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한 강경 투쟁은 지독한 상처만 남긴다"
  • 정락인 편집위원 ()
  • 승인 2007.05.21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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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파업 상생 기업 늘어…“찻잔 속의 평화” 분석도

 
올해의 노사 관계는 예년과 전혀 다른 분위기다. 대립보다는 화합과 평화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노조가 파업이라는 극단적 상황을 피하면서 노사 상생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파업이 아닌 대화와 타협을 선택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노사 분규는 급격히 줄었다. 노조의 잦은 파업으로 막대한 경영 손실과 사회 손실을 가져왔던 지난날과는 대조적이다. 최근까지 노사 화합을 선언한 기업이 100곳을 넘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노사 화합을 외치는 사업장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엄청난 변화이다. 경제계 일각에서 ‘노사 평화의 시대가 돌아왔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노사 상생 분위기는 유행처럼 전국으로 번지고 있다.


“노조는 하이닉스의 감추어진 경쟁력”


한때 강성 노조로 이름났던 기업들의 노조에서 더 적극적이다. 극심한 노사 갈등의 쓰라린 경험을 안고 있는 기업들이다. 민주노총의 대표적 강성 노조였던 코오롱 노조가 노사 화합의 상징적 모델로 주목되고 있는 것도 한 예이다. 코오롱 노조는 ‘회사와 함께 살겠다’라며 상생을 선언했다.
김홍열 노조위원장은 “회사가 없으면 노조도 없다. 파업으로 남은 건 상처뿐이다. 앞으로는 회사와 공존 공생하겠다”라고 밝혔다.
GS칼텍스, 한국바스프 여수공장 등 대기업 노사는 최근 잇따라 임금 동결에 합의했다. GS칼텍스는 노조가 먼저 회사에 임금 동결을 제안하며 화합의 손을 내밀었다.
현대중공업 노사는 12년 연속 무쟁의로 노사가 상생의 길을 걷고 있다. 계속되는 파업으로 회사가 경영 위기에 닥치자 노사가 손을 잡고 위기를 이겨냈다. 현대중공업 노사는 최근 사랑의 장기 기증 운동을 펼쳐 임직원 6천2백17명이 장기 기증 서약에 참여했다. 단일 행사로는 최다 인원이 참가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또 울산 동구 지역 노인 1천5백여 명을 초청해 경로 위안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LG전자는 올해로 17년째 임단협 무분규 타결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LG전자 노사는 올해 대졸 사무직 직원 임금을 8년 만에 처음 올리지 않기로 합의했다. LG전자 역시 1987년과 1989년에는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노사 분규를 겪었다.
동국제강도 마찬가지다. 1994년 항구적 평화 선언을 한 뒤 올해까지 13년간 노조가 임금 협상을 회사에 위임했다. 동국제강은 1980년 부산공장 파업으로 생산 라인이 멈추어 섰다. 1991년에도 파업이 일어나면서 경영 위기에 몰렸다. 유가가 치솟아 회사가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노조는 ‘우선 회사를 살려야 한다’며 강경 투쟁을 접었다. 동국제강 노조는 지난 식목일에는 노사 화합 차원에서 나무 심기 행사를 가졌다.
반도체 단일 회사로는 국내 최대인 하이닉스반도체도 예외가 아니다. 1983년 경기도 이천에서 현대전자로 창립한 이래 23년간 한 차례도 노사 분규가 벌어지지 않았다. 김종갑 하이닉스반도체 사장은 노조를 가리켜 회사가 난관을 돌파할 수 있었던 ‘회생의 공신’이자 ‘감추어진 경쟁력’이라고 밝힌 바 있다. 김사장은 스스로 노사팀장을 맡겠다며 노조와의 적극적인 대화를 강조했다.

 
“노조, 투쟁 결과 미미하자 상생 택했다”


 
지난해 ‘옥쇄 파업’으로 유명한 쌍용자동차 노조도 상생의 길을 택했다. 고용 안정을 전제로 올해 임금 교섭 과정에서 파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정일권 노조위원장은 지난 4월5일 서울모터쇼에 참석해 “회사 경영 정상화를 위해 노사 화합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겠다”라고 말했다. 이에 최형탁 사장도 “상생의 동반자로서 노조와 신뢰 관계를 구축하겠다”라고 답했다.
포스코는 지난해 포항 지역 건설노조의 장기 파업으로 포항제철소 출입이 금지된 노조원 89명 중 57명의 출입금지 조처를 해제했다. 노사 화합 차원에서다. 이들 57명은 노조 파업 때 비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극단적 파업 행위에 대해 반성의 기미가 보인다는 정상을 참작했다.
포스코 외주 파트너사인 (주)피앤피는 포항 지역 기관장과 직원 가족 3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구 임금 무교섭 및 영구 노사 평화 선포식’을 열었다. 무분규·무파업·무쟁의로 근로자와 회사가 상생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대한항공 노조는 올해 임금 교섭 전권을 회사에 넘겼다. 또 올해 초 동양그룹에 인수된 한일합섬 노조도 올해와 내년 2년 동안의 단체 교섭권을 회사에 위임했다. 농기계 제조업체인 국제종합기계 노조는 8년째 임금 협상을 회사에 위임했다. 노사 상생 협력을 위한 선언식도 가졌다. 노조가 임금 및 단체 협약권을 회사 쪽에 위임한 것은 2002년 이후 6년째다.
이처럼 산업계의 노사 평화 선언이 잇따르면서 노사 관계의 새로운 이정표가 만들어지고 있다. 양대 노총도 파업보다는 대화를 우선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은 취임 때 “파업을 위한 파업을 벌이지 않겠다”라고 약속했다.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또한 노사 관계 토론회에서 “과거 우리 사회에는 노사 관계 패러다임이 없었다”라며 새로운 노사 관계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 전문가들은 노조의 변화에 대해 ‘현실론’이 작용했다고 분석한다. 지난해 총파업 등 강경 투쟁을 벌였지만 실질적으로 얻은 것은 별로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또 파업에 대한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했다는 분석도 있다. ‘회사가 있고 노조가 있다’라는 진리를 깨우쳤다는 얘기다.
 
노동계 일각에서는 노사 상생 분위기에 대해 ‘찻잔 속의 평화’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대부분 사업장의 임금단체협상(임단협) 교섭이 본격화되는 5월 말부터 7월까지 지켜보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노사 협상이 진행되면서 파업이 생길 우려가 있다는 시각들이다.
경제 단체 노사 문제 담당자는 “산별 노조 협상이 6월에 들어가면 노사 갈등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 비정규직 법안의 정식 발효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연말 대통령 선거 등 대형 정치 이슈와 맞물려 있어 언제든지 파업 형국으로 바뀔 수 있다”라고 분석했다.
노동조합은 노사 간 원활한 의사 소통의 통로라기보다는 노사 갈등의 창구가 되다시피 했다. 노사 갈등은 파업 등 분규로 표출되었다. 엄청난 사회·경제적 손실을 가져온 것은 물론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노사의 화해 무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평화 무드가 노사 화합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아직도 곳곳에서 평화의 암초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화와 타협만이 살 길이라는 진리를 노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새롭게 변화된 노사 관계를 효율화할 수 있는 조정 시스템도 구축되어야 한다. 기존 분쟁 유형과는 다른 새로운 갈등이 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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