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놀음에 묻힌 패션 현대사
  • 윤석진 (드라마평론가, 충남대 국문과 교수) ()
  • 승인 2005.08.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드라마 <패션 70s>/짜임새 부실한 채 용두사미

 
혹시,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키스로 이별해야만 했던 대치(최재성 분)와 여옥(채시라 분)의 <여명의 눈동자>(송지나 극본, 김종학 연출)를 아직 기억하는가? 아니면 시국 사범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어 정동진역의 소나무 아래에서 초조하게 기차를 기다리다가 결국 경찰에게 잡힌 혜린(고현정 분)과 그녀를 사랑한 태수(최민수 분)와 우석(박상원 분)의 비극적인 운명이 담긴 <모래시계>(송지나 극본, 김종학 연출)를 기억하는가?

말 그대로 ‘격동(激動)’의 근·현대사가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면서 1990년대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여명의 눈동자>와 <모래시계>는 ‘일상의 예술 양식’인 ‘드라마’에 ‘시대 상황’이 접목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전형(典型)을 구축한 드라마로 평가받고 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가 드라마에서 재현되는 순간, 그것은 다시 현재화하면서 시청자들이 처해 있는 ‘지금 현재 상황’을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지나간 모든 것이 ‘추억’으로 포장되면서 낭만성을 획득하듯이, 드라마에서 재현되는 과거는 시청자의 향수를 자극하면서 시선을 사로잡는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다룬 드라마가 끊임없이 제작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다룬 모든 드라마가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드라마에서 재현되고 있는 과거를 마치 어제 일어났던 일처럼 느끼게 만드는 힘이 있어야만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다. 그리하여 시청자로 하여금 “그래, 저런 시절이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이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때 ‘시대를 다룬 드라마의 사회적 영향력’이 유감 없이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성공한 드라마는 시대에 대한 재해석 이끌어

<여명의 눈동자>가 일제시대 징병과 징용 그리고 정신대 문제를 사회적으로 환기하고, <모래시계>가 시청자로 하여금 1970~1980년대 암울했던 정치·경제 상황을 직시하도록 만든 것은 작가가 말하고 싶은 주제를 웅변조로 강조하기보다 등장 인물들이 처한 극적 상황에 녹여 은유적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짜인 극적 구성’과 ‘살아 있는 등장 인물’은 드라마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절대 조건이며,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청춘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이라는 너무도 뻔한 이야기를 매번 새롭게 느끼게 만드는 힘이기도 한 것이다.

최근 월화 드라마의 강자로 군림했던 <패션 70s>(정성희 극본, 이재규 연출) 역시 ‘입지전적으로 성공할 기회가 살아 있는 가능성의 시대를 불꽃처럼 살다간 네 젊은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표방하며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배경으로 풀어간 시대극이었다.

 
광복 60주년을 맞아 특별하게 기획된 드라마답게 <패션 70s>의 초반부는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 정도로 스펙터클하게 연출한 한국전쟁 장면과 아역 연기자들의 앙증맞은 연기로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는 듯했다. 그리고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운명이 엇갈린 패션 디자이너 지망생 한더미(고준희/이요원 분)와 고준희(한강희/김민정 분), 그리고 한더미를 동시에 사랑한 두 남자 김동영(주진모 분)과 장 빈(천정명 분)을 중심으로 1960~1970년대의 정치·경제·사회 문제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더미와 고준희가 패션 디자이너로 성공하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어야 할 엇갈린 운명이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그냥 지나가면서, 그리고 한더미와 고준희의 엇갈린 운명이 서서히 밝혀져도 한더미를 사랑하는 김동영과 장 빈의 정보요원으로서의 임무 수행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시청자의 시선은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긴밀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극적 상황들을 단순 편집한 듯한 사건 전개 방식에서 극적 긴장감을 느끼기는 어렵다.

용두사미가 되고 만 <패션70s>

이처럼 <패션 70s>은 고준희에 의해 일방적으로 희생되면서도 패션 디자이너로서 욕망을 실현해 가는 한더미의 성장 과정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악역을 떠맡아야 했던 고준희의 어쩔 수 없었던 인생 역정 사이에서 중심을 잃고 흔들림으로써 드라마의 완성도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리고 끝내 패션 산업, 1970년대의 정치외교 상황, 청춘 남녀의 사랑 중 어느 하나도 시청자에게 제대로 각인하지 못한 채 용두사미가 되고 말았다.

 결국 우리 나라의 정치 외교와 패션의 흐름, 패션 철학, 역사 철학, 시대의 센세이셔널을 창조하는 주인공들의 활약을 역동적이고 화려하게 그려가겠다는 의도는 패션계의 대모 장봉실의 입에서만 맴돌고 시대극으로서의 장점을 살리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애초 의도와 달리 <패션 70s>이 이렇게 용두사미가 된 것은, 남녀 주인공 네 사람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개별화했기 때문이다. 등장 인물의 관계 설정에 문제가 있다 보니 극적 구조는 당연히 개연성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한마디로 파괴의 한국전쟁과 재건의 산업화, 여성적인 패션과 남성적인 정치외교 등의 매력적인 ‘근대화 산물’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필요에 따라 돌발적으로 ‘이용’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지나간 모든 것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포장된다는 현실의 명제가 드라마에서도 통용되려면, ‘짜임새 있는 극적 구성’과 ‘살아 있는 등장 인물’이 절대 조건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패션 70s>를 보면서 <여명의 눈동자>와 <모래시계>가 자꾸 떠올랐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