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나팔’이 신음하고 있다
  • 정선태(국민대 교수 · 국문학) ()
  • 승인 2006.05.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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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지난 3월 집들이하던 날, 친구는 거실에서 키우기에는 어울릴 성싶지 않은 큼지막한 화분 하나를 선물했다. 이름이 뭐냐고 물었더니 ‘천사의 나팔(Angels Trumpet)’이라 했다. ‘천사의 나팔’이라··· 썩 매력적인 이름이었다. 인터넷 검색 사이트를 뒤져보니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남아메리카 원산의 상록 저목(樗木: 가죽나무). 나팔 모양의 긴 꽃이 아래를 향해서 피며,  저녁 8시경부터 꽃잎을 활짝 펴고 달콤한 향기를 발산한다.’ 그렇게, 고향인 남아메리카를 떠나 비싼 값에 팔려 이 후미진 곳까지 찾아든 이국적인 취향의 식물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주거 형태 중 하나라는 아파트에서 함께 살게 된 이 식물은 며칠이 지나자 이름에 걸맞게 풍성한 잎사귀 사이로 나팔 모양의 노란 꽃을 피웠다. 한두 송이가 아니었다. 자고 일어나면 지난 밤까지만 해도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던 꽃송이가 고개를 숙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코끝에 와 닿는 특유의 ‘달콤한 향기’도 싫지만은 않았다. 소리 없는 향기로 말을 걸고 싶었던 것이리라. 아니, 들리지 않는 나팔 소리를 향기에 실어 전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환각이었는지, 환청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어쩌다 거실 한쪽에 놓인 ‘천사의 나팔’ 아래서 잠들었을 때 나는 아래로 고개를 떨어뜨린 꽃들이 얼굴을 부비며 웅성대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녀석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제법 무성했던 잎이 다투어 떨어지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에 듬성듬성해졌고, 마침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밖에 남지 않았다. 간신히 싹을 틔운 새잎들도 고개를 내밀기가 무섭게 시들어버렸다.   

‘상식’에 따라 나는 비료를 섞은 물도 주고 집 안에서 햇빛이 가장 잘 드는 곳으로 자리도 옮겨 주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소중하다’는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처럼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나는 ‘천사의 나팔’을 돌보았다. 그러나 녀석은 나의 애틋한(?) 보살핌에도 아랑곳없이 하루하루 빛을 잃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서운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이렇듯 알뜰하게 챙기는데도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다니. 아무런 잘못도 없는 ‘천사의 나팔’을 향한 나의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생명이 지닌 고유한 리듬과 호흡을 무시했으니…

도대체 왜 이러냐고 조경사에게 물었더니 빛과 바람이 부족한 데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렇단다. 왜 몰랐을까. 식물들에게도 각기 생명의 호흡과 리듬이 있다는 것을. 싹을 틔울 때가 되어야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때가 되어야 꽃을 피운다는 것을. 잎은 떨어질 때가 되면 떨어지고, 꽃은 질 때가 되면 진다는 것을. 그리고 생명인 까닭에 새로운 곳에 적응하기까지 그 나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아는 너무나 당연한 ‘순리’를 나는 왜 몰랐던 것일까.   

정작 나는 무성한 잎과 풍성한 꽃이 뿜어내는 향기에 취해 ‘천사의 나팔’이 타전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이다. 생명이 지닌 고유한 리듬과 호흡을 무시한 채,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시선과 상식에 따라 ‘다투라(이것이 녀석의 이름이었다!)’라 불리는 ‘천사의 나팔’을 길들이려 했던 것이다. 뿌리가 썩어가는 줄도 모르고 물을 퍼부었으니 녀석의 고통이 오죽했을까. ‘애완 식물’ 다투라가 불어대는 나팔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아마 내가 녀석의 타전에 응답하지 않는 한 영영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천사의 나팔’은 머나먼 곳 콘크리트 벽 사이에서 신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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