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판화 40년 정리 “이젠 1천년 전통 잇자”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3.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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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그림마당 민, 기획 전시회 열어

최근 서울 화랑가에 샐러리맨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미술시장 경기가 좋았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술품=고가품’이라는 인식 때문에 화랑에 얼씬조차 하지 않던 사람들이 3년째 극심한 불황인 미술시장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중⋅저가품을 찾는다. 중⋅저가품 중에서도 비교적 값이 싼 판화를 선호한다.

 판화는 회화 장르(일품 예술)와는 달리 수십⋅수백장의 원화를 찍어낼 수 있는 복수예술이다. 이 때문에 판화는 일품 예술보다 그림값이 훨씬 싸 대중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장르로 꼽힌다. 대중이 선호하는 현대 판화가 이 땅에 들어온 지 40여 년이 흘러 국제적 수준과 어깨를 겨룰 만한 역량을 쌓았고, 한편으로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유구한 판화 전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우리 미술계에서 판화는 회화⋅조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천대를 받아왔다. 지난 40년은 ‘판화는 곧 인쇄’라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데 보낸 시기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굴절된 한국 현대 판화사에 이정표 세워
 6월에 열리는 대규모 판화 전시회들은 굴절된 한국 현대 판화사에 이정표를 세우는 값진 전시횔 평가된다. 7월1일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02-503-9675)에서 열리는 <한국 현대판화 40년전>과 서울 인사동 그림마당 민(02-734-9662)이 기획한 <그림마당 민 개관 7주년 기념 판화전>(6월22일∼7월1일)은 지난 시대의 성과를 점검하고 미래를 전망한다는 면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50년대 이후 전개된 한국 현대판화의 역사적 궤적을 고찰함으로써 한국 판화의 전통성이 현대성에 어떻게 접목되었는지를 살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이 전시회의 의의가 있다.”<한국 현대판화 40년전>을 기획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崔銀珠씨는 이번 전시회를 이렇게 자리매김하면서 “한국 판화사를 바르게 정립하려는 시도이다‘라고 말했다. 51년 이항성시가 다색 석판화 개인전을 가진 이후 크고 작은 판화전이 수백 차례 열렸지만 판화를 자료사적 입장에서 정리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전시회는 5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10년 단위의 4개 범주로 나뉘어져 있다. 3백여 명 정도로 추산되는 판화가 가운데 97명이 선정되어 1백47점을 출품했다. 50년대 한국에 현대판화를 소개한 정 규 최영림 박수근 씨들로부터 93년 작품을 출품한 김연규씨에 이르기까지 지난 40년간 축적된 역량들이 한곳에 총집결한 것이다.

 판화는 회화 작가들이 조형의식을 표현하는 좋은 매체로 꼽힌다. 세게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유명 화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판화작업을 동시에 했다. 17세기 중반 에칭⋅동판화 기법으로 독창적 판화 세계를 이룩한 렘브란트를 비롯해 19세기의 고야⋅로트레크⋅고갱, 20세기의 피카소⋅샤갈 등 거장들은 판화사에 위대한 유산을 남긴 작가로 기록되어 있다. 피카소가 대중에게 명성을 얻게된 것도 세계평화회의라는 국제적 기구에서 2차대전 후에 만든 그의 석판화 5백만장을 배표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한국의 판화가들도 거의 회화를 ‘주종목’으로 하는 작가들이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한 작가 황용진 교수(서울산업대⋅응용회화)는 지난 40년 동안 판화가 대중에게 쉽게 다가 갈 수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본다. “판을 너무 적게 찍어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던 점도 있지만,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구상 판화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60∼70년대 현대 미술을 이끌던 작가들이 대부분 추상쪽 이었고 그 호풍이 제자들에게 이어졌기 때문에 대중과 동떨어져 있었다.” 그는 이번 전시회의 의미가 지금까지 중구난방식으로 되어 있던 한국 판화의 흐름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데 있다고 말한다.

 전통 고판화 전시장을 따로 마련해 불경행실도 문자도 민화 등 우리 고판화를 함께 소개하는 이번 전시회는 전시 전문 기획자인 큐레이터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처음으로 전문성을 발휘해 기획했다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학예연구사 최은주씨가 지난 89년부터 연구해온 성과가 이번 전시회를 통해 나타난 것이다. 큐레이터의 전문성이 국립현대미술관 전시기획에서 발휘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큐레이터의 역할이 아직 미미한 우리 실정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나타난 한국 현대판화의 시대별 특징을 보면 △50년대에는 판화의 종류나 기법이 다양하지 못해 전통 기법인 목판이 주류를 이루고 △60년대에는 젊은 작가들이 판화를 새로운 표현 매체로 받아들였으며 △70년대에는 목판 실크스크린 석판 동판 등 여러 판법이 도입되어 판화 예술의 다양화가 이루어졌고 △80년대에는 한국의 전통 목판화 기법을 응용한 민중미술이 등장하고 판화공방의 활성화(86쪽 상자 기사 참조)가 이루어졌다. <한국 현대판화 40년전>에서 아쉬운 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80년대에 등장해 널리 소통되던 민중미술 작품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민중판화 운동 주도 작가 15명 초대
 그림마당 민의 <개관 7주년 기념 판화전>은 <한국 현대판화 40년전>에서 갖는 이런 아쉬움을 채워주는, 80년대 민중 판화운동을 주도해온 작가 15명을 초대하는 자리이다. 김준권 남궁산 박경훈 이철수 이억배 정원철 등 전업 판화작가 15명이 대표작 한점과 신작 두 점을 전시해 지난 80년대의 성과와 90년대의 전망을 동시에 점검하는 전시회인 것이다.
 80년대 민중판화 운동은 전문가 집단과 일반 시민 집단으로 이원화해 널리 소통되는 경향을 보였다. 83년 민중판화라 홍성담씨가 주도해 광주에 시민미술학교가 개설되어 일반 시민들이 목판을 파기 시작하면서 판화 문화가 전국으로 확산하는 경향을 모였고, 이와는 별도로 86년 작고한 오 윤씨를 비롯한 전문 판화가들이 전통 민화 양식을 목판화에 도입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여왔다.

 60년대 한국 판화 운동을 주도한 작가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尹明老 교수(서울대⋅서양화)는 “최근 중산층이 두터워지면서 판화 보급 전망이 매우 밝아졌다. 지난 40년을 되돌아보는 전시회가 판화에 대한 인식 확산과 전통 판화를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려시대 이후 판각 전통이 뚜렷한 흐름을 가지고 있는데도 정리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작품들이 계속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재료의 국산호 등 해결해야 할 문제점도 많지만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단절된 판화 전통을 정리하는 작업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판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현대사를 정리하는 기획전이 열리는 때에 윤교수가 제안하는 또 다른 과제이다.
成宇濟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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