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냐, 한국전쟁이냐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5.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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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학계, 역사 용어 ‘바로 세우기’ 논의 활발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최근 거리에 선 야당 대표가 외쳤다. 신문과 방송, 심지어 학자들의 칼럼에서까지 ‘자유민주주의’를 걱정하는 말이 넘친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정치학 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외국의 용례도 발견하기 어렵다. 역대 대한민국 헌법을 살펴보아도 없다. 다만 유신헌법과 1987년 개정 헌법에 ‘자유민주’라는 단어가 한 차례씩 등장할 뿐. 그렇다면 이 족보 없는 ‘토종 조어’는 어떻게 출현했을까.

1950년대 말부터 반공·반북과 함께 간간이 쓰이던 이 말이 본격적으로 쓰인 때는 1963년이다. 당시 야당 인사들은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에 맞서고 그의 좌익 성향을 공격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다. 이후 한동안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에는 반공과 반독재라는 의미가 혼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념의 시대가 지나가면서 이 조어는 본래의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야당 대표가 자기 부친이 공격당하던 조어를 무기 삼아 색깔 공세를 펼치는 모습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역사에는 이런 아이러니가 많다. 특히 근·현대로 올수록 그렇다. 처음 등장할 때와 다르게 쓰인 역사 용어도 있고, 해당 사건의 의미를 함축하지 못하는 역사 용어도 있다. 역사가의 주관적인 역사관이 역사 용어에 무의식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경우도 많다.

 
국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역사 용어를 재정립하자는 논의가 조용히 진행 중이다. 최근 간행된 계간 <역사비평> 겨울호는 책이나 방송 프로그램에서 흔히 마주치는 근·현대 역사용어 21개의 적절성을 분석한 특집을 실었다. 필진에는 이이화·서중석·주진오·왕현종 교수 등 소장·중견 학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역사비평> 편집회의가 열린 지난 여름 어느 날, 박태균 교수(서울대)가 자기 저서인 <한국전쟁> 신간을 한아름 안고 와 편집위원들에게 돌렸다. 이어진 티 테이블에서 ‘한국전쟁’이라는 용어가 화제에 올랐다. 일반인이 주로 쓰는 명칭은 6·25. 학자에 따라서는 남북전쟁이나 3년전쟁으로 부르는 이도 있다. 미국은 한국전쟁이라고 하지만, 북한이나 중국에서는 다르게 불린다. 바람직한 용어는 무엇일까. 티 테이블 논의는 갈수록 진지해졌다. 마침내 근·현대사 용어를 되짚어보자는 데에까지 나아갔다. 그 1차 결과물이 이번 <역사비평> 특집이다. 

을사조약이냐, 을사늑약이냐

이상찬 교수(서울대)는 을사조약을 시비 대상으로 삼았다. 우리는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은 조약을 을사조약이라고 부른다. 최근 사학계에서는 을사늑약으로 부르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한일신협약, 혹은 2차 한일협약으로 부른다.

 
이교수는 우선 조약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조약은 주권자(고종)의 비준을 거쳐야 성립하는데, 1905년 조약안은 고종의 비준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일본처럼 양국 주무 대신의 합의와 서명만 있으면 되는 협약으로 불러야 할까. 이교수에 따르면 이것도 정답이 아니다. 외교권 위탁은 외교 관례상 조약을 통해야 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고종은 이 조약안을 추인하기를 거부한 끝에 1907년 강제 퇴위 당했다. 이교수의 결론은 이렇다. “조약안은 위임이나 비준 과정을 하나도 거치지 않은, 즉 체결되지 않는 ‘안’에 불과했다. 따라서 을사조약이나 을사늑약이 아니라 ‘한·일 외교권 위탁 조약안’으로 불러야 맞다.”

배성준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은 최근 민감한 정치 사안으로까지 떠오른 간도 문제를 테이블에 올렸다. 간도 되찾기 운동을 벌이는 이들은 일본이 청나라에 간도를 양보했다면서 1909년 청·일 간의 간도협약은 무효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역사 문헌에 나타나는 간도 용어의 쓰임새를 살펴보면 이들의 인식에 구멍이 있다는 점이 금방 드러난다.

“이견·논란 많은 60여 가지 용어부터 분석”

1880년대 고종에게 올린 장계에 처음 등장하는 간도라는 용어는 두만강 너머의 조선인 개간지를 뜻했다. 간도의 영역을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남만주 일대로 확대한 것은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를 넘어 만주까지 넘보던 일본이었다. 당시에 간도가 조선 영토임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나선 곳이 조선통감부와 일진회였다. 반면 중국은 간도라는 명칭에 거부감이 커서, 간도협약의 중국측 명칭은 ‘도문강중한계무조관’이다. 따라서 간도 되찾기를 주장하는 이들의 간도 인식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간도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는 꼴이다. 배성준 연구위원은 “간도라는 용어 자체를 폐기할 필요는 없겠지만, 역사적 배경은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왜정 시대’ ‘식민지 시대’ ‘일제 강점기’··· 1910년 8월29일부터 1945년 8월15일까지의 한반도 역사를 가리키는 용어는 다양하다. 어떻게 쓰는 것이 맞을까. 이에 대해서는 김정인 교수(춘천교육대)가 정리했다.

이 시대를 가리킨 첫 용어는 ‘일제침략시대’(이병도)였다. 4·19 이후 민족주의 분위기에서 ‘일제 강점기’라는 용어가 잠시 사용되었고, 1970년대에는 역사학자 홍이섭이 제기한 ‘일제 식민지 시대’가 주로 쓰였다. 1980년대 이후 사회 성격 논쟁이 있은 후 진보 성향 학자들은 그냥 ‘식민지 시대’라고 썼다. 동시에 인문·사회 과학은 물론 예술 분야에서까지 근대사 연구 붐이 퍼지면서 ‘일제 시대’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최근 한국사 체계를 고려할 때 ‘시대’라는 용어는 부적절하며 그냥 ‘기’로 써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다. ‘일제 강점기’(신용하)가 요즘 국사학계에서 친숙한 용어다. 북한은 ‘일제의 조선 강점’이라고 표기한다. 하지만 탈민족주의나 열린민족주의 성향 학자들은 이런 용어에 거부감이 크다. 이들은 근대 동아시아 역사는 일본제국주의사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냥 ‘일제시대’로 쓴다. 필자인 김정인 교수는 딱히 무엇이 낫다고 말하지 못한다. 김교수의 ‘애매’한 결론은 이렇다. “역사 용어 선정에는 학자의 역사적 안목이 그대로 투영된다. 민족 국가로서의 주체성을 상실한 시기를 보는 시각은 여러 갈래일 수 있고, 합일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역사비평> 겨울호에는 이밖에도 개화파, 광무개혁, 친일, 독립운동, 민족자본, 좌우합작, 찬탁·반탁 운동, 노획 문서, 휴전과 정전 같은 역사 용어에 대한 분석이 실렸다. <역사비평>은 내년 봄호와 여름호에서도 같은 특집을 이어갈 예정이다. <역사비평> 임대식 편집주간은 “잘못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용어뿐 아니라 비주체적이거나 냉전적 관점의 용어, 이견과 논란이 많은 것 등 모두 60여가지 용어를 일단 추출했다”라고 말했다.

그럼 특집의 발단이 되었던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었을까. 기대하시라. 박태균 교수 못지않게 이 방면 연구의 실력자로 통하는 박명림 교수(연세대)가 <역사비평> 봄호에서 자신의 의견을 밝힐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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