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 출산은 법으로도 못 막네
  • LA· 오종수(현지 언론인) ()
  • 승인 2006.12.26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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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국적법 발효 후에 더 늘어, 2006년 만명 넘을 듯…미국 정치권, 제재 움직임

 
2005년 5월 발효된 ‘신국적법'은 영주 목적 없이 외국에 체류하던 부모에게서 출생한 남성들의 국적 이탈 권리를 제한하도록 규정했다. 병역을 마치거나 면제 판정을 받아야 다른 나라 국적을 선택할 수 있도록 못 박은 것이다.

 병역 기피 목적으로 이른바 ‘원정 출산’ 등 편법을 이용해 자녀가 외국 국적을 갖도록 하는 현상이 확산되는 흐름을 막아보자는 정치권의 강경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 법은 위헌 논란 끝에 2006년 12월 초 합헌 판결을 받았다. 그럼 과연 이같은 조치 이후 원정 출산은 사라졌을까?

한국인 산모들의 원정 출산지로 가장 각광받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이런 현상이 없어지기는커녕, 일부 부유층뿐만 아니라 중산층까지 확산되면서 현지인들의 지탄을 받고있다. 이곳 한인타운 인근의 한국계 병원과 산전·산후 조리원 등은 요즘도 원정 출산 대기자들이 줄을 이을 정도로 성업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관계자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원정 출산이 미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2002년 당시 연간 5천여 명으로 추산되었던 원정 출산자가 매년 지속적으로 상승해 올 연말에는 만명 선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이는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보스턴, 하와이, 괌 등지의 병원을 이용한 원정 출산 산모들의 수를 모두 합친 결과이다. 이 수치만으로도 연간 태어나는 한국 신생아 수의 2%를 넘어선다. 그러나 친지를 방문해 아이를 낳거나, 유학, 연수, 해외 근무 기간에 맞춰 출산하는 한국인 산모까지 포함하면 실제 원정 출산의 숫자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LA 대형 병원 산모의 40%가 한국인

이렇게 시장이 커지면서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주택가에까지 조리원 등 관련 시설이 들어서, 지역 주민들과 소음·교통 문제로 종종 마찰을 빚기도 한다. 얼마 전 로스앤젤레스 시내 고급 주택가인 핸콕파크 주민 대표 10명은 시의회에 산전·산후 조리원 2곳의 불법 행태를 조사해달라고 신고했다. 시 당국은 조사 결과 한국인 업주 서 아무개씨가 주거 지역에서 불법 영업 행위를 하고 있는 점을 확인하고 시정 명령을 내렸다. 연방 이민당국은 로스앤젤레스 일대의 이같은 움직임에 주목해 한국인 산모들의 관광비자 ‘악용’ 여부에 대한 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12월 초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 내 대형 병원에서 사내아이를 낳은 후 인근 B조리원에 머무르고 있는 윤아무개(27)씨는 한·미 양국 정부 당국의 제재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윤씨는 한국에서  자녀가 교육을 받고 취업하기까지 왕따,입시지옥,학교 폭력 등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면 너무 무섭다며 “미국 시민권은 내 아이에게 최소의 비용으로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라고 덧붙였다. 그가 말한 ‘최소 비용'은 대략 1만5천~2만5천 달러 선이다.

이는 산부인과 입·퇴원과 분만, 산후조리에 드는 비용에다, 조리원들이 제공하는 체류 기간 중의 세탁 및 식사, 미국산 아기옷과 젖병 등 신생아 용품 구입비를 포함한 금액이다. 시민권 신청 등 서류 절차도 조리원과 연계된 업체들이 대행해준다.

 진료와 분만은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가 담당하며 조리원 및 숙소 관리자 역시 한국인이다. 로스앤젤레스의 대표적 대형 병원인 굿사마리탄 병원은 의료진의 30%, 산모의 40%가 한국인이다. 최근 차병원 그룹이 인수한 할리우드 차병원에서는 분만 후 미역국도 먹을 수 있다.

대부분 한인들이 운영하는 로스앤젤레스 인근 산전·산후 조리원들은 마케팅 경쟁이 치열한 업종이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어 홍보하기도 하며, 각종 인터넷  포털 및 동호회 사이트들에 링크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내 산부인과 및 전문업체들과 연계하기도 한다.

 
 원하는 성별의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부모들이 미국에 오기도 한다. 한국과 달리 미국 대다수 지역에서는 태아의 성별을 감별하는 행위를 규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5년째 조리원에서 일하고 있는 제인 권 씨(51)는 “어차피 원정 출산의 주요 목적이 병역을 피하자는 것이고, 미국에서는 성별을 확인한 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이점도 있기 때문에 일석이조이다. 남아 출산율이 80%에 이른다"라고 설명했다.  

권씨에 따르면 한국인 부모들이 미국에서 원정 출산을 하는 이유는 이밖에도 다양한다.
산모들은 병역 기피와 해외 재산 도피, 조기 해외 유학, 한반도 유사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미국행을 결정하고 있다.

재산 도피·이민 교두보 마련용 원정 출산도

조기 영어 교육을 하자면 비용도 만만치 않고 조기 유학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아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체류 신분 문제나 저렴한 교육비 등 여러 면에서 유리하다는 것이다. 또한 원정 출산으로 낳은 아기는 21세 이후에 가족을 초청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므로 이들을 가족 이민을 위한 교두보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이밖에 시민권자 아이가 가진 소셜 시큐리티(사회보장) 번호로 은행 계좌를 개설해 해외에 재산을 예금할 수 있고,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제인 권씨는 “몇 년 전만 해도 미국 와서 아이 낳는 것이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회사원, 공무원, 교사 등 평범한 여성들은 물론 악착같이 비용을 깎으려는 보통 주부들도 있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미국 정치권에서는 원정 출산에 이은 불법 체류 등으로 사회 문제가 커지고 있는 현실에 주목해, 미국에서 출생한 아이들에게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던 제도를 바꿀 것도 고려하고 있다.

미국은 현재 속지주의 원칙에 입각해 미국내 50개 주와 괌 등 미국령에서 태어난 신생아에게 자동으로 시민권을 부여하고 있다.  정치권은 한국과 멕시코 등 일부 국가의 산모들이 이를 악용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공화당의 네이선 딜 하원의원은 “불법 체류 외국인들이 미국에서 태어나 시민권을 획득한 아이와 함께 거주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미국에 체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라면서 시민권 부여를 제한하는 내용의 법안을 최근 의회에 제출했다. 하원의원 80여 명이 이 법안에 공동 발의자로 참여했다.

이 법안은 중간선거 이후 ‘의회의 회기가 끝나면서 일단 유명무실화되었지만, 2007년 새 의회가 열리면 언제든지 다시 논의될 수 있다고 연방의회 관계자들은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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