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간 백제 불교 최초 사원도 선물했다
  •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 ()
  • 승인 2008.05.09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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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이 아스카사 창건에 기술자 파견…불사리도 줘

백 제 왕도였던 충청남도 부여의 부소산 기슭 고란사쯤에서는 강 건너편의 절터가 한눈에 잡힌다. 백제왕이 올라와서 굽어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았다. 왕이 몸소 배를 타고 가 향불을 올리곤 했던 사찰이었다. 강에 접한 데다가 채색과 장식 등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몄으니 풍광이 자못 볼만했을 것이다. 이름 그대로 왕실의 부흥을 빌었던 왕흥사(王興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지난해 10월에 이곳 목탑 터를 발굴하던 중에 사리통(舍利筒)이 출토되었다. 사리를 봉안한 청동통 안에서는 다시금 은병이 나왔다. 또 은병 안에는 금병이 들어 있었다. 사리통 명문에는 2매였던 사리가 신묘한 변화로 3매로 늘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정작 사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청동 사리통에 새겨진 명문은 다음과 같다.
‘정유년(577년) 2월15일에 백제왕 창(27대 위덕왕)이 세 왕자를 위해 탑을 세웠다. 본래 사리는 2개였으나 장례(사리를 기둥 초석에 묻는 의식을 가리킴) 때 신묘한 변화로 3개가 되었다(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三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

위의 명문 가운데 일반적으로 ‘찰(刹)’은 ‘절’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사리를 초석 중에 안치하는 의식과 결부지어 나온 만큼 ‘찰’은 ‘탑(塔)’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600~634년에 걸쳐 완공된 왕흥사라는 사찰 창건에 앞서 577년에 먼저 탑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사리통 명문에는 3개의 사리 기록되어 있어

왕흥사지 목탑의 성격은 ‘三王子’ 판독과 맞물려 있다. ‘三’ 자를 ‘亡’ 자로 판독하는 견해가 많다. 사실 글자 형태만 본다면 ‘亡’ 자에 가깝다. 한자를 처음 배우는 초등학생들도 그렇게 볼 것이다. 그러나 사비성 도읍기에 제작된, 재질도 동일한 정지원명 금동불상 광배명에 보면 ‘亡’ 자가 이와는 사뭇 다르다. 이와 관련해 사리통 명문 가운데 ‘昌王’의 ‘昌’은 결구(結構)가 ‘曷’ 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타 정황에 비추어 볼 때 ‘曷王’이 아니라 ‘昌王’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애매하게 새겨진 ‘亡王子’도 ‘三王子’의 속성을 지녔다고 보아야 정황이 맞다.



이러한 명문 판독은 창왕 곧 위덕왕 이후의 왕위 계승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위덕왕을 이은 왕은 아우인 혜왕이었다. 혜왕은 70세가량의 고령일 때 즉위했다. 이 사실은 위덕왕 직계의 단절을 뜻한다. 어떤 이는 ‘아좌태자’가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보이는 ‘아좌왕자’가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왕의 아우인 왕제(王弟)도 ‘왕자’로 표기하고 있다. <창왕사리감명문>에서도 위덕왕의 누이를 ‘공주’로 표기했다. 일본 사가현 기시마군 이나사 신사에는 신사의 역사를 적어놓은 목판에 아좌왕자를 성왕의 아들 곧 위덕왕의 아우로 못박았다. 따라서 사리통 명문의 ‘三王子’는 위덕왕 직계의 3왕자를 뜻한다. 동시에 이들의 전몰로 인해 혜왕이 즉위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지난해 발굴된 왕흥사지 목탑은 3왕자 추복탑(追福塔)이라고 해야 맞다.

창왕은 서거 후 <법화경>에 근거한 ‘위덕(威德)’이라는 시호를 부여받았다. 그럴 정도로 그는 공덕을 많이 쌓은 왕이었다. 그에게는 자신을 이을 왕자도 없었다. 그렇지만 숱한 사원 기술자들을 왜에 파견했다. 그 결과 일본 오사카의 시텐노사(四天王寺)·호류사(法隆寺)·아스카사(飛鳥寺)·구다라사(百濟寺) 등 많은 사원들이 나라 분지를 중심으로 창건되었다. 특히 위덕왕은 588년에 아스카사에 사신과 불사리(佛舍利)를 보냈다. 또 사공(寺工)·노반박사(盤博士)·와박사(瓦博士)·화공(畵工) 같은 사원 기술자들을 파견했다. 이로써 일본 최초의 사찰인 아스카사 창건이 시작되었다. 592년에는 불당과 회랑, 596년에는 탑기둥, 596년에는 절이 완공되었다. 이와 관련해 593년(위덕왕 40)에 불사리함을 아스카사 탑기둥(刹柱) 초석 중에 안치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왜 조정의 실권자인 백제계 소가노 우마코 등 100여 명이 모두 백제옷을 입으니 보는 사람들이 죄다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 문화가 왜인들에게는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왜에서 불교의 수용 주체가 누구였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아스카사 목탑은 왕흥사지 목탑과 계통상으로 연결된다. 일본인 학자들 스스로가 사리 용기와 장엄구의 안치 형식은 물론이고 불교 의례 등에 이르기까지 백제 승려의 구체적인 지도가 있었다고 말한다. 아스카사 목탑지에서는 귀고리·금팔찌·대롱구슬·곡옥·2천3백66점의 작은 유리구슬, 붉은 마노제 유리구슬, 사리공에서 흘러나온 운모편의 흔적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들은 왕흥사지 목탑 심초 부근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부합된다. 탑의 구조나 출토품 그리고 기와 문양 등이 거의 일치한다.

ⓒ이산프로덕션 제공

아스카사 목탑도 왕흥사 목탑과 비슷

물론 아스카사에서는 갑옷 조각인 찰갑편과 마구류도 출토되었다. 반면 왕흥사지 목탑에서는 전쟁과 관련된 물품은 일체 출토되지 않았다.

593년에는 일본 열도에서 최초의 사찰인 아스카사의 목탑이 조성되었다. 이때 진귀한 불사리를 독점한 위덕왕은 그것을 왜에 분여(分與)했다. 왕의 위상을 부처와 동격으로 일치시켜 나가고자 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사원 기술자들을 왜에 파견함으로써 백제와 동일한 불교 요람을 조성하려고 했다. 위덕왕은 동아시아에서 자국을 불교의 본령(本領)으로 삼으려고 했다. 위덕왕은 “왕이 곧 부처다”라는 왕즉불(王卽佛) 사상으로써 왜에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한 것일까.

아스카사의 처음 이름은 ‘불법을 흥성시킨다’는 뜻을 지닌 호코사(法興寺)였다. 위덕왕의 바람이 담긴 절 이름대로 나라 분지에는 불교 문화가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이렇듯 백제 ‘왕실의 흥륭(王興)’과 ‘불법의 흥성(法興)’은 서로 짝을 이루었다. 그 한복판에는 백제가 자리 잡았던 것이다. 위덕왕은 불교 이데올로기의 수출을 통해 백제 중심의 신질서를 모색하고자 했다. 왕흥사는 우리에게 위덕왕의 이러한 웅걸찬 야심을 보여주는 역사의 산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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