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병 앓는 ‘무형문화재’ 제도
  • 송준 기자 ()
  • 승인 1992.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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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 변형, 무원칙 지정, 기능인 생활고…典型 강조말고 原型 연구해야



 전통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날로 높아가고 있지만 전통문화 보존과 전승의 실상을 들여다보는 눈길은 많지 않다. “인간문화재가 있으니까”라고 마음을 놓아버리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최근 한 전통문화보존회에서 일어난 내분은 인간문화재와 그 제도에 적지 않은 문제들이 있음을 노출시키고 있다. 애써 지정한 무형문화재가 오히려 전통문화를 왜곡시킨다는 시각과 함께 인간문화재의 고령화 및 일부 예…기능보유자의 생활고까지 겹쳐 무형문화재의 현주소는 어둡기만 하다.

  올해 초 분규가 일기 시작하여 아직껏 가라앉지 않고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4호 강령탈춤보존회(이하 보존회)의 경우는 그동안 곪아왔던 우리나라 전통문화계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내분은 보존회 운영을 둘러싸고 姜大昇 신임회장(41…지난 1월 선출)측과 예능보유가 金正順씨(61)측이 충돌한 데서 비롯됐다.

 강씨측은, 김정순씨가 보존회를 파행적으로 운영했으며, 특히 김씨가 예능보유자로 인정되면서 △출연하는 사자를 한 마리에서 두 마리로 △마부의 검정소매를 색동소매로 △재물대감의 도포의 소매폭을 좁게 △무거운 칙베장삼을 가벼운 중국장삼으로 바꾸는 등 전통을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씨는 “놀이방식이 다른 것은 근거가 되는 자료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강씨 등을 “문화전승에 해가 되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해 보존회에서 제명해 버렸다. 문화재관리국은 김씨의 주장을 옹호하고 봉산탈춤(제17호) 은율탈춤(제61호)등 탈판에서는 강씨의 주장을 지지하는 가운데 양쪽의 대립은 ‘법정 싸움’도 불사할 기세여서 쉽사리 사그러들지 않을 듯하다.

 한편 전승공예품을 만드는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들의 경우는 생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해 전통문화의 전승에 전념할 수 없는 또다른 문제점을 안고 있다. 보유자에게 생계보조비로 월 50만원이 국가에서 지급되지만 그것으로는 최소한의 생활도 어렵다.

 끊음질 기능보유자 沈富吉씨(88·서울 신림동)는 평생을 나전칠기에 매달려 사아왔는데 지금은 병으로 달동네 집에 누워 있다. 보유자 후보인 아들 沈鍾彦씨(45)까지 모두 일곱식구가 나전칠기의 끊음질 기술 하나로 생계를 유지하는데 수입은 후보 생계보조비 25만원을 합쳐 75만원이 전부이다. 이 돈으로 손녀 넷을 교육시키고 생활을 꾸려야 한다. 나전칠기 공예품 하나 만드는데 4~12개월이 걸리기 때문에 판매수익을 바라보고 있을 수도 없다. 어렵게 만든 공예품이나마 내놓고 전시·판매할 만한 장소도 별반 없다. 심지어 보유자가 전통공예전시관(경복궁 안에 있음)에 진열된 자기 공예품을 보러 갈 때에도 입장권을 사야만 드나들 수 있다.

 기능 및 예능 보유자의 고령화문제와 전승문제 또한 심각하다. 89년 한해에만 12명이 세상을 떠났다. 기·예능 전승을 위해 일종의 졸업방식인 이수자·전수자 제도를 갖추고 있지만, 돈 한푼 생기지 않기 때문에 대개 다른 직장을 가지고 활동하거나 이곳저곳 전전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1호 은율탈춤보존회 총무 車富會씨(34)는 “생계만 보장된다면 일생을 바치고 싶다는 사람이 여럿 있다”고 밝혔다.

 옴싹달싹 할 수 없을 정도로 엉켜버린 정부의 문화정책과 관리 실태도 답답하지만, 무형문화재들을 발굴·지정해온 1세대 학자들의 조사방법과 연구 자세가 오히려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어느 하나만을 지정함으로써 나머지 문화재가 사장돼버린다거나, 그 결과로 지역간 민속의 연관성과 시대상의 매듭이 끊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제72호 진도씻김굿은 80년 11월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씻김굿은 넋굿의 일종이다. 당시 진도에서는 큰 굿이 많이 치러졌는데 도신굿·성주굿·오방돌기 등의 집굿과 위령제인 넑굿, 그리고 대동굿·장승굿 등의 마을굿이 그것이다.

 2세대 학자들의 비판은 “이 많은 큰 굿 가운데 하필 주검을 다룬 씻김굿만이 문화재로 지정된 근거가 무엇이냐”하는 것이다(넋굿만해도 용신굿·용왕굿·팍머리씻김·다시래기굿·저승혼사굿 등 수많은 종류가 있다. 이 가운데 진도다시래기는 85년 2월 제81호 문화재로 추가 지정됐다).

 풍어제 가운데 하나인 동해안별신굿(제82-가호)도 비슷한 경우이다. 《한국 무속의 연구》에 따르면 `978년 10월10일 현재 남한의 동해안에서만 1백55개의 풍어 별신제가 치러져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유독 강릉지역의 것만 지정됨으로써 다른 지역의 별신제가 위축되거나 사라져 버리게 됐다는 것이다. 더욱이 보유자인 金石山시(71)는 부산지역 굿의 대가여서 굿의 특성을 규정하는 지역성을 희석시키기까지 한다는 문제 제기도 있다.

 농악·농요·들노래 등도 마찬가지다. 전국 어디에서나, 누구나 쉽게 부르던 이 노동요와 놀이가락 가운데 굳이 진주·평택·이리·강릉·임실필봉(농악 : 제11호)과 고성·예천통명(농요 : 제84호)만을 지정한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민속경연대회 ‘공연 위주’로 변질

 문화재는 문화재관리국 내 비상설기구인 문화재위원회의 조사와 심의를 거쳐 타당하다고 인정된 것을 문화부장관이 지정하게 돼있다(문화재보호법 제5조). 위원회의 6새 분과 가운데 무형문화재와 민속자료를 조사·심의하는 제4분과는 9명의 문화재위원과 29명의 문화재전문위원(91년 7월 현재)으로 구성돼 있다. 문화재위원과 전문위원을 선발하는 기준이 따로 이 문서로 규정돼 있지는 않다. 대체로 학계의 권위자가 위원회 안에 망라돼 있어 따로 무슨 기준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지정하기 위한 조사·심의 작업은, 반론이 용납되지 않게끔 절대 권위가 유지돼야 한다. 권위가 없으면 문화재사업 전체가 줏대없이 흔들릴 위험이 있다”라고 문화재관리국의 최태현씨(32)는 말한다. 정치력 따위에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자부심과 사명감이 대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유아독존식의 권위주의는 “문화에 관한 한 무소불위”의 독간과 파행을 부르고, 심지어 개인적 지연과 학연이 개입하는 소지를 남겼다. 특히 △소멸 직전의 민속을 지정하고 복원하거나 △문헌이나 구술을 참고로 이미 사라진 문화를 복원할 때 그 같은 경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고 한다.

 예를 들면 중요무형문화재 제61초 은율탈춤 지정(78년 2월)에는 地緣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지적된다. 은율탈춤 보유자 壯龍秀씨(90)는 “봉산탈춤(67년) 강령탈춤(70년)이 지정될 당시 누군가 ‘황해도 한곳에 웬 탈춤이 그렇게 많은가. 17개 郡 모두 탈춤 무형문화재를 지정할 것인가’라면서 반대를 했었다. 10년 뒤 장관이 ‘내가 은율사람이다. 관리국에 전화해서 은율탈춤이 문화재로 지정되게 하겠다’고 말한 얼마 뒤 지정을 받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제79호 발탈(83년 6월지정)은 말 그대로 발에 탈을 씌워 노는 일종의 가면극으로 대한제국 말엽 일부 藝人들에 의해 演?돼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발탈을 조사한 문화재위원 鄭昞浩 교수(중앙대)가 연구논문 <발탈 演?에 대하여>에서 밝힌 다음 대목은, 발탈의 문화재 지정에 대하여 후학들이 비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발탈의 문헌적 기록은 전혀 없고 구전으로만, 그것도 희미하게 전해져온 데다 계승력이 없어 고령의 유랑藝人 李東安씨(1906년생·예능보유자) 한사람에 의해 명맥을 이어왔다. 그렇더라도 발탈 역시 소중한 민속예능의 유산임에는 틀림없다.”

 위원회에서 조사할 대상을 정하는 데는 대략 세 가지 경로가 있다. 즉 △시·군·읍·면 등지에서 上達돼온 자료를 관리국 직원들이 1차 선별하여 조사를 위촉하는 경우 △위원이나 전문위원이 조사 안건을 내는 경우 △행정부의 고위 관리가 직접 안건을 내는 경우 등이다. 이때 조사를 하고 안하고를 결정하는 기준은 단지 전문가의 식견이며, 문서상의 객관적 규정은 없다고 한다.

 1958년부터 실시돼온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는 많은 무형문화재를 발굴하는 창구 노릇을 해왔으나 한편으로 민속을 왜곡·변형시키는 역기능도 해왔다. 초기에는 알려지지 않은 민속을 찾아내는 데 수훈을 세웠으나, 회를 거듭할수록 민속이 공연 위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공연용 모조품모·용두레(논에 물을 퍼올려내는 농기구) 등을 생산하는 업체가 생기기도 했고, 민속연출 전문가가 등장하기도 했다. 예컨대 朴弘男씨는 ‘서산볏가릿대놀이’를 연출하여 제26회 민속경연대회(1985)에서 종합우수상을 받고 이듬해 ‘苧山팔읍 길쌈놀이’를 연출, 제27회 대회에서 같은 상을 받았다. 또 李炳玉씨는 제 27회 대회에 출연한 ‘북성구지 풍어노래’와 ‘송파답교놀이’ 두 종목의 연출을 동시에 맡은 바 있다. 심지어 “텔레비전에서 한번 본 것은 모두 자기 고장의 민속과 접목시키려는 풍조” 나오기도 했다.

 

‘문화재 위한 민속’ 없애야

 전통문화를 둘러싸고 이같은 잡음이 일게된 데는 명예와 상급 등에 대한 욕심과 열정이 작용했겠지만, 중요한 것은 “민속학 연구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1세대 학자들의 민속에 접근하는 자세”였다고 소장학자들은 말한다. 즉 ‘민속을 읽는 눈’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대략 세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1세대 학자들이 일제시대 도입된 민속학의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인류학처럼 새로운 것의 수집에 지나치게 집착해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또하나는 북한과의 경쟁심리가 ‘민속발굴 속도전’을 부추겼으리란 것이다. 민속학자 朱剛玄씨의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1954년 9월 ‘조선의 민간오락’을 개괄적으로 파악한 다음 55년부터 본격 연구·조사에 들어가다. 이에 자극을 받아, “정통성 결여에 절치부심하던 박정권이 擬似민주주의적 입장에서 문화재 관리국과 학자들에게 ‘민속발굴 속도전’을 채근했을것”이라고 주씨는 주장한다.

 세번째 ‘낭만주의적·민족주의적 민속학’적 접근에 대한 비판이다. 민속학자 李長燮씨(37)은 “오랜 것, 고상한 것, 자랑하기 좋은 민속이나 전통을 향수하는 태도”가 곧 낭만주의적 민속학이라며 “날로 사라져가는 민속현상이 더 없어지기 전에, 인간문화재가 더 사라지기 전에…”라는 조급증이 낳는 역기능에 대해 우려했다.

 제주칠머리당굿(제71호·80년 11월 지정)은 그 좋은 예이다. 제주 어촌의 부락제였던 칠머리당굿은 제주시 개발로 인해 칠머리당이 사라봉 꼭대기로 자리를 옮김으로써 지역성을 상실했고, 예능보유자이던 안사인 무당이 타계함으로써 原型性을 훼손당했으며, 지역 주민들과도 괴리되어 결국 ‘문화재이기 위한 민속’으로 박제화돼버린 셈이다. 제1호 종묘제례악이나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등 왕족이나 귀족의 습속을 전통 민속문화인 것처럼 문화재로 지정한 것 역시 ‘자랑거리 만들기’식의 사고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다.

 이같은 문제점들에 대해 학자들은 처방을 내기에 앞서 민속의 原型 문제를 먼저 정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민속을 보존하고 전승·발전시켜나가되, 원형을 얼마만큼 보존할 것이며 또 현대적 감각은 얼마만큼 허용할 것인가 결정하는 문제이다. 국악 전문가인 吳龍祿씨(39)는 ‘적자생존론’을 내놓는다. “1세대 보유자 이후부터 무형문화제 제도 자체를 폐지해야한다. 전통문화 스스로가 생명력·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링게르에 의지한 전통문화가 언제까지나 버틸 것으로 보는가.” 오씨는 그 대안으로 대학과 사설학교가 강단을 기·예능인에게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삶의 현장에 녹아 있는 문화여야 한다.”는 林在海교수(안동대·민속학)의 말은 ‘민속의 原型’에 관한 방법론의 한 방향을 보여준다. “박제로 남길 것은 남긴 채 보관하고, 시대 변화와 함께 삶의 일부로 같이 갈 것은 기꺼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무형문화재를 수집해온 작업들은 미숙한 대로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이어주는 다리로 보아야 한다.” 문화재위원 芮庸海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64)은 위와같이 말하고 “典型性을 강조하는 것보다, 原型을 긍정하고 때로 부정하는 주장들이 어우러질 때 전통은 생활 속에서 자리를 찾을 것으로 본다”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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