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가능성 대중 속에”
  • 여운연 차장 ()
  • 승인 1991.03.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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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연대회의’ 고문 張壹淳

30년만에 실시되는 지방자치제 선거를 앞두고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가 출범했다. 정치인의 타락과 사회 곳곳의 부정부패를 막으려면 시민 각자가 제 몫을 바로 해야 한다면 뜻있는 시민들이 뭉친 것이다.

지난 3월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시민연대회의 발기인 모임에 고문 자격으로 참가한 張壹淳씨. 그는 이날 든 시민연대회의만큼이나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1926년 강원도 원주 태생으로 서울대 미학과 1회 졸업생. 60평생에 이렇다 할 경력이 없는 그이지만 사회 저변의 알만한 이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김지하, 김민기 등 이른바 70년대 운동권의 정신적 메카가 원주였다면, 바로 그 ‘원주그룹’의 핵이 장씨였다. 그는 70년대말부터 정치투쟁이 아닌 생활운동을 통해 사회운동을 이끌어왔고 생명운동단체인 ‘한살림운동’을 태동시킨 장본인이다.

장씨는 시인 김지하의 정신적 스승으로 김씨의 생명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신분과 계층을 떠나 많은 이들의 ‘사상적 선배’로 통하고 있다. 좀처럼 나서지 않는 그가 시민연대회의 발기인 모임에서는 ‘오늘의 정치ㆍ사회현실과 시민운동’을 주제로 강연을 해 눈길을 끌었다. “취재거리가 없는 모양이구만.” 원주시 봉산동 자택으로 찾아간 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연대회의’에 참여하게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사회전반에 걸쳐 누수현상이라고나 할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붕괴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시민의 다양한 생활영역에 있어서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참여했습니다. 이제는 통치와 지배차원으로는 이 복잡한 중추적 사회현상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시민이나 주민이 객석에 앉아서 하는 대로 맡길 수 없는 세상이 됐어요. 시민 각자는 자기 영역에서 올바르게, 건전하게 자기의 생활을 보호하고 지켜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지자제 선거를 앞두고 원주는 어떤가요. 개인적으로 이번에 실시될 지자제에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십니까?
선거바람이 불고 있는데 그 형태는 구태의연해요. 이번 선거는 국민이 각성하는 계기가 돼야 합니다. 우선 서울 등 대도시에서부터라도 시민연대를 통해 건전한 사람을 지자제에 내놓도록 하고 시민연대운동이 각 생활영역에 건전하게 뿌리내리고, 그것이 발전해 시민주권사회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엔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당선되는 사람도 생기겠지요. 그러나 시민들의 올바른 의견이 시정에 반영된다면 지자제에 나서선 안될 사람들은 그 다음에는 후퇴하게 되고, 올바른 생활을 구축하려는 대표들이 앞으로 나설 수 있지 않겠는가 봅니다.

●‘원주토박이’신 걸로 아는데, 이 집에서 얼마나 사셨습니까?
36년째입니다. 원주 시내 복판은 6ㆍ25가 터진 지 사흘만에 다 타버려 옛집은 재가 됐습니다. 수복 후 이리로 옮겨와 직접 이 집을 지었습니다. 이게 토담집입니다. 난 해방 당시부터 이승만이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자유당 정권이 들어섰지만 이승만에게 협력을 안하니까 그때부터 ‘요시찰 인물’이 됐습니다. 이승만이 망가지기 직전에는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나가고 중립화통일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그런 것 하다 보니 감옥에 붙들려가고, 거의 평생을 ‘요시찰’이거나 엉거주춤한 생할로 보냈습니다. 그러니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됐어야 말이지….

●70년대 김지하, 김민기씨 등을 주축으로 원주에서 형성된 ‘원주그룹’의 핵심인물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쑥스러운 얘기지만, 무능하나마 그 입장이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80년대 들어서면서 ‘한살림운동’을 통해 외부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셨지요?
‘한살림운동’은 몇십년 동안 생각해왔던 것이고, 또 하나는 70년대 소비자협동조합운동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또 반독재운동을 계속 하다 보니까 종전의 마르크스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 가지고는 문제의 해결은 물론이고 악순환이 계속되겠더란 말입니다. 77년부터 농약ㆍ비료를 마구 뿌리고, 도시산업화를 꾀하는 것을 보니 이 강토 전체가 황폐화 되겠더라구요. 환경도 살고 우리도 살자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겠더군요. 6ㆍ3사태 이후에 원주에서 농촌운동을 하려고 한 박재일씨와 “기본적으로 살아가는데 공동체 내지는 농토를 살리고 먹거리를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 되지 않겠는가”하고 얘기했어요. 김지하 옥중에서 “선생님, 방향을 바꾸지 않으셨어요?”하더군요. 그래 어떻게 알았느냐 하니까 “아, 눈치보면 알지요. 들어오는 쪽지도 그렇고….”하는 겁니다. “그래, 바꿨다. 종전의 이데올로기 가지고는 안되겠다.” “선생님, 저도 생명운동 아닙니까.” “맞다. 그 방향으로 가야 된다.” “그렇게 하면 대중들이 먹지 않을 텐데요.” “안 먹어도 던져라. 너는 글재주가 있으니까….” 그래서 ‘밥’이니 ‘南’이니, 모든 게 그때부터 나가기 시작한 거지. 그런 것이 생명운동의 시작이었단 말입니다.

●사회운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누구의 영향입니까?
조부님과 글을 가르쳐 주신 比江 朴基正 선생, 海月 崔時淳 선생이었어요. 우리집 바로 앞에 천도교 포교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학을 알게 됐습니다. 46년 水雲 崔濟恩와 해월을 알게 되었지요. 영원한 세계,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말씀들을 다 가지고 있더라구요. 그렇게 되니가 이 쑥배기가 함부로 갈지(之)자를 못하겠더군요.

●요즘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충고를 구할 어른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각을 거목들에게서 찾으니까 볼 수가 없지. 문명이 쇠락기로 접어들면 보이지 않는 일반 대중 속에서 변화가 일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조국의 가능성입니다. 요새는 촌에서도 덮어놓고 표를 찍지 않습니다. 훌륭하다는 놈들이 전부 도둑놈이란 걸 알기 때문이죠. 그게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요새 사람들은 자기가 어느 위치에 있고 무어란 걸 잘 압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체로 이름도 없고, 가난한 사람 속에 많습니다. 위정자들은 그런 사람들이 바른 소리를 하면 지금까지 ‘빨갱이라고 몰아치며 정치를 해왔는데, 그런게 아니고 그런 사람들이 세상이 잘못 간다는 것을 먼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위대한 가능성이지.

●가치관의 혼돈으로 많은 사람들이 갈피를 못잡고 있습니다.
우선 자신이 잘못 살아온 것에 대해 반성하는 고백의 시대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삶이 뭐냐, 생명이 뭐냐 하는 것을 헤아려야 할 시기입니다. 뭘 더 갖고, 꾸며야 되느냐에 몰두하는 시대는 이미 절정을 넘어섰어요. 글쓰는 사람들이 가급적이면 고백의 글을 많이 써줬으면 좋겠어요. 갖겠다고 영원히 가져집니까. 원칙적으로 나의 것이란 없는 거지요. 이 자리에서 내가 말하는 것도 다 훌륭한 분들의 영향에 의해 얘기하는 거지 나 스스로 알아 얘기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걸프전쟁이 일단락됐지만 나라 안팎으로 시끄럽습니다. 안으로는 수서사건으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습니다. 조용히 살고 계시지만 관심은 남다르실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나는 그것을 산업문명이 퇴락하는 하나의 징조로 봅니다. 기름 때문에 저러는 거 아니요. 그러나 자원은 한정된 거고, 미국의 군수산업가들이 무기를 팔려고 저러는 거 아닙니까. 그런 가운데 나 혼자 원주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으니, 그런 점에서 죄를 많이 짓는 것 같아요. 정치에 대한 구조적 변화가 없이는 안됩니다. 지금까지 해온 식으로는 서울이든 농촌이든 정경이 유착 않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니 졸부들이 정치하겠다고 나서지, 정말 건전한 정치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정계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진보적 정당을 만들어 신선하게 나가려해도 현재의 선거법과 국회 가지고는 될 수 없어요. 직능별 또는 계층별로 선거법을 고쳐야 하고, 또 그렇게 해서 국회를 구성해 운영해야 합니다.

●도덕적 위기를 막기 위해 당장 제도를 뜯어고칠 수는 없을 테고, 지금 이 고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구성돼 있는 시민단체ㆍ농민단체들이 연대해야 돼요. 공신력을 세워야 할 구심점이 있어야 되거든요. 특히 각 단체들이 시민연대를 통해 이 난국을 극복해야 될 겁니다. 다른 덴 믿을 수 없잖아요.

●선생님께서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닌 걸로 알로 있습니다. 이승만정권을 무척 싫어했으며, 4ㆍ19후 혁신정당, 5ㆍ16직후엔 중립화통일론을 주장, 계속 정치활동을 규제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닿았다면 정치에 관여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주변에서 끊임없이 유혹했을 텐데요.
그건 사실입니다.

●어떻게 유혹을 뿌리쳤습니까?
그렇게 정치에 참여했으면 3년도 못가 도둑놈이 됐을 겁니다.
정치구조가 그렇게 돼 있어요. 그렇게 되면 소망했던 일을 하 수 없고, 또 하나는 나와 함께 가는 분들, 가르쳤던 학생들에 대한 배신이지요. 그것은 내가 생활해오며 만난 사람들에 대한 배신뿐만 아니라 겨레에 대한 배신입니다.

●누구든 어떤 부류에 합류하는데 선생님께서는 늘 혼자였습니다. 혹 인생관에 허무주의 같은 것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저러한 것을 하는 분들에 의해 사회가 잘 되기를 바랐죠. 직감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해방 당시에는 세계연방정부운동을 생각했었지요. 20대 초반에는 ‘윈 월드운동’에 참가했습니다. 왜냐하면 세계를 대표한다는 미ㆍ소가 한반도를 점령했어요. 그걸 들여다보니 그것을 뛰어넘는 우리의 철학이 없이는 한겨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더란 말입니다. 이미 철학이 있다는 것을 40년대에 알았지만 그것이 대중화되지 않았어요. 그 이후에도 군사독재정권에 참여할 수는 없었습니다. ‘국민주권’이 아니라 ‘주민주권’시대가 왔다고 얘기하는데, 독재형태에서는 주권을 인정하지 않아요. 국민으로부터 주권이 나온다고 말하지만 진정한 요구와 바람이 그러한 집단 속에 들어가면 일회용으로 써먹히고 걷어차입니다. 내가 왜 그런데 참가해요. 적어도 만민이 다 평등하게, 다 자유롭게 자기 생활을 보호할 수 있는 협동적인, 그래서 나는 협동운동을 몇십년 동안하고 있습니다. 요새는 소비자운동을 돕고 있습니다만.

●선생님의 지론은 모두 협동운동으로 귀착되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우주의 모든 생태가 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갈라놓을 수 없고, 갈라놓고 지배하는 형태가 아니라…. 남북의 분단도 그렇지 않습니까. 갈라놓고, 지배당하고, 지배하는 쪽에 붙어먹는 패거리들이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의 생명단위로 태양과 지구가 있고,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협동적으로 존재할 때만이 생명을 유지하는 겁니다. 그런 안목에서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전부 다 내 소유로 하겠다고 갈라 가졌지요. 그러니 자연히 이상이 맞지 않아 함께 할 수 없었던 거지요.

●폭넓은 인간관계를 갖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ㆍ야의 정치인 중에도 선생님의친구가 많다고 하던데요.
사실 80년대 전까지 여권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혐오했어요. 이제는 통일의 시대가 와야 합니다. 김일성이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남한에서는 누구와도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욕심을 채우거나 치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고 계시다는데, 80년 김지하씨가 출옥한 후에 난 치는 것을 가르쳤다면서요. 서예전도 몇 차례 여셨지요?
쑥스러운 얘기입니다만 도회였어요. 들어앉아서 책만 보면 공산주의 사상만 깊게 들어간다고 오해하잖아요. 그러니 붓장난이라도 하고 있어야 “저 사람 서예하며 지낸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한 면이고, 서예는 서예 나름대로 ‘기’의 예술이거든요.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많이 돼요. 감옥에 있다 나온 이들은 대개 한자리에 오래 앉지 못해요. 감옥에선 오래 견뎠는데 출옥 후에는 이상하게 착심이 잘 안되지요. 난 같은 걸 치면 시간 가는 줄을 몰라요. 기를 한군데로 모으니까. 그래서 김시인이 나왔을 때 난을 쳐보라고 했지요. 그 사람은 하나를 일러주면 열가지를 헤아리는 사람이지요. 서예전은 다섯 번 열었는데 서울에선 한번 했어요. 도회를 해야되니까 전시회를 했던 거지요. 전시회를 열 때마다 언제나 부끄럽고, 폐만 끼치고 그랬어요.

●종교를 갖고 계십니까?
옛날에는 불교신자였는데 가톨릭신자가 된지 꼭 50년 됐습니다. 모든 종교의 말씀은 다 같아요. 어차피 삶의 영역은 우주적인데 왜 담을 쌓습니까. 그것은 종교의 제 모습이 아닙니다. 이제 생명의 단위는 우주의 단위입니다. 모든 생물은 태양과 지구가 존재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종교에서 생명이 빠지면 종교가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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