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잊지 말되…
  • 조재민 (자유 기고가) ()
  • 승인 2007.07.23 14:3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증오 사라진 베트남, 전흔 지우고 미국인들에게도 호의적
 

 케네디는 “적을 용서하되 잊지는 말라”고 했다. 미국과 30년 전쟁을 치른 베트남인들이 케네디의 경구를 실천하고 있다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이다. 베트남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도처에서 전쟁의 상징물들과 만난다. 특히 호찌민 묘소에 가면 그가 아직도 살아서 전쟁을 지휘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쟁의 흔적은 남아 있으나 증오는 사라졌다. 하노이를 방문한 미국인들은 대개 전쟁기념관을 먼저 방문할 계획을 세운다. 베트남 전쟁의 잔영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계획은 은연 중 변경된다. 호찌민 묘소로 발길이 먼저 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장사진을 친 채 입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참전한 사람들이나 반전 시위에 가담한 사람들이나 모두 표정이 평화롭다. 
호찌민 묘소는 하노이 바딘 광장에 있다. 거대한 회색 건물은 냉방이 잘되어 있다. 그의 유해는 유리 속에 안치되어 있다. 흰색 유니폼을 입은 4명의 군인이 지키고 있다. 1969년에 사망한 그는 화장을 해서 베트남의 북부·중부·남부 세 곳에 유골을 뿌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한 자신을 기념하는 어떤 화려한 건물도 짓지 말라고 했다. 화장을 하라는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으나 거창한 기념관을 짓지 말라는 유언은 잘 지켜졌다. 

전쟁기념관 있어도 ‘반미’는 없어
호찌민 묘소 근처에 있는 대통령궁은 호찌민의 체취가 더 많이 묻어 있는 성역이다. 1954년부터 사용했던 식당과 책상이 옛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집무실에는 레닌과 마르크스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깨끗이 닦은 책상에는 몇 권의 책이 놓여 있다. 당시의 모습에서 변한 것은 거의 없다. 호찌민이 이곳에서 지극히 검소하게 살았다는 안내 책자의 설명은 실감이 난다.  
방문자들을 가장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은 프랑스와 싸운 독립전쟁(1946~1954)이나 미국과 싸운 통일전쟁(1964~1973)에 대한 언급이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노이의 거의 모든 곳에서는 이 전쟁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으로, 베트남에서는 미국 전쟁으로 알려진 그 유명한 전쟁에 관한 말이 일절 없다. 미국인들이 전쟁기념관을 보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거기에는 파괴된 미군 탱크와 전투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행자들은 잠시 혼란에 빠진다. 이 전시물들이 적에 대한 증오를 암시하는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월맹군으로 10년간 복무한 바오 닌은 <전쟁의 슬픔>이라는 소설을 통해 왜 그 참혹한 전쟁을 했는지 근본적인 회의를 나타내고 있다. 전쟁이 베트남에 가져다준 것은 무엇이며 그래서 달라진 점은 무언인지를 젊은 베트남인들에게 물어보라고 그는 소설 속에서 다그친다.
호텔의 상점이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젊은 남녀 직원들은 서투르나마 영어를 조금 할 줄 안다. 그들과 대화를 해도 베트남 전쟁에 대한 명분이나 공감을 찾을 수 없다. 방문자가 자신의 신원을 미국인이라고 밝혀도 직원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여전히 미소를 짓는다. 지난 반세기 일본, 프랑스, 미국, 캄보디아 그리고 그들 자신과 싸운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 슬픈 역사를 과거사로 돌린 듯하다.
그러나 전쟁을 상기시키는 흔적은 시퍼렇게 살아 있다. 하노이 구시가지에 가면 전쟁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음악이 흐른다. 군가들이다. 초라하게 그린 포스터들은 침략자들과 싸우는 농민, 군인,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선전 포스터들은 주로 미국과의 전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떤 포스터는 거대한 주먹으로 미군기를 박살내는 광경을 보여준다. 미군기들이 어린이의 머리 위로 폭탄 세례를 퍼붓는 광경을 그린 포스터는 미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그들의 표정 어디에서도 증오가 없다. 
미국은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인도차이나로 갔다가 실패했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미국인들은 사회주의 치하의 베트남에서 환영을 받고 있다. 뉴욕 타임스 기자의 하노이 르포 기사는 역사에서 무슨 교훈을 배워야 하는지 암시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