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보아도 신비한 ‘사람 죽이는 여자’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1998.08.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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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무용수 최승희 회고 붐…텔레비전 · 신문 앞장

케이블 채널 아리랑 TV 제작진은 일본에서의 최승희 행적을 좇느라, 그가 참배하곤 했다는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를 찾았다. 마침 신사 주변에서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제작진은 사람들에게 최승희라는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다. 애써 사람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너도나도 최승희에 대한 기억을 한자락씩 풀어놓았기 때문이다. “흡사 왕년의 대중 스타를 회고하는 듯한 열기였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80~90%는 그의 공연을 본 듯했다”라고 원종선 PD는 말한다. 원 PD는 중국의 취재하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덕분에 그는 백발 할머니가 된 최승희 제자들의 회고담을 카메라에 가득 담을 수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8월 말 아리랑 TV를 통해 방영될 예정이다.

 KBS<일요 스페셜>팀도 9월 방영을 목표로 최승희 특집 다큐멘터리 제작에 나섰다. <초립동> <보살춤> <고구려 무희> 같은 대표작을 선보일 예정이어서 그의 명성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황장엽씨를 비롯해 북한 외교부와 문화성에 근무하던 고위급 인사들에게 최승희의 북한 생활과 최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도 의미가 크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수용소에서 병사했다는 설과 딸 안성희와 함께 중국 국경을 넘다가 발각되어 총살당했다는 설이 있었다. 황장엽씨는 아리랑 TV와의 인터뷰에서 ‘숙청 이후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병사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46년 월북…67년 숙청당해
 <중앙일보>도 최승희 붐에 일조하고 있다. 최근 모스크바에서 입수한 최승희 주연 영화 <사도성 이야기>를 지난 8월8~10일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상영했다. 최승희가 54년에 발표한 동명 무용극을 영상으로 옮긴 <사도성 이야기>는, 북한 최초의 컬러 영화로 당시 최승희의 인기와 세도를 짐작케 하는 작품이다.

 최승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것은, 지난 6월 말 북한 국적인 제일 교포 무용수 백향주의 내한 공연이 성황을 이룬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친일 행적 때문에, 더 직접적으로는 월북 무용수라는 것 때문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예술가에 대한 관심이 뒤늦게,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것이다.

 최승희는 손기정과 함께 한국인의 기상을 널리 알린 스타였지만, 두 사람을 한자리에서 논하는 것은 왠지 어색하다. 최승희는 46년 월북 이후 김일성의 배려 속에, 67년 숙청당할 때까지 북한 무용계를 주도했다. 그의 몰락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지만, 60년대 주체예술론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당의 노선에 따르지 않아 제거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남편 안 막(본명 안필승·문학 평론가)이 숙청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월북 초기만 해도 두 사람의 입지는 어느 누구보다 탄탄했다. 당시 북한은 소련파 허가이 일파와 남로당계 박헌영파, 김일성의 갑산파가 권력암투를 벌이던 시기였는데, 남편 안 막은 갑산파 한설야와 단짝이었고, 최승희에 대한 김일성의 배려도 각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 막은 점차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부르주아적 영웅주의가 심각하다며 작가 송 영이 안 막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춤추는 최승희> 재인용). 가택 수색에서 금괴와 달러가 나오자 안 막은 미국 스파이로 몰렸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월북했지만 권력 투쟁 과정에서 스파이로 몰려 숙청당한 이승화·임 화와 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

 이후에도 최승희는 한동안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 막 숙청 이듬해 <로동신문>에 뒤늦게 ‘최승희의 무용극 <사도성 이야기>는 당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실리고, 이를 신호탄으로 최승희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심지어 김정일은 <무용예술론>에서 최승희를 겨냥해 무용극을 구체적으로 비판했다. ‘인민은 서양식 무용극을 좋아하지 않는다. (혁명)가극 <피바다>나, 연극 <성황당>과 같이 인민의 감정과 정서에 맞는 새로운 무용극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적시했던 것이다. 구체적인 예술 양식까지 지시했던 당의 예술론에 승복하지 않은 최승희는 64년 <옥련못 이야기>를 끝으로 무대에서 사라졌다.

전통 춤 현대화해 세계 무대에서 성공
 67년 숙청된 이후에도 최승희의 예술적 영향력은 지워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눈에 띄는 업적은 무용극의 기틀을 세운 것과, 전통 음악을 발전시킨 것이다. <에헤라 노아라> <초립동> <고구려 무희> 등 단편 소품을 통해 명성을 굳힌 그는, 30년대 말 세계 순회 공연을 거치면서 동양의 무용극, 이른바 ‘동양 발레’에 대한 구상을 가다듬었다.

 그는 규모가 큰 무용극을 위해서는 음악부터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보고 국악 오케스트라를 꾸리는 방법을 찾고 악기 개량에도 적극 매달렸다. 마침 남편 안 막이 국립 음악 대학의 초대 학장을 맡게 되어 작업은 수월했다. <반야월성곡> <사도성 이야기> <노사공>등이 이 시기 대표작이다.

 백향주는 북한의 무용에 대해 ‘대규모 악단과 뛰어난 무대 연출로 종합적인 무대 예술의 면모를 띠고 있다’고 증언한 바 있는데, 일찍이 최승희가 그 디딤돌을 놓았던 셈이다. 최승희 숙청 이후 북한 무용은 당의 노선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급속하게 전락했다.

 이렇듯 말로는 비참했지만 ‘예술가 최승희’가 남긴 유산은 화려하다. 특히 30년대에 그가 세계 무대에서 거둔 성과는 오늘날에도 참고할 만하다. 그가 일본인 스승 이시이 바쿠(石井幕)를 통해 이저도라 던컨 류의 신무용을 배웠으면서도 전통 춤의 특징을 가미해 구미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는 전통 춤에서 핵심만을 취했다. 예를 들어 그의 초기작 <에헤라 노아라>는 ‘허튼 춤’ 계열로 그가 전통을 소화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술 취한 양반이 건들거리는 몸짓에서 모티브를 구한 이 작품은, 흥과 유머를 결합한 소품으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대표작 <보살춤>도 동양적인 매력을 풍긴다. 단상에 못박힌 듯 선 채 팔 동작과 표정 연기, 가끔씩 다리를 비트는 동작만으로 보살의 이미지를 그려낸 것이다.

 그는 한국의 춤뿐 아니라 일본의 가부키, 중국의 경극(京劇)과 곤곡(崑曲·중국 명나라 때의 희곡 유파)에서도 소재를 취했다. ‘제대로 출 줄도 모르면서 춤을 멋대로 변형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최승희는 ‘민속춤을 추자는 것이 아니다’라며 자신의 전략을 고수했다. 전통의 현대적 변용이었던 셈이다. 그의 전략은 해외 공연에서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그의 사진과 작품을 보면 그의 인기에 성적인 매력과 카리스마가 작용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백70㎝가 넘는 키와 무성 영화의 여주인 공처럼 신비로운 미모에 관객은 매료되었다. 집중과 여백의 묘를 살린 무대 연출과 화려한 의상도 주효했다.

 37년 잡지 <조광>은 그의 인기를 ‘최승희는 사람 죽이는 여자다. 그의 무용을 보기 위해 사경을 돌파해 회장에 들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며, 그 능청스러운 포즈에 바보가 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라고 묘사했다. 광고를 찍고 영화 배우로도 활약했던 그는, 요즘 말로 하자면 만능 엔터네이너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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