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알려진 대통여지도 검정호 생애도 날조돼
  • 우정제 기자 ()
  • 승인 1991.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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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 여과없이 반영한 탓…집중 연구 통한 재조명 필요

  한 장의 지도에는 그 시대의 문화와 과학이 집약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지도로서 그 내용의 정밀성과 풍부함에서 민족의 유산으로 손꼽히는 古山子 金正浩의 大東輿地圖가 최근 원형 그대로 복간돼 화제가 되고 있다. 한지에 절첩법을 사용, 총 22층 1백26판의 도엽으로 원형을 살려낸 사람은 지도연구가인 李祐炯씨(58·지도전문출판사 광우당 대표). 1백여년 전 제작당시와 동일한 제책에 고풍스런 표갑을 갖춰 2백질을 출간했다.

  이씨가 대동여지도의 복원에 손대기는 이번이 세 번째로 이미 70년대 말 첫 복원에 이어 지난해 3분의 2 크기의 복원작업을 마친 바 있으나 이번 작업은 지질과 크기, 장정에서 철저히 제작 당시의 원형을 되살렸다는 데 의의가 있다.

  대동여지도는 전국을 남북 22층, 동서 19면으로 구성한 목판 인쇄지도이다. 22층을 다 펼이 이으면 가로 약 3.5m 세로 7m의 대형 전도가 되는데 김정호가 손수 판각한 목판은 사라지고 현재는 목판본만 남아 규장각 국립도서관 등에 보물(제850호)로서 진장되어 있다.
 
전혀 별개의 지도. 대동여지도로 소개
  김정호(1804?~1866?)는 대동여지도의 제작에 앞서 이미 같은 축적의 지도를 두차례 제작한 바 있다. 30대에 만든 청구도와 40대에 만든 동여도가 그것인데 두 지도 모두 자신이 집필한 地誌(지리지)를 바탕으로 했다. 그의 첫 지도인 청구도는 《동여지도》를 근거로 제작한 것이도 두 번째 지도인 동여도는 《동여도지》를 보완한 《여도비지》를 기초로 했다. 그리고 다시 나이 육십이 이르러 이 육필본동여도를 좀더 간결화한 목판 본이 대동여지도이다.

  대동여지도는 현대 지형도와 비교해 산줄기·물줄기가 동일할 만큼 정확한 지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우수성에 대한 찬탄과는 달리 지도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뿐더러 전문가들 사이에서조차 오인되는 일이 잦다고 이씨는 안타까워 한다. 전혀 별개의 지도인 '大東輿地圖全圖'를 버젓이 대동여지도로 소개한 현행 초등교과서의 실수가 대표적인 예인데 지난 4월을 '고산자 김정호의 달'로 지정한 문화부나 어엿한 전공학자들의 모임인 지리학회 등에서도 같은 실수를 연발해 물의를 빚은 바 있다.

  교육부가 펴낸 국민학교 6학년 1학기 사회교과서 69쪽에는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를 소개하며 비슷한 제작기법의 고지도인 대동여지전도의 사진을 싣고 있다. 이같은 착오는 최근 서지학자 李鍾學씨(64)에 의해 밝혀진 것으로 이씨의 지적에 대해 교육부는 "내년 교과서 수정작업 때 시정을 검토하겠다"고 응답했다. 한편 지난달 문화부 과학기술처 역시 김정호에 관한 홍보책자를 만들면서 대동여지도라는 사진설명과 함께 대동여지전도를 실어 전혀 다른 두 지도를 같은 것으로 오인하는 무지를 드러냈다. 또한 대한지리학회 학술토론에서는 대동여지전도 하단에 △1861년 고산자가 제작했고 △원본과 같은 크기로 영인작업을 했다는 설명문까지 넣은 기념품이 참석자들에게 배포되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문제의 대동여지전도(108X65cm)와 대동여지도 (약 700X350cm)는 크기뿐 아니라 내용상으로 큰 차이가 있다. 대동여지전도에는 대동여지도에 없는 대마도가 그려져 있고, 무엇보다 서울로부터 주요도시까지의 거리(里) 표기에 해방 이후에나 통용됐을 아라비아 숫자 '0'이 사용된 것 등이 판이하다는 것이다. 이같은 이유에서 대동여지전도를 대동여지도의 '아류'라 못박으며 학회측 실수에 문제를 제기한 이종학씨의 주장은 이달 들어 학회장인 서울대 박영한 교수와의 사이에 반박·재반박으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지리학계의 첨예한 쟁점으로 부각도기에 이르렀다. 박교수에 따르면, 대동여지전도의 '0'표기는 고대로부터 사용돼온 위치기수법, 다시 말해 숫자에서의 단순한 빈자리 표시로서 일찍이 세종시대의 문헌에는 범례들이 나와 있고, 따라서 '고산자 아류'라는 판정은 성급하다는 것이다.

  이우형씨는 이번 논란에 대해 "한마디로 제작자 미상의 대동여지전도를 확실한 근거도 없이 지리학회가 김정호의 작품으로 못박은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고산자가 평민 출신인 데다 후대의 평가 같은 데에 전혀 연연치 않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현존기록이 희귀할 수밖에 없고 아직껏 그 연구성과도 태부족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인물 김정호에 관한 많은 부분이 오인된 채 전해지고 있다면서 현행 국민학교 5학년 2학기《읽기》 교과서 내용에 몇가지 의문점을 제기한다.

조선총독부가 지어낸 이야기
  '황해도 두메산골 청년 김정호는 어느날 서울에 올라와 궁중 규장각에서 조선 팔도지도 한 벌을 얻어본 뒤 그 허술함을 탄식하다 지도제작을 필생의 업으로 삼기로 결심한다. 10여년간 모진 고초를 겪으며 전국을 돌고 백두산을 여러 차례 오른 끝에 지도의 원고를 마련한 그는 서울에 집을 정하고 이야기를 지어 연명하며 딸과 함께 대동여지도를 판각한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정성어린 작업은 나라사정을 남에게 알리는 일이 라는 오해를 받아 목판은 압수되어 불살라지고 그는 억울한 죄명으로 죽음을 당한다.'

  일반적인 통설로 유포되어 있는 위의 교과서 내용에 대해 이씨는 두메산골 청년이 규장각에서 지도를 구했다는 사실이나 왕이 보는 지도가 형편없었다는 점, 작가도 아닌 김정호가 글을 지어 지도제작비를 마련했다는 사실 등이 모두 터무니없이 날조된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이같은 내용은 1934년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일제시대의 국어교과서 《조선어독본》제5권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철저한 식민사관에 입각해 조선을 문화후진국으로 몰아붙인 당시의 교묘한 조작을 아무런 여과없이 지금껏 우리교과서에 베껴 싣고 있다는 것이다.

  이씨는 또 《조선어독본》에 김정호가 조선 팔도를 세 번 돌고 백두산을 여덟차례 올라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고 기술한 부분을 환기시키면서 그같은 허구적 조작이 현행 중·고교 지리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돼 엄연한 편집도인 대동여지도를 실측도로 오기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다시말해 김정호는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기초자료를 취합, 실제와 근사한 지도를 편집했던 것이지 전국을 일일이 발로 누벼 실제땅을 잰 값으로 지도를 만든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65종 도서 참고한 전통지도의 명작
  김정호는 자신의 마지막 지지인 《대동지지》에서 대동여지도의 참고도서가 총 65종 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각종 지도와 자료를 비교해 그 장점을 택한 '비람식'제작법이야말로 교통 등 여러 여건이 불비했던 그시대에 어떻게 그처럼 과학적인 지도를 거의 혼자 힘으로 제작할 수 있었던가 하는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된다. 그간 학계에서는 이병도 이래 여러학자들에 의해 김정호의 옥사설과 전국답사설 및 백두산 왕래설을 부인하는 주장들이 제기된 바 있다.

  이씨는 아울러 현재 통용되고 있는 대동여지도의 축적 1:160,000을 1:216,000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동여지도를 16만분의 1 지도로 보는 것은 10리를 4km로 계산한 일제시대 이후의 개념에 따른 것일 뿐 대동여지도의 방쾌표(축척표)로 환산하면 10리가 5.4km가 되므로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1:216,000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대동여지도가 산줄기와 물줄기를 중심으로 지형을 묘화한 우리의 전통지도 제작법에 충실한 명작임을 역설한다. 그는 산줄기와 물줄기에는 역사·언어·관습·기후 등으로 세분화되는 생활문화권의 권역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설명하면서 산을 거대한 '물탱크', 즉 원초적 생명의 발원지로 인식한 조상들의 철학이 현대에 들어와 단절된 것이 몹시 안타깝다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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