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블랙 코미디
  • 김훈 (사회부장) ()
  • 승인 1994.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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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사상’ 안에 ‘인간 주체’가 부재하듯, 주사파에 대해 경각심을 돋우는 의도 속에는 이성적 핵심이 결여돼 있다.

박 홍 총장이 ‘국민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발설했다는 ,각계 각층의 주사파 창궐론은 민주당 최고회의의 반격 성명과 박총장의 25일 해명 회견으로 이어졌다. 그가 불러일으킨 것은 경감심이라기보다 앞뒤가 잘 맞지 않은 폭로의 연속 같았다. 이 나라 많은 총장과 교수 들이 그 소리를 향해 갈채와 지지를 보냈고, 박총장은 마치 박해받는 선지자처럼 신변 보호도 받았다. 그 무덥고 소음이 가득찬 여름이 다 지나고 나서야 검찰은 그의 발언이 구체적 근거가 없는 것이며 따라서 수사 단서가 될 수 없다는 취지의 발표를 했다. 그러나 검찰이 박총장의 발언을 적어도 수사의 정치적 환경으로 삼고, 그 발언에 편승한 인상을 지울수 없다. 박총장이 발언할 때마다 검찰은 수사 결과가 아닌 첩뽀 수준의 자료들을 세상에 펼쳐 보이며 아름다운 공조체제를 과시해온 격이다.

 반공을 위하여 국민들이 치른 피와 눈물의 대가는 거대하다. 북한에 경수로를 지원하는 문제를 현실적 구체성 속에서 논의 할 수 있게 된 경제력의 가장 근원적인 바탕은 반공을 위해 국민들이 바친 피와 눈물이고, 그것이 비록 언젠가는 청산해야 할 역사의 질곡이라고 하더라도 그 피와 눈물은 반공과 애국을 업으로 삼는 몇 몇 인사들의 발언에 비교할 수 없이 신성한 것이다.

‘주사파 발언’은 신중성과 객관성 지녀야

 서강대 총장이며 천주교 사제에, 생명문화연구소 이사장, 대통령을 자문하는 21세기위원회 위원, 경실련 고문, 정사협 자문위원, 한국가톨릭교수회 지도신부, 공동체의식개혁협의회 상임공동의장, 통일광복민족회의 공동대표,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자문위원, 그리고 그밖에 많은 지도적 위치를 겸하고 있는 박 홍 총장이, 김일성 사후에 한국인들에게 절박해진 새로운 미래를 향한 무계통한 사고와 사상 들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할 사태’ 라고 판단했다면, 그 판단은 역시 정밀성을 동반하는 판단이어야 했다. 그가 겸하고 있는 수많은 지도적 위치로 보아 판단의양식에 따라 어떤 권위 향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령 주사파가 국가보안법상의 적(?)의 정치.군사노선을 추종하는 무리들로서, 같은 하늘 아래서 살아가기가 애초부터 불가능한 집단이라고 할 때, 그 주사파에 대한 언급과 지적은, 바로 그처럼 비극적인 이유 떄문에 고도의 신중성과 깊은 사려와 명석한 객관성을 통과해 나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같은 신중성과 객관성이야말로 반공을 위해 거대한 피와 눈물을 헌납해온 국민들에 대한 예절이며 윤리라고 생각한다. 주사파가 창궐했다는 박 홍 총장의 발언에 대해 검찰이 첩보 자료를 뒷받침해 주고 언론이 연일 난리굿을 떨어댄 뒤에, 겁에 질린 국민들을 향해 근거를 밝힐 수 없는 이야기였으며, 교육용이었다고 말함으로써 도대체 무슨 ‘경각심’ 이 작극될지 알기 어렵다.

 이 사태는 마치 악(惡)의 위세를 극도로 강조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을 악 앞에 주눅들게 해서 모든 신성 모독을  박멸하려 했던 중세 기독교 성직자와 정치 권력의 풍경을 보는 것과 같다. 주체사상 속의 ‘주체’ 란 현존하는 개별적 인간이 아니다. 주체사상 속의 ‘인간 주체’ 는 이념화하고 추상화한 인간의 형해일 뿐이다. 형해화한 인간들은 거대한 중앙 집중적 삶의 집단을 이루며 권력 정점을 숭배하는 신앙을 체득하는 것이다.

고백성사 누설 여부는 교회가 다룰 몫

 주체사상이 적의 세계관이며 적의 현실조직 원리라고 할 때, 우리들의 비극은 적의 사상이 너무나도 빈곤하고 남루하며 너무나도 부족국가적이어서 상대하기조차 민망하다는 데 있는것이고, 그 반대는 아니다. 주체사상 안에 ‘인간 주체’가 부재하듯이 주사파를 지적하고 거기에 대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 그 신성수호적인 의도들 속에는 이성적 핵심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싶다. 그것은 분단이 이 사회에 가져다준 빈곤이며 무지이다. 야당은 이 사태의 배경을 따져보겠다고 성명을 내고 있지만, 주사파 창궐론이 몰고온 이 사태는 정당의 정략적 대상이라기보다 한 시대가 안고 있는 정신적 빈곤의 일면처럼 느껴진다. 반공에 바쳐진 피와 땀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낸 나라에서 어떻게 반공 자체를 블랙 코미디로 만드는 사태가 벌어질 수가 있으며, 그 블랙 코미디가 다시 자기 자신을 ‘반공’ 이라고 주장할 수가 있는 것인가.

 검찰으 ㄴ박총장의 발언을 수사 단서로 삼지 않듯, 그발언이 몰고온 반공 훼손 사태의 책임을 그에게 묻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저 블랙 코미디가 ‘반공’으로 행세하는 한 박총장은 무죄인 것이며, 그의 주사파 창궐론은 ‘교육용’ 으로 행세할 수 있는 것이다.

 주사파가 악마이고 뱀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최종적 구원의 자리를 박탈하지 않는 것, 그에게 영원한 지옥을 면해 주는 것, 구ㅡ리고 그같은 구원의 가능성이 하늘에서 뿐 아니라 현세의 땅 위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마도 천줒교 사제의 종교적 자세일 것이다. 다만, 폭로가 특수한 교회의 제도를 통해 신자가 고백한 내용을 근거로 했는지 안닌지를 가리는 일은 교회법상의 문제이므로 우리가 거론할 대상은 아닐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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