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심의, ‘정사’ 풀고 ‘폭력’ 죄고
  • 반도헌 (bani001@sisapress.com)
  • 승인 2007.11.03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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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에 자의적 판단은 없다” 주장…‘검열’ 논란은 아직도 진행 중

 
이안 감독의 새 영화 <색, 계>가 국내에서 청소년관람불가 등급 판정을 받은 대신 무삭제 상영이 가능하게 되었다. <색, 계>는 파격적인 성 묘사로 인해 미국에서는 최고 등급인 NC-17등급(17세미만 절대 관람 불가)을 받았고 중국에서는 30여 분이 삭제된 채 개봉했다.
이안 감독은 이 작품으로 <브로크백 마운틴> 이후 2년 만에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인 황금사자상을 다시 거머쥐었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각자 가정을 가진 카우보이 두 명의 애절한 사랑을 파격적으로 그려냈던 이안은 <색, 계>에서는 국가를 배신한 변절자와 그를 살해하고자 접근한 스파이의 사랑을 감독 특유의 건조한 시선과 적나라한 성적 묘사로 그려냈다. <와호장룡>으로 호흡을 맞춘 이안 감독과 프로듀서 빌 콩이 다시 한 번 손을 잡고 내놓은 작품이다.  

<색, 계> 정사 신, 당위성 인정 받아 무삭제

<색, 계>는 특무대장으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양조위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위장 접근하는 탕웨이가 서로에게 끌리면서 겪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의 무삭제 개봉이 관심을 끄는 것은  파격적인 정사 신 때문이다.    <색, 계>는 작품의 완성도나 예술성이라는 측면 외에도 남자 주인공 양조위와 여자 주인공 탕웨이의 정사 장면을 말 그대로 적나라하게 묘사해 베니스영화제에서 공개된 직후부터 많은 화제를 뿌렸다. 특히 정사 장면에서 탕웨이의 음모와 양조위의 고환이 노출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어 원본 그대로 수입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되었었다.
<색, 계>에서 정사신은 두 주인공의 관계와 감정의 변화를 나타내주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영화는 주인공의 감정 변화를 세 번의 정사 신에서 각기 다른 묘사로 표현하고 있다. 홍보 관계자에 따르면 정사 장면이 영화의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고 선정적으로 묘사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한 상영가 판정을 받지 않고 무삭제로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의 관계자 역시 “<색, 계>가 음모 노출·성기 노출 등 과한 묘사 장면이 있지만 정사 신이 영화를 전개해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묘사의 필연성·당위성을 갖췄기 때문에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감독의 명성과 영화제 수상 경력이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가 하는 지적에 대해서는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에 긍정적인 부분이 있겠지만 그런 요인은 참고 사항일 뿐 등급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라고 밝혔다.

 
<색, 계> 이전에도 성 묘사에 대해 전향적인 판단이 내려진 경우가 종종 있었다. 1992년작인 닐 조던 감독의 <크라잉 게임>은 남성의 성기가 적나라하게 노출된 장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어 화제가 되었다. 성기 노출 장면이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여주인공(?)이 트랜스젠더임을 밝히는 결정적인 장면이었고 선정적으로 묘사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무삭제 개봉한 것이다.
전혀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는 두 자매의 첫 경험을 다룬 영화 <팻걸>은 여성의 음모가 노출되었음에도 제한 상영가를 피해 일반상영관에서 개봉함으로써 성적 표현에 대한 기준이 유연해졌음을 보여주었다. <팻걸>은 여성의 성을 적나라한 묘사로 가감 없이 드러내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로망스>를 만들었던 프랑스의 여성 감독 까트린느 브레이야의 작품이다.

청소년 문제 다룬 영화, 청소년이 못 보기도

국내 영화의 심의가 모두 ‘관대’해진 것은 아니다. 성적 묘사에 관한 기준이 부드러워진 데 비해 폭력 묘사에 대해서는 전보다 더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국 영화로는 6년 만에 칸영화제에서 단편영화 경쟁 부문에 출품되었던 <친애하는 로제타>의 감독 양해훈의 장편 데뷔작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2007년 전주영화제에서 <관객 평론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목에서 한 여성의 청소년기 방황을 그려내 호평을 받았던 이미례 감독의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을 연상시킨다.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도 현대 청소년의 문제인 왕따, 학교 폭력, 성적 방황, 인터넷, 청부 폭력 등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영화는 잔혹하고 불안한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건조한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또한 독립영화 특유의 틀에 박히지 않은 독창성과 재기발랄한 표현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청소년을 대상으로 청소년 문제에 대해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을 정작 청소년은 극장에서 만나볼 수 없다.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청소년기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라 아쉬운 점이 있다.

 

저예산 독립영화 기준은 달라야

18세 등급을 받은 공포 영화 <두 사람이다>나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에서 보듯 청소년을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심의는 강화되는 추세이다. 청소년보호위원회와 YMCA 등에서 청소년에게 폭력성을 조장할 여지가 있는 영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등위도 이들의 주장에 공감하며 청소년 영화의 폭력성에 대한 심의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영등위 관계자는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의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에 대해 “전체적인 주제 면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청부 폭력, 성폭행, 피해자의 나체를 휴대전화로 촬영하는 등의 설정이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표현에서도 전체적으로 잔인하고 폭력적인 묘사가 많기 때문에 청소년이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라고 말했다.

 

홍보사 관계자는 문제된 장면이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전체적으로 폭력 수위가 높아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내렸다는 설명 외에 구체적인 장면을 지적받진 않았다”라고 밝히며 “개봉일이 눈앞에 있어서 재심을 청구하지는 못했지만 청소년 문제를 소재로 한 작품을 청소년이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라고 말했다.
폭력 묘사에 관해서도 “저예산 독립 영화의 특성상 폭력 장면에 화려한 특수 효과나 컴퓨터 그래픽을 쓸 수 없다. 이 영화의 폭력 장면 묘사가 기존 상업 영화에 비해 과격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라고 말했다.
독립 영화를 제작하는 쪽에서는 저예산 독립영화에 대한 기준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고 감독의 자의식이 많이 투영되는 독립영화의 특성을 고려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영등위에서 영화를 심의하는 과정에는 예심위원 2명, 영화등급분류소위원회 위원 7명이 참여한다. 심의 신청이 들어오면 예심위원 2명이 필름 상태, 제목, 주제, 내용 등에 대해 검토한 결과와 가등급이 포함된 소견서를 제출한다. 등급위원회의 7명 심의위원이 이를 검토하고 영화를 같이 보면서 등급을 내리며 전체 위원 과반수 이상 출석에 출석위원 과반수 이상 찬성으로 결정된다.

영등위 “구체적 심의 기준은 족쇄 될 수도”

문제는 영등위의 심의 과정에 대해서도 자의적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명확한 기준 없이 심의위원의 판단에 의존하기 때문에 비슷한 표현에 대해서 다른 결론이 날 경우 이에 대한 불만의 소지가 있다.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와는 달리 군대 생활을 다룬 <용서받지 못한 자>는 15세 관람가를 받았다. 이 영화가 2005년 한국 독립영화계 최고의 수확으로 꼽히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저예산 독립영화라는 점과 폭력을 다루었다는 면에서 닮은 점이 많다. 단순 적용은 어렵겠지만 영화 등급 판정의 자의성 논란이 빚어질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영등위측은 구체적인 심의 기준을 세운다는 것이 오히려 족쇄로 작용할 여지가 있다는 입장이다. 영화 제작 단계에서부터 소재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재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등위 관계자는 “자의적 판단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심의위원 7명의 판단을 종합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객관성 확보에 문제는 없다”라고 말했다.
제한 상영가 판정이 영화에 대한 검열과 삭제를 할 수 없는 영등위의 새로운 무기로 이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제한 상영가 등급은 제한 상영 전용극장을 통해서만 상영이 가능한 것이다. 제한 상영 전용극장은 도입 초기에 몇 개 상영관의 시도가 있었지만 성행위 묘사가 노골적인 저급 영화를 상영한다는 인식이 강해 자리를 잡지 못했다.
영등위는 제한 상영 전용극장이 없는 현실은 등급 분류와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영등위로서는 일반 극장에서 상영되기에는 주제나 묘사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작품에 한해서 제한 상영가 판정을 내릴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사형 선고와 다름없는 제한 상영가 등급을 받은 영화가 관객과 만나기 위해서는 자체적으로 삭제 등을 거쳐 다시 심의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다.
공연물윤리의원회의 검열이 위헌 판결을 받은 이후 영등위의 심의로 바뀌었지만 ‘검열’ 논란은 여전히 지속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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