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망명 전 YS에 친서 보냈다
  • 김당 기자 ()
  • 승인 1997.07.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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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중개인 김숙향 · 이연길 등 통해 수 차례 전달 … 김대통령, 한국행 의지 확인 뒤 '대북 강경책'으로 급선회

국가안전기획부가 황장엽(74·전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김덕흥(58·전여광무역연합총회사 총사장) 두 사람에 대한 망명 공작의 진상을 상당 부분 은폐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안기부는 또 망명을 중개한 핵심 인물인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북민협) 이연길 회장(71)을 호텔에 연금해 언론 접촉을 차단함으로써 망명 개입을 둘러싼 그같은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또 황씨는 망명 의사를 타진받는 과정에서 또 다른 핵심 중개인(김숙향·여)을 통해 김영삼 대통령한테 친서를 수 차례 전달했음이 밝혀졌다. 황씨의 친서 전달 및 망명 계획 사전 인지는 김대통령의 대북 정책이 북한의 붕괴를 전제로 하고 강경책으로 몰아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그동안 황씨가 자신의 망명을 중개한 이연길 회장(당시 이씨는 A씨로만 알려졌었음)을 통해 <월간 조선>에 친필 서신과 논문등을 전달한 사실은 이미 보도된 바 있지만, 또 다른 중개인을 통해 김대통령에게 친서를 전달한 사실이 밝혀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는 그동안 황씨가 망명하기 전에 정부에 망명의사를 밝힌 적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한마디로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따라서 친서 전달 사실은 정부의 공식 입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다. 또 이것은 노동법 파동과 한보 사태로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김영삼 정부가 정권 차원에서 황씨의 망명 일정을 조정·관리했을 수 있다는 또 다른 의혹을 낳는 것이기도 하다.

그동안 <시사저널>이 추적한 바에 따르면, 황장엽씨나 황씨의 대리인인 김덕홍씨를 접촉한 남한 이사는 수십명에 이르나, 두 사람의 망명을 결정적으로 중개한 핵심 인물은 북민협 이연길 회장과 김숙향(50대·천보산업 고문) 두 사람이다. 황씨의 망명과 관련된 김숙향씨의 역할이 언론에 익명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황씨가 망명(2월 12일)한 직후인 지난 2월 15일 일본 NHK 방송을 통해서이다. 당시 북경 소식통을 인용한 NHK 보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장엽과 함께 망명한 김덕홍씨가 96년 8월 북한 금강산 개발 문제로 자신과 접촉하던 한국의 전직 대학 교수인 여성 실업가에게 한국 망명 의사를 처음 타진했다. 이 여성 실업가는 자신과 개인적으로 친한, 김영삼 대통령과 극히 가까운 인물에게 이 문제를 상의했으며, 최측근 인사는 다시 김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함과 동시에 작년 9월 북경에 가서 김덕홍씨를 만나 황비서의 망명 의사를 확인했다.'

황씨, 청화대 · 안기부보다 김현철씨 더 신뢰
이 보도대로라면 몹시 충격적인 기사였다. 이 기사는 정부의 공식 부인과는 달리 김대통령과 최측근 인사가 황비서의 망명 의사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 기사를 오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박태중씨는 국회 한보 청문회에서 사업상 김숙향씨와 여러번 만난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망명에 개입한 사실을 간접 시인했다. 그러나 청와대가 '오보'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직접적 이유는 바로 김씨가 전한 친서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NHK의 보도 내용은 대부분 사실로 확인되었다. 망명 중개인이라고 보도된 여성 실업가는 한때 모교인 ㅇ대에서 영문학을 강의한 김숙향씨로, 명성그룹 김철호 회장의 여동생이다. 김씨는 80년대 초부터 금강산 관광·개발을 추진해온 김철호 회장의 대리인 자격으로 북경에 머무르며 북한 인사들을 접촉해 오던 중 94년 북경에 여광무역회사를 개설한 김덕홍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후 두 사람이 만남을 거듭하면서 신뢰 관계가 형성되자 김덕홍씨는 95년 10월게 심양에서 김숙향씨를 황장엽씨에게 소개했다. 또 94년부터 김덕홍씨와 접촉한 장승학씨(한민족평화통일협회 이사장)에 따르면, 이 무렵 김숙향씨는 금강산 개발을 추진해온 오빠 김철호 회장을 김덕홍씨에게 소개했다.

이밖에도 국내 정·관·재계 유력 인사들과 교분이 두터운 김씨는 천보산업(회장 장병모) 고문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대북 투자를 원하는 국내 기업인들을 중국에서 북한 인사들에게 소개하는 중개인 역할도 해왔다. 김씨가 오빠말고도 황·김씨에게 소개한 인사는 홍정길 목사(남서울 은혜교회)와 김현철씨의 측근인 박태중씨를 소개한 것은 황장엽씨의 요청때문이었다. 96년 7월 황씨가 처음 자신의 망명 의사를 내비쳤을 때 김씨는 이를 말렸다. 그러나 그 뒤 망명 의사를 굳힌 황씨는 망명 이후 신변을 보장받기 위해 남한내 최고 권력자인 김대통령으로부터 직접적인 보장을 받을 수 있도록 믿을 만한 인사에게 선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김씨는 그 역할을 평소 알고 지내던 박태중씽게 전달했고, 박씨는 이 메시지를 김현철씨에게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96년 8~9월 사이에 중국을 방문한 박태중·김현철 씨의 방중 목적은 바로 황씨의 망명 메시지를 직접 확인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안기부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에 따르면, 홍장엽씨의 요청으로 김현철씨가 망명 작업에 개입하게 되었다. 황씨가 청와대와 안기부 같은 권력 핵심 조직조차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력 핵심의 공조직에 대한 황씨의 불신은 이연길씨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각별히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쪽(남한) 권력 깊숙한 곳에 이곳9북한) 사람이 박혀 있습니다"라고 말한 대목에서도 엿보인다. 사실 여부와 관계 없이 황씨는 권력 핵심에 간첩망이 닿아 있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황씨가 사조직(대통령 측근)을 선호했음에도 김씨는 황씨의 친서와 함께 여러 문건을 안기부에도 전달한 것ㅇ로 알려졌다. 그러나 안기부는 친서를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황씨에게 신변 보장 메시지를 전달하는 문제와 고나련해 김씨를 포함한 사조직과 갈등을 빚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기부는 김숙향씨뿐만 아니라 이연길씨를 통해서도 망명 의사를 확인하려고 직접 접촉을 시도했으나 황씨로부터 거절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황씨 본인이 안기부를 통한 망명은 '자살 행위'로 인식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안기부 死地에 던져진 김숙향씨 외면
안기부에 대한 황씨의 불신은 황씨에 대한  안기부의 불신으로 이어졌다. 안기부로서는 당연히 고도의 정치 공작이 아니냐는 의혹을 가질 법했기 때문이다. 또 안기부로서는 공작 아마추어인 사조직이 개입해 대사를 그르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사조직과 갈등을 빚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서의 소식통은 김대통령 또한 황씨가 '유일한 대남 창구'라고 밝힌 김숙향씨를 친서 및 메시지 전달 창구로 삼았다고 밝혔다. 이 소식통은 그 까닭을 김대통령이 안기부를 불신한 것과 대북 공작에 대한 지난친 자심감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황씨가 일본을 방문할 때 김씨 또한 일본에 있었다. 이연길도 따로 일본에 있었다. 두 사람 다 황씨의 망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기부도 황비서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황씨는 일본에서 망명하지 않았다. 경호가 삼엄한 탓도 있었지만, 황씨는 일본에서 망명시키려던 안기부 계획을 거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황씨가 일본 방문일정을 마치고 중국으로 가자 두 중개인도 북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다음날 황장엽·김덕홍씨는 망명을 결행했다.

그러나 이 날 망명을 중개한 두 사람의 처지는 천양지차였다. 이연길씨는 황·김씨를 북경 주재 한국대사관 영사부로 안내했고, 그 시각에 김숙향씨는 황씨와 만나기로 한 21세기 호텔에서 홍정길 목사와 황씨의 수양딸 박명애씨(심양 명흥무역공사 총경리) 그리고 북한 사람 2명과 함께 황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비서가 곧 도착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갖고 온 2명은 나중에 알고 보니 황씨가 자신에게 붙인 감시를 따돌리느라 호텔로 보낸 북한 감시원들이었다. 황씨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린 김숙향씨 일행은 뒤늦게 김덕홍씨로부터 "여기는 한국 대사관이로. 빨리 피하시오"라는 전화를 받았지만, 감시원이 눈치챘다면 김씨 일행은 북한에 납치될 뻔했던 셈이다.

황비서는 망명 직후 안기부측과 대화를 거부하고 김숙향씨를 먼저 찾은 것으로 전해진다. 사지(死地)에 던져졌던 김씨 또한 북경에서 황비서를 만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안기부측은 이를 막았다. 공식으로 망명이 이루어진 이상 안기부가 전담하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그러나 문제는 안기부가 김씨를 통해 황비서의 망명 계획을 알았으면서도 북한 감시원을 따돌리느라 사지에 던져진 자국국민의 신변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황장엽 · 김덕홍씨는 망명 과정에서 김숙향·이연길 두 라인을 가동하는 이중 플레이를 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김덕홍씨는  두 사람 모두에게 황씨의 친필 서신과 <조선문제> 같은 문건을 제공했다. 김숙향씨는 이 문건들을 청와대뿐만 아니라 안기부에도 제공했다. 반면에 이연길씨는 김덕홍으로부터 받은 문건들을 평소 알고 지낸 <월간조선> 기자에게 제공햇다. 안기부는 뒤늦게 자신들이 확보한 문건을 <월간조선>에서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씨에게 수거 압력을 넣고 조선일보사측에도 보도 통제를 요청했으나 <조선일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씨와의 면담이 저지된 김숙향씨는 2월 18일께 청와대를 방문해 그 동안의 노고에 대해 치하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김씨는 이 자리에서 안기부의 처사에 강하게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도 김씨는 귀국후 '신변 보호' 명목으로 안기부의 집중 감시를 받았다. 실제로는 김씨를 추적하려는 언론으로부터 차단하려는 목적이었다. 김씨는 안기부에 대한 불신 때문에 평소 친분이 있는 김덕룡 의원을 통해 청와대 경호실 요원의 신변 보호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김씨는 현재 중국에 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연길씨, 93년부터 황씨와 접촉 시도
천보산업 고문이라는 직함을 갖고 대북 무역 중개업을 한 김숙향씨가 여서으로서 '본의 아니게'홍장엽 망명이라는 거대한 공작의 중개인으로 말려들었다면, 또 다른 핵심 중개인 이연길씨는 '자발적으로' 망명 공작에 가담했다. 이씨는 김씨와 달리 안기부와 어느 정도 협조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독특한 이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망명 공작을 저나개했다. 이연길씨가 개입한 과정은 <월간조선>6월호에 자세히 공개된 바 있다.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월남 후 미군 첩보대 KLO(속칭 켈로부대) 지대장으로서 대북 첩보공작의 최전선에서 활동한 바 있는 이씨는 은퇴 후 소규모 사업체를 운영해 오다 중국·소련과 수교한 이후 93년 말에 '민간 차원의 대북 첩보 공작'을 구상했다. 이씨는 94년 봄에 '공작적 차원의 통일 방안'을 내건 북민협이라는 단체를 정식 출범시켰다. 즉 김정일 암살 및 반김정일 세력 지원 등 '공작 차원의 북한 흔들기'를 통해 북한 주민들을 해방시키겠다는 대북 선전 포고였다. 이 단체의 핵심 멤버는 안춘생(안중근 의사의 조카), 최장규(의병장 최익현의 손자), 전태준(안명근 의사의 손자 사위)등 항일 민족주의 성향의 인사들이다. 이씨는 북민협 출범 이후 수십 차례나 중국·러시아를 방문해 공작 활동을 펼쳐왔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황장엽·김덕홍씨 망명 공작이다.

안기부 사정에 정통한 앞서의 소식통에 따르면, 이씨는 93년 러시아에서 투병 중인 이춘배 장군 (전 북한군 4성 장군)을 통해 황장엽씨와 처음 접촉을 시도했는데, 이춘백씨는 이씨의 6촌형으로서 얼마전 우즈베키스탄에서 사망했다. 이후 이씨는 95년 하반기부터 96년초 사이에 북경에서 김덕홍씨를 비밀리에 만나 대화하는 과정에서 '김일성·김정일 세습정권 타도'라는 북민협 활동 목표에 서로 의기투합했다. 이씨는 이후 황장엽씨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김정일 해외 망명 유도 △민중 봉기 유도를 통한 김정일 정권 타도 △비밀결사 조직을 통한 김정일 제거라는 황씨의 시나리오 망명 정부 수립 구상 및 망명 의사를 직접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안기부 조사 발표에서 여광무역회사는 황씨가 이사장인 국제주체재단의 대외 위장 명칭으로 해외 교포 대상 기부금 모금, 무역 중개, 남한 기업인의 재북 가족 상봉 등 각종 외화벌이 사업을 해온 사실이 명확히 밝혀졌는데, 94년 김씨와 처음 접촉한 장승학씨에 따르면 여광무역이라는 이름도 그때 지은 것이다. 장씨는 황장엽씨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장씨의 사촌 형(장승렬)이 황씨와 평양상업학교 동기 동창이어서 황씨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장씨는 "대화 과정에서 망명을 암시하는 분위기를 느꼈었지만 망명 직후 직감적으로 이 작품(망명0은 김덕홍이 만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황·김씨와 접촉했던 인사들에 따르면, 황씨는 자신의 김정일 제거 시나리오가 실현될 가망이 없고 망명 정부 수립을 위한 거점 확보도 여의치 않은 데다 신변 위험이 느껴지자 김정일 체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방버으로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관측이 현재까지는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지난 7월 10일 황장엽·김덕홍 기자 회견을 계기로 망명 동기 등에 대한 일부 의혹은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그러나 안기부 조사 발표에도 망명 개입 등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안기부 공작망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길 없다.

이같은 의혹은 안기부가 망명 공작의 공이 사조직에 돌아가는 것을 저지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안기부가 목숨을 내걸고 망명 공작에 가담한 이연길씨등 북민협 관계자들의 언론 접촉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안기부에 의해 3월부터 부산의 한 호텔에서 연금 상태로 '보호'받고 있다. 이같은 보호는 1차적으로 언론 접촉을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낟. 그러나 이 보호는 본인의 요청이 아닌 안기부의 일방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씨는 얼마 전 딸의 결혼식을 연금 상태에서 비밀리에 치렀다. 이씨 등이 언론과 차단되고 장기 연금되어 있는 동안 황장엽씨를 망명시킨 공을 '독점'한 안기부에서는 제O실 남 아무개 실장을 비롯한 실무자들이 대거 승진했다.

'전략 없는 대북 정책' 여실히 드러나
안기부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에 따르면, 안기부는 황씨의 기자 회견 뒤에야 이씨를 연금 상태에서 풀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기자 회견을 계기로 오히려 '황장엽 리스트'에서 이른바 '황장엽 파일'로 부피가 더 커진 황장엽·김덕홍씨를 접촉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대공 용의점을 수사하겠다는 방침을 밝혀 반발이 예사된다. 상은 주지 못할망정 매를 든 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국가 정보기관인 안기부라는 공조직이 사조직에 밀려 망명 공작에서 소외된 데 따른 '화풀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안기부가 황장엽의 동태를 오래 전부터 주시해 온 것은 사실이다. 권력에서 소외된 자를 먼저 포섭하는 것은 공작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명을 결행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두 민간인 사조직이었다. 안기부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데에는 안기부가 황씨를 유인 공작보다는 포섭할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적극적 개입 인상을 주는 것을 피했다는 관측도 있다. 또 황씨가 안기부를 불신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반드시 지적되어야 할 것은, 김영삼 대통령이 안기부라는 공조직보다 사조직을 더 선호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김대통령은 사조직으로부터 '걸어다니는 주체사상'의 망명 의사를 사전에 인지한 것을 계기로 기존 대북 언착륙 정책에서 공작에 의한 붕괴 가능성을 맹신하는 대북 강경책으로 선회했다는 관측이다. 정보위의 한 소식통은 이같은 관측하는 근거로 96년 에이펙 회담 및 벳푸 정상회담에서 김대통령이 미국 클린턴 대통령과 일본 하시모토 총리에게 내보인 과도한 대북 자신감을 들었다. 당시 김대통령은 마치 '당신들이 북한에 대해 뭘 아느냐'는 식으로 비장의 카드가 있는 것처럼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는 황장엽 망명을 염두에 두고 북한을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다는 지나친 자신감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인다. 한때 북한이 붕괴할 위기에 의해 대통령 선거가 없을지 모른다는 관측이 나돈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황비서 망명을 사전에 인지한 것은 장기적인 대북 정책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황씨의 망명은 결과적으로 김정일에게 충격을 주었을지는 모르지만 남북 관계는 오히려 더 악화했다. 이는 황장엽 망명을 정권 재창출을 목적으로 사조직에 의존해 공작 차원에서 추진해온 '전략없는 대북 정책'이 빚은 당연한 결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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