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문화는 죽었는가
  • 성우제 기자 ()
  • 승인 2006.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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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퇴조와 취업전쟁으로‘진공’상태…“다양성 수렴해 창조적으로 거듭나야”

 5월 대동제 개막제가 열린 지난 19일 서울대 학생회관에는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많은 학생이 남아 이튿날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플래카드를 제작하는 등 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요란한 풍물 소리가 학생회관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에 모지 않게 크게 울리는 노래는 운동가요가 아니라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대중가요<걸어서 하늘까지>였다.  80년대 이후 대학 문화를 주도해온 이른바 운동권에도 대중가요가 ‘먹히기’시작한 것이다.

 학생회관 라운지에서 만난 한 여학생은 “80년대에는 뒤풀이 자리에서 대중가요는 창피해서 못 불렀다고 들었다.  지금은 그 반대이다.  오히려 운동 가요를 부르면 쑥스러워한다.  대중가요의 인기 순위는 대학에서도 만찬가지이다”라고 말했다.  대학 문화의대세가 대중문화를 흡수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 사례는 비단 노래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70년대 대학에서 크게 유행한 탈춤이나 판소리 같은 연회 예술과 80년대초 소비?향락적인 축전을 밀어내고 등장한 대동제 같은 대학만의 독특함이 빛이 바랜 채 90년대의 대학은 ‘문화 진공 상태’를 맞은 것이다.

 70년대 초방 이후 한국의 대학을 지배해온 문화는 정치 억압에 대한 저항을 내용으로 담은 것이었다.  조국 근대화라는 슬로건 아래 전통 가치와 문화를 부정했던 박정희 정권에 대한

 대응 방식으로 대학 사회는 우리 나름의 고유한 가치에 애착을 가졌고, 그 결과물은 전통 탈춤과 판소리, 민요운동 같은 것으로 나타났다.  김흥규 교수(고려대?국문학)는 “물량적 성장을 앞세운 근대화에 대한 지적 대응이 전통적 예술 유산에 대한 열렬한 관심이었다.  70년대 대학 문화는 취미 수준을 넘어 그 안에 사회?정치적 문제의식과 비판을 담았다”라고 말했다.

 70년대보다 더 참혹한 정치 상황을 겪은 80년대의 대학 문화는 그 주류가 문화 운동쪽으로 흘러갔다.  대학 문화는 대학 사회의 주력이 집중된 전투적 정치 운동을 장식하는 주변 역할을 담당햇고 그 형태는 83년부터 전국의 모든 대학에서 진행한 대동제라는 형식, 즉 대학 공동체의 역량을 총결집하는 문화 양식으로 표출됐다.

 80년대말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국내 정치 상황이 변하자 대학의 주류를 이루던 문화는 그 응집점을 잃기 시작했다.  한 가지 음식만 먹다 보니 영양소 결핍 중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93년까지 이어져 온 대동제의 인기가 급락하고 그 자리를 대중문화가 금방 메워버렸다.  총학생회와 동아리(서클), 그리고 학회가 주도하던 진보적인 문화에 적극 참여하지 못한 학생 대중의 욕구가 결국 세련된 상품으로 포장된 재중 문화를 소비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93년의 5월 대동제는, 주도권은 80년대 양식이 쥐고 있지만 대세는 대중문화 쪽으로 가고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27쪽기사 참조). 대학이 대안 문화를 창출하지 못해 소비적인 대중문화에 의해 울타리가 급격하게 무너지는 양상을 보인 것이다.  5개 대학이 밀집해 있는 서울의 신촌뿐 아니라 대학 주변은 거의 예외 없이 소비?향락 문화의 집결지로 변해 버렸다.

 

봉사 서클‘썰렁’취업관련 서클‘부적’

 “80년대까지는 대학 문화가 진보적 흐름을 맡았으나 지금은 주도권을 잃어버렸다. 대학정원이 갑자기 늘어나고 대학생이 지식인에서 대중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즉 대학생이 소명 의식을 갖추지 못하여 개인적 이해와 취향을 존중하고 대세에 휩쓸리는 모습을 가지게 되면서 독특한 문화를 창출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연극 평론가 이영미씨의 이와 같은 지적은 오늘날 대학생들의 급변한 모습에서 쉽게 발견된다.  대학 자체에서“90년대의 대학은 거대한 고급 기능 양성소로 전락했다”는 목소리가 불거져 나올 만큼 대학생은 변하고 있다.  92학번이 다르고 93학번이 다르다. 역사적 소명 의식이나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경향이 점점 두드러지는 것이 오늘날 대학 사회의 모습인 것이다.  서울대 장원호(경제3?노래 동아리‘메아리’회장)은 “90년대에는 대학 문화가 없다.  전체 사회 내에서 대학이 가지는 위치와 학생 운도의 질적 발전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대학 문화는 기반을 잃어버린다”라고 말했다.

 90년대 대학생에게는 수업과 성적, 그리고 취업 준비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없다.  어느 대학을 막론하고 출석률은 거의 1백%에 이르고 있으며, 연세대 등 극히 일부 대학을 제외하고는 동아리에 3D(dirty, difficult, dangerous)?3C(conversation, compu-ter, car)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총학생회가 구성되기 전부터 대학 문화를 주도해 오다십피 한 동아리에서 일어나는 이 같은 현상은 야학?농활?공부방 같은 봉사 서클과 학술 이념 서클들을 존폐 위기에 몰아넣고 있다.  농활 동아리인 고려대 자진근로반의 복학생 정성모군(행정 3)은 “작년부터 신입생을 유치하는 일이 가장 힘든 일이 되었다.  자기에게 당장 이익이 안되면 금방 나가버리기 때문에 신입생은 마치 유리잔 다루듯이 대해야 한다”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서울대의 퇴조 기미가 있는 학술분과 동아리들이‘정치투쟁이 중심체’에서 ‘독자성 강화’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정체성과 전문성을 확보하려는 음직임을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4~5명의 신입생을 받아 명맥을 겨우 유지하는 학술?봉사 동아리와는 반대로 실질적 이익을 금방 채워주는 컴퓨터와 영어회화 동아리는 신입생들로 들끓는 다.

 학생회관의 동아리를 찾던 발길들은 이제 개인은 있고 문화는 없는 도서관으로 향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험 기간에만 자리가 찼던 대학 도서관은 평상시에도 새벽부터 빈자리가 없다.  ‘메뚜기’(책만 있고 주인이 없는 자리를 이용하는 학생)들도 이제는 거의 ‘멸종’됐다.  서울대 도서관과 총학생회가 지난 5월6일, 자리를 비울 경우 메모를 남겨 ‘메뚜기’들이 마음 놓고 그 자리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3시간 이내에 돌아올 수 없을 때는 가방을 들고 나가야 한다는 등‘ 좌석 독점 금지를 위한 세부 실천 사항’을 마련한 것은 도서관 자리 잡기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말해준다.

최대 관심 ‘취업’…“고등학교와 똑같다”

 대학 문화를 보급하는 창구였던 학생회관에서 강의실과 도서관으로 그 중심이 이동된 대학 부위기는 ‘취업 전쟁’이 빚어놓은 결과이다.  대학생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사회 공동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취업이다.

 고려대 신문방송연구소가 지난 4월에 실시한 ‘93년 고대생의식구조’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현재 대학생이 가장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진로?직업 문제’(45.6%)였고, ‘정치무제’라고 답한 학생은 1.5%밖에 안되었다.  비중을 두어 공부하는 것은 ‘어학 공부’(24.9%)와 ‘취직?고시 공부’(20.9%)였다.  서울대 총학생회가 발행하는《월간 자주관악》4월호는 서울대에 불고 있는 고시 열풍이 취업난과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고시 합격자의 사회적 안정도가 고시 지망생을 2천여 명에 이르게 했다는 분석이다.

 대학생의 머리를 짓누르는 취업이라는 무거운 돌덩이는 대학을 고등학교 같은 치열한 경쟁터로 만들어 문화가 차지할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때로는 개인에게 교양을 쌓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 다.  “대학에 입학하면서《토지》같은 대하소설을 한 학기에 한 편씩 읽으려 했지만 2학년이 된 지금도 못보고 있다.” 이화여대의 한 학생은 수업이 끝난 뒤 반 정도가 영어 학원으로 달려가는 동료들을 보면 마음의 여유를 찾을 겨를 없이 휩쓸려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자기에 금방 이익을 주는 부분에만 집착하고 그 나머지에 시간을 바치는 것은 손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사회 구조가 마뀌지 않는 한 대학의 고유문화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현재의 대학 모습을 이렇게 진단한 이화여대 대학원 박사과정의 박현선씨(사회학)는 고등학교와 대학이 이제는 단절을 모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부모가 수련회(MT)출발 장소까지 따라오는가 하면 성적이 나쁘게 나왔다고 담당 교수를 찾아와 재시험을 요구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대학 문화는 운동권의 퇴조와 취업 전쟁, 그리고 개인주의가 대량 유포된 것과 맞물려 희생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90년대 초반의 이 같은 모습을 과도기 혹은 질적 전환기라고 규정하는 견해도 많다.  80년대는 획일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어서 오히려 대학 문화가 더없었다고 보는 연세대 김형철 교수(철할?《연세춘추》주간)는 “90년대 들어 획일적 문화에 만족하지 않는 학생들이 대중문화의 타락한 측면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대학 문화는 없고 대학가 문화만 있는 지금은 학교 당국과 총학생회측에서 의견을 수렵해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김교수는 도 “지금은 정상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다.  대학 문화는 수업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행적 입시 교육에서 갓 벗어난 신입생들 위해 대학 교양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수업을 전개하는 방식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총연극회 회장 김주은양(지리교육 3)은 한 학기에 한번씩 공연하던 것을 이번학기에는 하지 않고 워크솝을 계획하는 등 역량을 축적하는 데 힘쓰고 있다고 밝혔다.  “대학은 더 이상 성역이 아니다.  대중문화의 건강하지 못한 부분이 계속 밀려들고 있다”라는 그의 문제의식은 지금 대학 사회 전체를 고민하게 하고 있다

 대학 신문들이 다투어 90년대의 대학 문화 부재를 문제로 삼고, 총학생회와 동아리들도 대학가에 만연한 소비문화를 추방하기 위한 노력을 다각도로 기울이고 있다.  이런 움직임이 계속되고 세대차보다 더 벌어진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틈새가 매워진다면 90년대식의 참신하고 건강한 대학 문화를 기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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