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막막한 슬픔, 놓치지 말라
  • 김봉석(영화 평론가) ()
  • 승인 2006.09.22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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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타락천사> 합본

 
1990년대에, 영화 좀 본 사람치고 왕가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열혈남아> <아비정전> <동사서독>에 한번쯤은 매료되었어야, 비로소 영화광 축에 끼인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중경삼림>을 보고 나면 누구나 왕가위를 좋아하게 되었다.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배경음악으로 흐르면서, 스텝 프린팅이란 편집 기법을 이용해 도시인의 막막한 일상을 마치 꿈속의 풍경처럼 그려낸 <중경삼림>은 수많은 아류작을 낳은 걸작이었다. 1국 2체제라는 불안정한 미래 속에서 살아가는, 이미 유통 기한이 지나버린 사랑을 꿈꾸는 남녀의 만남을 그린 <중경삼림>은 홍콩인만이 아니라 현대인 모두가 공감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중경삼림>이 좋았다. 실연한 남자들은, 유통 기한 날짜가 동일한 통조림을 사 모으거나 비누나 곰 인형 같은 집안의 물건들에게 말을 건다. 쓸쓸한 여자들은 남자의 집에 숨어 들어가 청소를 하거나, 언제 비가 올지 몰라 늘 바바리코트를 입고 다닌다.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뭔가를 대체하거나, 단지 외로워서 시도하는 사랑은 늘 어긋난다. 하지만 이별의 편지를 남기고 떠나갔던 왕정문은, 스튜어디스가 되어 다시 양조위에게 돌아온다.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졌을까? <중경삼림>의 매력은, 그런 미래가 궁금하지 않게 만든다는 점이다. 왕가위는 단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일상의 무게를 견디어내는 법만을 보여준다.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왕가위는 <화양연화>에서 ‘과거’를 그리워하지만, <중경삼림>에서는 과거가 아닌 현재와 ‘드리밍’만을 보여주었다.

<중경삼림>보다 <타락천사>가 좋은 이유

 
그런데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중경삼림>보다 <타락천사>가 더 좋았다. 누구나 범작, 혹은 불완전한 작품이라고 부르는 <타락천사>에 나는 진정으로 매혹되었다. 왕가위의 영화는 영화제용, 아시아용, 유럽용 등 판본에 따라 편집이 다른 것으로 유명하다. 나는 <타락천사>를 한국 극장에서 상영된 것과 다른 판본으로 먼저 보았다. 여명이 기억을 잃은 킬러 지명으로 나오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가흔이 살인 지령을 전하는 과장으로 나온다.

그들의 관계는 기묘하다. <중경삼림>에서 양조위의 방에 숨어 들어간 왕정문처럼, <타락천사>의 이가흔도 여명의 방을 치운다. 여명이 누군가를 죽이는 그 시간에. 비슷한 설정이지만, 느낌은 정반대다. 왕정문은 양조위의 방을 다른 무엇인가로 채워준다. 하지만 과장은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지명의 침대에 누워 자위를 할 때에도, 아마도 그녀는 그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생각한다 해도, 언젠가 그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명이 킬러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과장은 그를 죽여 버린다.

내가 본 판본에서, 지명의 침대에서 과장이 자위를 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이내 바깥으로 빠져버린다. 과장의 소리는 들리지만, 카메라는 빈 침대 한쪽 구석만을 보여줄 뿐이다. 거기에는 실체 같은 것은 없다. 빠르게 지나가는 도시의 불빛처럼, 아무 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 것도 애원하지 않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이 장면은, 지금도 선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런데 이후에 본 비디오나, 극장에서는 이 장면을 다시 보지 못했다. 그래서, 어쩌면 그 컷이 내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나는 그 장면을 다시 만나고 싶다. 그 막막한 슬픔을 다시 맛보고 싶다. 이번에 다시 나온 DVD에는 있을까? 그렇다면, 기다림이 헛된 게 아니라는 증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중경삼림>의 양조위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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