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 3수 “난들 못하랴”
  • 로스엔젤레스·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7.11.19 15:3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 공화당 매케인 의원, 또 다시 후보 지명전 나서 줄리아니 이어 당내 지지율 2위…‘선명 보수’로 승부 별러

 
미국 유권자에게는 특이한 의미를 갖는 정치인이 있다. 대통령 도전 3수생인 존 매케인이다. 미국 국민은 그를 백악관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지만 좋은 정치인이라고 인정한다. 특히 보수 성향의 미국인 가운데 20% 안팎은 항상 그를 지지한다.
공화당 소속 매케인은 아직 한 번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아 본선에 진출한 적이 없다. 매번 당내 예비선거에서 탈락하지만 2008년 대통령 선거를 향해 다시 당내 후보 지명전에 나섰다. 현재 위치는 루디 줄리아니 후보에 이어 2위이다.
매케인이 백악관 도전 3수를 결행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꼽힌다. 하나는 지난 2000년 첫 도전 때 공화당 대통령 후보이자 현 대통령인 조지 부시를 예비선거에서 압도했던 기억 때문이다. 그는 미국 예비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뉴햄프셔 주 예비선거에서 부시 후보를 49 대 30으로 눌러 미국은 물론 세계를 놀라게 했다. 대통령 후보 지명 첫 도전에서 정치 명문 부시가의 조지 부시에게 압승한 것에 대한 놀라움이다. 중반 승패를 가름하는 사우스 캐럴라이나 주 예비선거에서 부시에게 완패함으로써 후보 지명의 꿈이 깨지기는 했지만, 그는 하면 된다는 믿음과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공화당 내 후보들 가운데 뚜렷한 인물들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현재 줄리아니 후보가 공화당 내 선두 주자이기는 하지만 당내 지지율이 30%대에 머물러 20%대인 자신이 잘만 하면 나중에 판세를 뒤집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아직도 1년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는 장거리 경주로 생각하고 결선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매케인은 지난 2004년 부시 대통령의 재선 때 다시 당내 후보 지명전에 도전해 부시와 맞붙었으나 참패했다.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당시 부시 대통령의 국내외 인기도가 바닥을 헤매고 있는 것을 보고 한 판 붙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시가 인기 없는 대통령이기는 했지만 당내 지지도에서는 현직 프리미엄을 당할 수 없었다. 
한국처럼 후보 지명을 받지 않으면 소속 정당을 탈당해서 무소속으로 출마할 수도 있지만 매케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참정권이 보장되지만 그 권리를 자기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는 미국의 정치 구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당원이 등을 돌리고 유권자가 시선을 돌리는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매케인의 나이는 올해 71세이다. 뜻밖의 행운이 찾아와 그가 백악관에 입성한다면 미국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이 된다. 현재까지 최고령 기록인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도 백악관 첫 입성 때 나이는 69세였다. 매케인에게는 다음 도전의 기회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75세의 늙은 대통령을 미국 유권자가 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 영웅…‘좋은 정치인’ 평가 많아

미국 국민들이 매케인을 좋은 정치인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그의 뚜렷한 보수 성향이다. 그는 지난 4월 사우스 캐럴라이나 유세에서 자작 노래를 불러 미국 언론의 화제가 되었다. 비치보이스의 노래를 바버라 앤의 곡조에 맞춰 ‘봄, 봄, 봄, 봄, 봄 이란’이라고 노래했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이란을 마구 마구 폭격하자’라는 뜻이다. 이라크 전쟁과 함께 미국의 이란 폭격 가능성을 놓고 민주당은 물론 미국 내 다수 여론이 백악관을 향해, 그리고 부시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대이란 강경론은 보수 세력의 열렬한 지지를 끌어내는 도구이다. 기회주의적 보수가 아니라 ‘선명한 보수’라는 것이 그에게 붙은 찬사이다.
매케인은 지난 2004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부시 대통령과 맞붙어 싸우면서도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전쟁은 잘한 결정’이라고 부시를 추켜 세웠다. 경쟁 상대를 끌어내리기도 하지만 정치 성향이 같으면 정적을 과감하게 칭찬하는 그의 솔직함과 담대함으로 인해 그에 대한 보수층의 호감은 더욱 공고해졌다.
매케인의 이런 성향은 그의 이력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미 해군 제독이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군인 집안 태생답게 어린 시절부터 남에게 굽히지 않았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복싱을 좋아했다. 매케인은 반항적이고 도전적인 아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이사하면서 22차례나 전학해 가까운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졸업할 때 꼴찌에서 5등을 했던 미 해군사관학교에서도 사관학교의 엄격한 규칙을 다반사로 어겨 ‘센투리 클럽’ 회원이 되었다. 센투리 클럽은 해군사관학교에서 규칙 위반으로 벌점 100점을 받는 생도 그룹을 가리킨다. 벌점 100점이면 퇴교나 다른 엄중한 벌을 받는 것이 사관학교의 전통이다.
그는 임관 후 해군 장교로 근무하면서도 군율을 잘 지키지 않는 군인으로 통했다. 그는 아무리 엄격한 군율이라도 자신의 기준에 비추어 합당하지 않으면 무시했다. 이같은 성격은 현재 워싱턴 정가에서 그가 골수 보수이기는 하지만 가장 리버럴한 보수로 꼽히고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보수의 틀에 갇히지 않은 보수라는 의미이다.
매케인은 미 전국에서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가 열심히 일하는 정치인이라는 평가 덕분이기도 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보인 그의 군인으로서의 애국심 때문이다. 그는 해군 항공폭격대 장교로 베트남 폭격 출격 22회를 기록한 베테랑 파일럿이었다. 그러나 하노이 폭격시 미사일에 맞아 격추되면서 하노이의 악명 높은 포로 수용소 하노이 힐튼에서 6년 반을 지냈다. 잇단 고문과 폭행, 압력과 회유를 끝까지 이겨내고 귀국하자 당시 닉슨 대통령이 그에게 특별 면담을 청했을 정도이다.
그는 하노이 정부로부터 조기 석방 제안을 받았을 때 “나보다 먼저 수용된 포로 미군들이 다 나가기 전에 이곳을 나가지 않겠다”라고 버텼다. 이같은 고집으로 혹독한 포로 수용소에서 5년을 더 보내야 했다.
매케인의 도전 실패에는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다. 첫 도전이었던 2000년 그가 사우스 캐럴라이나 주 예비선거에서 패배한 것은 부시 진영의 교묘한 흑색 선전 때문이었다. 당시 부시 진영은 유권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매케인 후보가 흑인 여자와 사이에 사생아 딸을 둔 것을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흑인 노예를 부렸던 골수 남부 주인 사우스 캐럴라이나의 백인 사회에서 이 루머는 정치적으로 치명적이었다. 매케인은 결국 완패하고 말았다.
매케인에게는 7명의 자녀가 있다. 이 중 4명은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이고 2명은 재혼한 아내의 아이들이다. 다른 한 명인 브리지트는 마리아 테레사 수녀가 운영하던 고아원에서 입양한 방글라데시 소녀였다. 그는 자신이 낳은 아들 2명을 모두 미 해군에 보냈다. 할아버지부터 4대에 걸쳐 해군 가문을 잇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수많은 미국 젊은이가 이라크 등지에서 희생되고 있는 가운데 그 역시 아들들을 위험한 곳에 보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의 베트남 전쟁 참전에 이어 그는 스스로 미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자식들을 통해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매케인이 대통령감은 아니라도 존경할 만한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이다. 그가 대권 도전 3수를 해도 미국민 가운데 그를 향해 노욕이라거나 정도를 벗어났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메케인은 한국 정치에서 볼 때도 정말 특이한 정치인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