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철수 들고나온 북한의 속셈은?
  • 오공단(오&해시그 환태평양 컨설팅 대표) (sisa@sisapress.com)
  • 승인 1997.08.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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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자회담 위한 뉴욕 예비회담 중간 평가



4자 회담을 위한 첫 예비 회담이 8월 5일 ~ 7일 뉴욕 컬럼비아 대학 교정에서 열렸다. 96년 4월 제주도에서 한·미 양국 대통령이 공동 제안한 이후 1년 4개월만의 일이다. 이번 회담에서 참가자들은 의제를 최종 합의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예비 회담 타결 후 6주 이내에 본 회담을 열기로 잠정합의했다. 그동안 한국·미국·북한 사이에 이루어졌던 수십 차례의 준비 회담을 영국의 경제 전문 주간지<이코노미스트>는 ‘회담을 위한 회담을 위한 회담을 위한 회담 (Talks for talks for talks for talks)’ 이 끝없이 계속되어 왔다고 논평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예비 회담 6성사 여부도 궁금증을 유발했다. 7월 31일 북한 유엔대표부가 4자 회담에 임하는 성명을 발표하자 대부분의 저널리스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4자 회담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 ‘단단하고 영구적인 한반도의 평화 구축’문제는 이번 회담에서 논의될 것이다. 어떻든 이번 회담은 적어도 네 나라 대표단이 처음으로 자리를 같이 했다는 상징성을 평가할 만하다.

각 국 대표단 단장들은 국가대외 정책을 다루는 외무부나 국무부 관리들로서 한국의 송영식 차관, 북한의 김계관 부부장, 중국의 첸지안 차관보, 그리고 미국 찰스 카트만 부차관보였다. 회담장에는 관련 부서 실무급 전문가들이 배석했고, 정해진 사진 촬영 시간 외에는 기자단과 외부인 참관이 엄중히 통제되었다.

회담 첫날인 5일에는 다루기 쉬운 한인들, 측 4자 회담 본 회담 개최 시기 및 장소, 회담 진행 시 준수사항 등이 논의되었다. 가장 중요한 논제인 정전협정을 학구적이며 안정된 평화체제로 바꾸는 문제는 회담의 후반부로 돌려졌다. 물론 다루기 쉬운 의제라고는 하지만 남·북간 협상이 늘 그랬듯이 개최 시기와 장소를 결정하는 일도 ‘식은 죽 먹기’는 아니었다. 한국이 본 회담을 예비 회담 4주 뒤에 열자고 제안하자 북한은 6주나 지나야 될 것 같다는 식으로 반응을 보였다. 한국 대표단은 4자 회담 자체가 한반도 평화 정착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서울과 평양이 좋겠다고 제안한 반면, 북한 대표단은 뉴욕이나 또는 멀리 떨어진 제3국, 즉 제네바 같은 곳이 더 바람직하다고 맞섰다. 개최 장소는 제네바로 일단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비교적 쉬운 의제가 논의된 첫날과 둘째 분위기에 대해, 처음으로 중국을 대표해 참석한 첸지안 차관보는 ‘지금까지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어 간다고 기자단에게 논평했다. 뉴욕 회담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자단은 첸 차관보가 중립적이면 침착한 태도로 회담에 임했고, 기자들에게 가장 기분 좋게 회담 분위기를 전했다고 보도했다.

중국 대표단 외에도 미국·한국·북한 대표단 역시 회담 분위기와 진행이 실질적인 것같이 느껴졌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럼에도 정작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본 회담 의제가 탁상 위에 올라오자 협상 분위기는 순식간에 각박해졌다. 북한 대표단은 주한미군이 한반도를 떠나는 것이 한반도 평화 정착의 첫 단계라고 주장했다.

미국과 한국은 공동으로 ‘아직은 이론적으로는 전쟁 상태’에 있는 북한과 한국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북한측의 특별조치가 앞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대응했다. 많은 사람이 예상했던 가장 큰 걸림돌이 성큼 협상 테이블 위에 위협적인 존재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이 문제가 가장 시급한 관심사인 만큼 각 대표단 입장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본다.

미국, 회담 성사된 건삼으로 자위
중국 대표단은 남·북한 사이에서 계속 중립적이며 공평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그들 나름의 성명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성명문에서 중국은 ‘한반도 긴장의 근본적인 뿌리가 먼저 제거될 필요가 있으며’ ‘냉전의 그림자가 여전히 한반도를 괴롭히고 있다’라고 지적하였다.

북한은 한반도가 두 조각으로 갈라진 이후 반세기 동안 계속되어 온 긴장의 가장 원천적인 원인은 남쪽에 주둔하는 미군 부대라고 주장했다. 북한 대표인 김계관 부부장은 첫날 개회 연설에서 북한 정부는 미군 철수를 장래 모든 회담의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여긴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은 같은 논지를 계속 펴 왔으며, 미국이 미군 철수 문제와 북한 군사력 감축을 연계하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라고 매도해 왔다.

한국 대표단 부대표인 외무부 유명한 국장은 영구적인 평화 정립과 신뢰 구축을 북한이 심사 숙고해야 할 때라고 밝혔다. 미국 대표단은 워낙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만큼, 이번 예비 회담이 성사된 것으로 자위하는 듯하다. 주한미군 문제 같은 첨예한 문제가 가시처럼 따끔거리기는 하지만, 남·북한 사이에 전화 핫라인을 가동하고, 군사 훈련에 관한 정보를 서로 교환하는 실질적인 문제가 거론된다면 이 회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겠다는 지극히 실리적이고 차분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회담의 전개 과정을 관찰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가장 관심을 끈 대목은 북한의 의도가 무엇인가이다. 한반도 문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외신 기자들이나 심지어는 신문 독자들조차 시간은 점점 더 북한에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년 4개월 동안이나 외면해 왔던 4자 회담을 이번에 받아들인 까닭이 바로 ‘국제 사회로부터 계속해서 긴급 식량을 지원 받기 위한’ 필요성 때문이라는 것도 적나라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상황을 간파한 북한이 좀더 많은 식량과 경제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전략을 쓸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 전략은 실천 가능한, 그리고 상호 동의가 가능한 항복에서부터 점점 다루기 힘든 의제로 이동해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북한은 처음부터 가장 난제라 할 주한미군 문제를 내세우면서 회담 전망을 비관적으로 끌어갔다. 이런 까닭에 북한 연구가들이 그들의 의도를 분석하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다.

몇 가지 잠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첫째는, 북한 군사 전력가들과 전문 관료들 간에는 현대 구미식 전략·군축·긴장 완화 및 신뢰 구축에 대한 개념 정의가 서로 다르다는 관측이다.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엄연히 독립된 주권 국가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아예 논쟁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는 심리가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입장에서는 군사 동맹국 사이에 서로 동의된 약정들이나. 외국 군대 주둔이 전략적 군축 논의 대상이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한국 정부의 수준 높은 대응 필요
두 번째 평가는, 주한미군 철수가 가장 중요한 논제인 만틈, 그리고 현재로서는 철옹성 같은 동맹국 사이의 현실인 만큼, 불가능한 논제부터 따지고 들어 4자 회담을 유산시키지 않으면서 시간을 끌자는 의도라는 것이다. 다른 회담 상대국 등이 그야말로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회담을 완전 포기할 수도 성사시킬 수도 없는 새로운 국면을 전개시킴으로써 국제 사회에는 계속 참여한다는 인상을 주되, 회담 자체는 지리멸렬한 상황으로 이끌어 나가려 한다는 시각이다.

세 번째 평가는, 북한이 계속 주한미군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미국을 자극하고, 결과적으로 워싱턴의 전략 입안자들로부터 ‘이제는 이 문제를 고려할 때가 왔다’는 식으로 유도하자는 의문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꾸 보채면 젖을 주듯이, 계속 주장하면 언젠가 통로가 열릴 것이라는 끈질긴 집념을 보인 것이라는 해석인 셈이다.

이 세 가지 평가 중에서 과연 어느 평가가 북한 의도에 가장 가까운가를 알기는 힘들다. 다만 20년 가깝게 북한 문제를 연구해 온 필자로서는 세 가지 의도 모두 국제 관계와 한민족 내부 관계라는 두 측면에서 부정적인 발상 쪽에 더 가깝다고 판단한다. 해방의 감격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이념과 방법론, 파벌 싸움에 휘말려 한반도는 국내적 분단 요소들을 제공하였다. 당사자들 사이에 서로 협상하지 못하고 또다시 구차스럽게 국제 사회의 이목을 받으며 해방 후와 다를 바 없는 희비극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반도 상황이다.

필자는 특히 한국 지도자들과 전략 정책 입안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4자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주한미군 문제가 계속 대두할 경우, 늘 그래왔듯이 ‘노 코멘트’라든가 ‘되지도 않을 소리’라고 계속 대응할 것인가. 아니면 차원을 한 단계 뛰어넘는 전략적 대응책을 세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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