럼은 폭넓다. 6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대우 해체를 둘러싼 실체적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우 사태 규명 작업은 이제 종착지로 줄달음칠 수밖에 없다. 대우그룹 총수이자 모든 경영 판단을 혼자 했다는 김우중씨가 드디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해외로 잠적한 지 5년8개월 만에 김씨는 6월15일 전후, 이르면 14일 인천공항에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대우 사인(死因)처럼 김씨의 귀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극단을 달린다. 대체로 옛 대우 사람들은 그의 귀국을 반기고 있다. 대우 출신 인사들의  친목 사이트인 ‘하이 대우’나 ‘대우러브’에 실린 ‘회장님이 오신다’ ‘주군을 환영하자’는 글이 그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좋은 예다. 반면 한국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가했으며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장본인이자 범법자의 귀환을 환영하며 선처 어쩌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도 한국 사회 한켠에는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두 진영은 모두 김우중과 대우의 공과(功過)를 이제는 제대로 따져보자고 주장하지만, 방점은 다르다. 너무 과만 보지 말고 공도 두루 헤아려야 한다는 견해와, 공이 있다 해도 과가 훨씬 크며 공이 과를 덮을 수도 없다는 주장이 화해할 줄 모르고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김우중 들여다보기’ 두 갈래 흐름

그가 귀국하면 한국 사회의 ‘김우중 들여다보기’는 크게 두 갈래 흐름으로 격렬하게 나타날 것이다. 하나는 그에 대한 일련의 사법적 처리 과정과, 다른 하나는 이미 불거지고 있는 재평가 논란이다. 김씨는 검찰이 귀국 즉시 구속 수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므로 영어의 몸이 될 것이 확실하다. 수사받는 과정에서 건강이 더욱 악화하면 모를까, 처음부터 병원으로 직행하는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이다.

 
김씨의 공보 대리인인 백기승 전 대우그룹 홍보이사도 “사법적 과정을 모두 밟을 것이며 다른 대접을 해달라는 요청이 받아들여질 상황도 아니고, 그럴 의사도 전혀 없다”라고 말했다. 간단한 귀국의 변 정도가 있을 뿐 일부에서 제기되는 대대적인 환영회와 성명서 발표, 5백만 서명운동 등도 확대 와전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또 아주대병원이 특실을 리모델링했다거나 그가 힐튼호텔 집무실을 사용할 것이라는 주장도 낭설이라고 일축한다.

김씨측이 이렇게 입장을 정리한 것은 4월29일 대법원 확정 판결 때문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하급심과 같이 (주)대우와 대우중공업의 분식회계 형사 재판 최종심에서 ‘김우중의 지시를 받은’ 이라는 판결문으로 김씨의 주도적 역할을 인정했다. 김씨의 유죄가 입증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다. 김씨측은 분식 규모(41조원)가 크게 부풀려졌다고 주장하지만, 분식 자체는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지시를 받은 대우 임원들에게도 실형이 선고되었는데, 책임 범위가 큰, 이른바 주범인 김씨에 대해 선처 주장을 하는 것은 공정한 법집행을 왜곡하는 일이라고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가 크게 반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진행된 것은 형사 재판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를 기다리는 민사 소송도 있다. 이미 40여 건의 손해배상 소송이 제기되었고 청구 금액이 6천억원이나 된다. 그가 귀국하면 민사 소송 제기도 봇물처럼 터질 공산이 크다. 그동안 배상 책임을 진 사람의 부재로 소송이 제기되지 않거나 제기된 소송도 진행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사 처벌 부분은 정치적 사면이라도 기대할 수 있지만, 민사는 다르다. 사면도 없다.

 법정 밖에서의 다툼은 그에 대한 공과와 이에 따른 재평가 부분일 것이다. 김씨에 대한 평가가 일방적이라며 그의 공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단의 사람들은 그의 ‘기업가 정신’을 계승·발전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김씨의 시도가 비록 좌절되었지만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글로벌 경영에 앞장선 그의 도전 정신과 진취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라는 것이 재계에 그리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인 1980년대 중반부터 그는 세계 시장 공략에 적극 나섰다.
 
 
해체 직전인 1999년 대우의 세계 네트워크는 5백89개에 달했다. 1967년 그가 31세때 자본금 5백만원으로 시작한 회사(대우실업)를 32년 만에 매출 62조원, 자산 순위로 재계 2위, 세계 500대 기업으로 성장시켰으니 가히 신화로 기록될 만했다. 당시 재계에서 대우를 배우자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도 같은 견해를 보였다는 증언이 나온다.

하지만 세계 경영 전략에서 보여준 기업가로서의 면모를 고스란히 인정한다 해도, 바로  김씨의 이 ‘공로’가 ‘과오’로 돌변한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역설적 성격을 띤다. 그가 주창했던 세계 경영이 그와 대우를 옥죄는 부메랑이 되었고 한국 경제에 큰 짐을 지웠기 때문이다.

김씨의 세계 경영 전략은 제품 전략과 마케팅 전략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의 대우 제품 전략은 ‘하이테크’가 아니라 ‘미들테크’였다. 중급 기술로 중·저가 제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단순 기능을 강조하는 이 전략은 세탁기(탱크) 같은 가전뿐 아니라 자동차에도 적용되었다. 중급 기술로 승부하려니 그가 노릴 시장은 당연히 선진국이 아니라 후진국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옛 소련이나 동유럽권, 중국, 인도, 아프리카 등을 분주히 다닌 것도 이런 마케팅 전략 때문이었다.

사실 이 부분은 김씨 아닌 제3자가 왈가왈부할 영역은 아니다. 최고경영자의 고유 경영 판단에 속한다. 하지만 제품과 마케팅 전략을 실행하기 위해 기업 조직을 어떻게 운영했는가는 외부인이 평가할 수 있다. 김씨는 가는 곳마다 현지에서 자금을 조달해 공장을 짓고 판매법인을 세웠다. 그 확장 속도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빨랐다.

투자 자금의 일부 혹은 전부를 차입하는 것이야 투자 전략의 하나이지만 문제는 위험 천만한 ‘김우중 방식’이다. 상환 자금을 또 투자를 통해 조달했기 때문이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김상조 소장(한성대 교수)이 대우를 ‘자전거 기업·강시 기업’이라고 비유한 것도 이런 운영 방식에서 기인한다. 두발 자전거였던 대우는 페달을 밟지 않는 순간, 자금줄이 끊기는 순간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또 이익을 내 기업이 성장하는 구조가 아니라 아랫돌 빼어 윗돌 괴는 식으로 끊임없이 자금을 융통해 연명하는 사실상 이미 숨이 끊긴 기업이었다는 것이다. 김씨가 투자의 60%를 쏟아부은 자동차의 경우 폴란드 FSO 공장이 60% 가동률을 보였을 뿐 다른 나라 공장들은 10~20%의 가동률을 기록했다는 것이 좋은 예다. 심지어 우크라이나 공장은 자동차를 생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세웠다는 것이 재계의 정설이다.
 
 
그러니 1997년 10월 한국에 엄습한 외환위기는 이런 자금 조달과 수익성 구조를 가진 대우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외환위기는 대우만이 아니라 한국 기업들에 공통적인 환경이었지만 유독 대우는 헤어나오지 못했다. 이것은 외부 충격에 극도로 취약한 체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 지적할 수밖에 없는 그의 패착은 살아 남기 위해 심지어 돈되는 것까지 팔아 재무 건전성 제고에 골몰했던 다른 기업과 달리 구조 조정을 게을리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재경부장관으로서 이헌재 위원장과 함께 대우 처리를 책임졌던 강봉균 열린우리당 의원은 “대우라는 브랜드를 세계에 널리 알린 공이 크지만, 구조 조정이라는 시대적 요청을 거슬러 확장 전략을 계속했던 것이 그의 과오라면 과오였다”라고 평가한다.

구조 조정만 소홀했던 것이 아니라 김씨는 또 다른 역선택을 했다.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로 베팅을 한 것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의 독대라는 정치적 처신으로 무역 금융을 받으려 시도했고,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를 빅딜해 단번에 어른거리던 유동성 위기를 잠재우려 했다. 또 끝까지 미국 GM으로부터의 50억달러 외자 유치에 목을 맸다. 대우의 자금 사정을 세상이 다 알게 된 상황에서 그의 시도는 성공할 수 없었다.

1998년 김씨가 통 크게도  ‘거꾸로’ 돌파 전략을 강행하는 사이 대우는 급속히 유동성 위기로 빨려들어갔다. 1998년 한 해 동안 대우가 CP(기업어음)와 회사채를 18조원어치나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는 무리수를 둔 것도 국내외에서 상환 압력이 갈수록 가속화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1998년 CP와 회사채 발행 제한 조처, 대우측이 ‘음모’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면 대우의 자금 조달 물량은 더 늘었을 것이다. 

 통 크게 ‘거꾸로’ 돌파 전략 강행

1998년부터 대우는 해외에서 자금 조달 길이 막히자 국내에서 자금을 융통할 수밖에 없었다.  또 수출 대금을 국내에 들여오지 않았다. 이 돈들을 (주)대우 런던법인의 금융계좌를 통칭하는 BFC에 한데 모아 해외 빚을 상환했다.  1999년 이자 비용에만 35%를 썼으니 당시 대우가 얼마나 자금난이 심각했는지를 웅변한다.  바로 이 대목은 김씨에게 씌워진 '해외 도피' 혐의와도 직결된다. 김씨측은 실정법(외환관리법)을 위반하기는 했지만., 해외 자금 도피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앞으로 법적 공방이 치열할 부분이다.

1998년 10월29일 결정적으로 대우의 숨통을 틀어막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다’라는 제목의 노무라 보고서였다. 이것은 어쩌면 대우에 빌려준 돈을 돌려받고 싶은 국내 금융기관들에게 좋은 핑계거리이기도 헸다. 악재는 어깨동무를 하고 온다고, 노무라 보고서가 나온 지 보름 가량 지난 뒤 또 다른 악재가 터졌다. 김씨가 뇌혈종(만성경막하혈종) 수술을 받은 것이다. 김씨의 입원은 국제 금융 시장의 의구심을 증폭시키에 충분했다.

그래도 1998년은 그럭저럭 지나가는 듯했다. 대우가 위험하다는 적신호가 커져 있었지만 투자신탁회사 등 제2 금융권은 대우 CP 회사채를 사주었다. 수익률이 짭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8년 말부터 대우의 유동성 위기설은 걷잡을 수없이 번졌다. 둑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삼성 금융 계열사들이 먼저 움직였지만, 그 즈음에는 누구라 할 것 없이 경쟁적으로 자금을 회수했다.

김씨뿐 아니라 금융 당국도 사색이 되었다. 금감원은 1999년 2월부터 대우 여신 일일점검 체제를 가동하는 등 거함 대우호의 침몰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사실상 부도 상태였다. 하지만 대책 없이 부도를 낼 수도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대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면 왜 1999년 7월까지 적어도 6개월 이상 끌었느냐는 민간의 비판에 대한 정부의 답변이기도 하다.

마침내 1999년 7월19일 김씨는 백기 투항했다. '대우그룹 구조조정 가속화 및 구체적 실천 방안'이라는 긴 이름의 유동성 위기 방안이 발표된 것이다. 그가 계열사 주식과 부동산, 개인 재산을  포함한 10조1천3백억원을 채권단에  담보로 제공하고 얻은 것은 4조원의 긴급 자금과 초단기 CP 6조원 어치의 만기 연장이었다.  4조원은 언 발에 오줌누기였다. 대우는 숨이 멎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살아있는 것도 아닌 가사 상태였다.

결국 대우는 그 해 8월26일 워크아웃으로 그룹이 해체되는 운명을 맞았다. 12개 계열사가 통째로 워크아웃에 처해지는 구조 조정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부실 규모도 세계 최대였다. 2002년 미국은 물론 세계 금융 시장을 강타한 엔론보다도 컸다. 당시 이헌재 위원장이 100조원(금융 계열사 포함)이나 빚이 있는 회사가 어떻게 망하지 않겠느냐며, 자살도 타살도 아닌 병사라고 말한 것도 여기서 연유한다.

김씨가 돌아와 본격 제기할지는 불분명하지만, 지금도 옛 대우 인사 가운데는 타살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 워크아웃 직후부터 정부 관계자들이 김씨와 대우의 마지막 카드였던 담보를 구조 조정이 미흡하면 처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심지어 김씨가 '대주주로서의 권한을 잃었다'고 공개 언급한 것은 정부의 일련의 해체 시나리오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김씨가 울분을 토로했던 것도 바로 이 대목이라는 대우 관계자의 증언도 있다.

김대중 정부 관료들과의 불화

그러나 대우측 주장대로 정부가 대우를 죽이려고 했을까. 겁이 나서도 살리고 싶었는데 정부도 손을 쓸 수 없었는 지경이었다는 한 정부 관계자의 말은 또 얼마나 사실일까. 김대중 정부 관료들과 그가 불화했던 것은 꽤 알려진 얘기다. 김씨는 그들을 ‘책상물림’이라고 비난했고 관료들은 또 그를 ‘사기꾼’ 비슷하게 취급했다. 둘의 갈등을 합리적 인간(관료)과 합목적적 인간(기업인)의 대립으로 비유하는 이도 있다.

재평가와 사법 처리 과정에서 대우의 사인이 어떻게 나오든 김씨에 대한 평가가 결코 호의적일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가 한국 경제에 천문학적 해악을 끼쳤기 때문이다. 2001년 8월에 나온 공적자금 백서에 따르면, 대우 부실로 금융기관에 투입된 공적자금은 27조9천억원에 달했다. 그 이후로도 대우 부실을 털어내기 위해 공적자금을 추가했는데, 이것을 합하면 36조원에 이른다는 추정도 있다. 그렇다면 공적자금 총 1백64조5천억원 가운데 21.9%가 대우 때문에 비롯한 것이다.

김씨는 (주)대우의 런던법인 금융 계좌였던 BFC 사안에 대해서도 해명할 것이 남아 있다. 금감원 대우그룹  분식회계조사 특별반에 따르면,  1999년 현재 조성된 자금 총 76억9천만 달러 가운데 10%가까운  7억5천만 달러(당시 환율로 8천6백억원)의 사용 내역이 밝혀지지 않았다. 증빙 자료가 없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 돈의 용도를 김씨가 대우 해체를 막으려고 정·관계에 로비 하는 데 쓴 것으로 보고 있다. 또 2001년 공정거래위원회에 의해 6개 사가 위장 계열사 혐의를 받았는데, 이 부분도 그는 밝혀야 한다. 위장 계열사에 재산을 은닉했다는 시각이 있기 때문이다.

곽수일 교수(서울대·경영학)는 김씨를 ‘가장 위대한 상인’이라며 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정상참작론을 펼쳤다. 강신호 전경련 회장도 경제인으로서 그의 공이 크며 고령에다 건강도 좋지 않다는 점을 들어 동정론을 제기했다. 1999년 5월 정부에 대우 처리가 시급하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던 이동걸 당시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현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기업인으로서 그의 공을 인정한다해도 그의 유용성은 1970년대, 길게 잡아도 1980년대 말에 수명을 다했다고 평가했다. 김씨는 시장만 글로벌로 잡았지 개발연대 멘탈리티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과오와 책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가 1999년 11월1일 회징직을 퇴진하면서 대우그룹 직원들에게 보낸 고별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구조 조정의 긴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빚어진 경영 자원 동원과 배분에 대한 주의 소홀, 용인되지 않는 방식으로 접근하려 했던 위기 관리 등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초래된 경영상의 판단 오류는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한국 경제의 근대화 모델을 세우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업인, 천부적인 상재(商材)와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 죽어라 일만 했던 그가 귀국 후 만날 현실은 가혹할 수도 있다. 운명을 예감했던 것일까. 그의 첫 직장 상사였던 한성실업 김용순 회장이 1986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부하 직원인 그를 평가한 내용이 흥미롭다. “우중이가 크게 되면 말할 수 없이 크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감옥소 갈 놈이야.”

1967~1999 대우설립부터 해체까지

1967년 3월22일 대우실업 설립(자본금 5백만원) 창업 원년 수출실적 5천7백만 달러 기록
1969년 8월24일 국내 기업 해외 지사 1호 호주 시드니에 개설
1973년 대우건설 설립
1974년 1월22일 대우전자 설립
1974년 11월30일 수출의 날 1억달러 수출의 탑 수상
1977년 6월11일 대우센터 완공
1978년 최초의 플랜트 수출 수주(수단 타이어공장)
1978년 7월25일 새한자동차 인수, 자동차사업 진출
1978년 9월26일 대우조선 설립
1981년 10월17일 옥포조선소 준공
1982년 1월1일 주식회사 대우(종합상사+건설) 출범, 제2의 창사 선언
1988년 11월 헝가리 등 동유럽권 진출 본격화
1988년 11월 북아일랜드 VTR 공장 설립
1989년 07월 잠비아, 에티오피아, 미얀마 봉제공장 설립 계약
1990년 7월 미얀마 가전공장 설립
1990년 12월 멕시코 컬러TV 공장 설립
1992년 미국 GM과 합작관계 청산
1993년 3월22일 세계 경영 선언
1993년 5월 우즈베키스탄 가전공장 설립
1993년 8월 폴란드 TV 공장 설립
1994년 11월 루마니아 자동차합작공장 설립
1995년 5월 국내 기업 최초, 대북 협력사업 정부 승인 획득
1995년 11월24일 폴란드 FSO 자동차공장 인수
1996년 3월12일 루마니아 로대공장 준공
1996년 5월17일 남북경협 최초 회사인 민족산업총회사 남포에 설립
1996년 6월 프랑스 롱위 컬러 브라운관 공장 준공
1996년 6월 인도 뉴델리 첨단 소프트웨어 연구개발센터 설립
1996년 10월31일 우즈베키스탄 자동차/베트남 비담코 자동차 공장 준공
1996년 11월 무역의 날 100억 달러 수출의 탑 및 금탑산업훈장 수상
1997년 4월 인도 종합가전공장 설립
1997년 4월21일 군산 종합자동차공장 준공
1998년 1월9일 쌍용자동차 인수
1998년 12월 대우전자-삼성차 빅딜 발표
1999년 7월19일 대우그룹 유동성 위기 극복 방안 발표
1999년 8월26일 (주)대우 등 12개 계열사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결정
1999년 10월17일 김우중 회장, 중국 옌타이 대우차 엔진공장 참석 뒤 잠적
1999년 11월1일 김우중 회장 퇴진 선언
1999년 11월14일 금융감독원, 대우계열사 실사결과 발표(자본 잠식 26조원)
2000년 1월22일 국외 채권단과 채권처리 원칙 합의
2002년 12월 김회장, 도올 김용옥과 베트남에서 인터뷰
2005년 3월7일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 김회장 ‘서울 입국설’ 보도 소동(검찰, 오보로 결론)
2005년 4월29일 대법원, 대우 분식회계 23조원 추징 및 계열사 임원 7명 유죄 확정 판결(김우중씨 공범 인정)
2005년 6월15~17일 김우중씨 귀국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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