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란 이름의 ‘이삭 줍기’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5.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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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의 꿈이 나를 밀어간다> 펴낸 김연환 시인

 ‘부엌방/엉덩이에/포탄알 박는다/참여 속의 개혁/참여속의 개혁 외치며’ (<치질>)
 ‘사과나 밤도 아닌 감으로만 정치를 해오신 지 수십년,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 되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맞서 싸우시더니 감이 연시가 되고 홍시가 되어 곰삭은 관계로 국민을 위해 나라를 위해 표표히 외나무다리 건너가신 우리들 밀감의 정치인’ (<감>)

 김영환 시집<지난날의 꿈이 나를 밀어간다>(실천문학사)에서 발견되는 것은 우선 재미있는 풍자이다. 그는 참여 속의 개혁의 치질에, 감의 정치인을 ‘감’에 빗대어 현실에 은폐된 실재를 부각한다. 은폐된 실재라는 것은 직접 화법보다도 이렇듯 간접적 은유의 창을 통해 환기될 때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풍자성은 전봉준과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결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가마 타고 잡혀가는/그의 눈빛에서/승리를 본다/머리 잘린/그의 얼굴에서/희망을 본다/일본 열도와도 바꿀 수 없는/유산이여/스티븐 스필버그씨/이런 사람 쉰들러 리스트에 있어요?/이런 죽음 아우슈비츠에도 있어요?’(<스티븐 스필버그>)
 
김영환의 직업은 치과 의사이다. 그것도 서울 강남에서 제법 큰 치과 의원의 원장님이다. 그러나 그는 의사 선생님이 되기 전에 일당 3천원짜리 전기 기능공이었고, 그 전에는 노동판을 떠돌던 수배 학생이었다. 연세대 치대 재학 시절 학내 시위를 주동해 긴급조치 9호에 의해 구속되었고, 만기 후 재입학했던 80년에는 5 · 18 계엄조치에 의해 합수부로 연행되어 다시 구속되었다. 그후 노동운동으로, 서점 주인으로, 국민운동본부 정책실 정책위원으로 척박한 시대를 보내다가 대학을 졸업한 것이 입학 15년 만인 88년이었다.

 이같은 그의 독특한 이력은, ‘…전기기능공으로 뺀찌 차고 만원버스에 올라 곱게 차려입은 여대생이 스타킹 나간다며 짜증을 부릴 때 온갖 생각 일어났었어 이제는 뒤늦게 복학도 하고 의사가 되었지만 돌이켜 보면 언제나 부끄러워지는 것은 뺀찌 사쿠를 옆에 차고 버스에 올라 얼굴을 붉히던 그 고뇌의 산을 나는 훌훌 넘지 못한 것이라네’ (<뺀찌 차고 버스에 올라>)에 잘 나타나 있다.

 “77년 감옥에서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면회와 책읽기조차 금지당한 0.7평의 감방 회벽에 쓴 것이 시인으로서의 출발이었습니다. 만약 투옥되지 않았더라면 시에 대해 눈을 뜨지 못했을지도 모르죠.”

 감방 회벽에 쓴 시들은 김해윤이라는 가명으로 당시 <시인>이나 <문학의 시대>등에 발표되었고, 그것이 묶여져 시집 <따라오라 시여>(시인사 · 88년)가 되었다.

 “많은 사람이 떠났습니다. ‘운동’을 외치다 떠나버린 텅 빈 자리만 남았죠. 여기서, 이 텅 빈 자리에서 무엇을 할까. 저는 여전히 희망이라는 이름의 이삭을 주워올리고자 합니다.”

 이 세기말에서 그가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한 대답이다.
趙瑢俊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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