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썩이는 경제 부활의 날개 폈는가
  • 이철현 경제전문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09.04.21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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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위기로 얼어붙었던 자산 시장에 봄 기운이 돌고 있다.

ⓒ그림 이재준

금융 위기로 얼어붙었던 자산 시장에 봄 기운이 돌고 있다. 서울 강남 아파트 값이 다시 오르고 주식시장에 돈이 몰려들고 있다. 한국 경제는 이 기세를 이어 회복 국면에 들어설 것인가, 아니면 짧은 ‘봄바람’으로 그칠 것인가.

중소 제조업체 대표인 김 아무개 사장(52)은 지난해 12월 경기도 광주시 소재 골프장 이스트밸리의 회원권을 7억5천만원에 샀다. 김사장은 이스트밸리 회원권에 눈독을 들였으나 값이 18억원까지 오르다 보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난해 9월 시세 흐름이 역전되면서 회원권 값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세계 금융 위기가 발발하자 금융 기관과 대기업이 회원권을 매물로 쏟아냈다. 김태영 ㈜에이스회원권 소속 골프회원권 담당 딜러는 “(지난해 하반기) 회원권 투매 현상이 일어났다. 매물은 쏟아졌지만 매입세는 사라졌다. 값이 반 토막 나는 회원권이 속출했다”라고 말했다. 김사장은 지난해 12월 값이 지나치게 떨어졌다고 판단하고 봄 시즌에 맞춰 운동도 할 겸 법인명으로 회원권을 샀다. 올해 1월 상황이 돌변했다. 회원권 값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3월 중순까지 폭등세를 이어갔다. 4월 둘째 주 이스트밸리 회원권 시세는 13억원까지 올라갔다. 김사장은 아직 팔 생각이 없다. 전고점인 18억원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김태영 딜러는 “지금 사겠다는 회원들이 줄서 있어 값이 오르고 있다”라고 말했다.

전문의 박 아무개씨(48)는 지난 4월 초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뉴서울CC 회원권을 3억3천만원에 팔았다. 그는 이 회원권을 지난해 11월 실수요 목적으로 샀다. 당시 매입가는 1억8천만원이었다. 4개월 만에 1억5천만원을 번 것이다. 송용권 ㈜에이스회원권 전략기획팀장은 “거래량이 많이 늘었다. 지난해 하반기와 비교하면 3월 중순 50%까지 중개 성사 건수가 증가했다”라고 말했다. 에이스회원권은 지난 3월 8백건가량 회원권 거래를 성사시켰다. 골프 회원권뿐만 아니라 피트니스, 콘도 회원권까지 포함한 수치이다. 소속 딜러 업무도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상담 전화가 눈에 띄게 늘어났고, 거래 성사 비율도 높아졌다.

송용권 팀장은 “지난해 10월 위기설이 퍼지면서 값이 폭락하다가 올해 초 폭등하더니 3월 위기설이 불거지자 2월에 주춤하다가 위기설이 희석되면서 시세가 다시 가파른 오름세를 타고 있다”라고 말했다. 회원권만큼 투자 심리에 영향을 받는 품목도 드물다. 환금성이 크고 거래 비용이 적다 보니 수시로 사고판다. 김태영 회원권 딜러는 “초저금리 현상이 지속되면서 투자 대안을 찾다가 주식시장으로 돈이 몰리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 회원권 시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과 함께 찾아온 세계 경기 한파가 물러갈 조짐이 보이면서 국내 투자 시장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미국 금융시장발 한랭전선 세력이 약해지자 잔뜩 움츠렸던 투자 심리가 살아나고 있다. 그동안 한파에 얼어붙었던 부동자금 8백조원은 자산 시장으로 물꼬를 트고 있다. 가장 뚜렷하게 회복세를 보이는 곳은 부동산과 주식 시장이다. 한남뉴타운처럼 개발 호재로 주변 땅값이 들썩이고 개발 규제 완화 조치에 힘입은 강남 3구 재개발 아파트 값이 오르고 있다. 증권사 고객 예탁금은 지난 4월15일 기준 16조4백72원까지 늘어나 주가지수 2천 포인트 당시 15조7천억원을 넘어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우량 회사 채권은 발행과 동시에 팔려나가고 있다. 원자재 값이 다시 오르자 원자재 관련 펀드로 자금 유입이 늘고 있다.

‘저금리 피로’ 현상도 부동자금 이동에 한몫

자산 시장으로 부동자금이 흐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변수는 ‘저금리 피로’ 현상이다. 지금 은행 정기예금 금리는 연 4%를 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머니마켓펀드(MMF), 종합자산관리계좌(CMA), 1~3개월 만기 정기예금에 자금을 묻어두던 이들이 초저금리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안전 자산 투자가 명목 물가상승률 정도의 투자 수익밖에 거두지 못하자 투자자들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자산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자산 시장은 경기에 선행하는 경향이 있다. 경기가 바닥에 이르기 전에 움직여야 시세 차익을 거둘 수 있다는 심리가 작용했다. 

학습 효과 때문인지 투자자들이 주목한 곳은 부동산이다. ‘부동산 불패 신화’를 경험한 투자자들이 부동산시장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이 부동산시장에서 가장 주목한 변수는 개발 호재이다. 한남동 뉴타운이나 마포 상암지구 초고층 건물 개발 계획이 나오자 투자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남동 뉴타운 판자촌은 갑자기 수입 자동차를 탄 부자들로 분주해졌다(18쪽 딸린 기사 참조). 부동산소개업소마다 외지에서 찾아온 상담객이 끊이지 않는다. 마포구 상암지구에 1백33층 초고층 빌딩을 건립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상암지구 중소형 아파트 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부동산 경기가 회복하는 데 개발 호재는 필요조건이나 충분조건은 아니다. 개발 호재만으로는 시세 상승을 이어가기 힘들다. 부동산 관련 규제가 풀리고 주택담보대출 여건과 건설 경기가 나아져야 본격 상승을 기대할 수 있다. 올해 초부터 부동산 정책 기조가 규제 완화로 방향을 잡자 재건축단지를 중심으로 매수세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정부는 재건축단지 소형 의무 비율 제도를 완화했고,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제도를 폐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서울시가 지난 4월9일 소형 의무비율을 유지하겠다고 발표하기 전까지 강남 재건축 아파트 값은 상승세를 이어갔다.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제도 폐지가 정치권 반대 탓에 좌초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함종영 스피드뱅크 시황분석팀장은 “부동산 값이 본격적으로 상승세를 타기 위해서는 정부 규제 완화가 필수이다. 최근 강남 재건축단지 가격 흐름을 보면 정부 정책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가늠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강남 재건축 아파트 값은 정책 혼선이 빚어지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올랐다. 과거 투기 온상으로 비난받았던 버블 세븐 지역이 평촌을 제외하고 일제히 올랐다. 강남 3구 재건축 아파트에는 품귀 현상까지 일어났다. 노원구나 성동구 같은 강북 지역 주택 값은 조금 떨어졌다. 함종영 팀장은 “그동안 강북 주택 값은 오르고 강남은 떨어져 집값 차이가 줄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강북에서 집을 사려던 실수요자가 돈을 좀 보태 강남으로 들어가려 한다”라고 말했다. 진원지 강남에서 시작된 집값 상승은 수도권 이남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땅값이 떨어지자 일부 중소기업은 공장이나 물류 기지를 세우려고 땅을 매입하고 있다. 설비 증설이나 물류 기지가 불요불급하더라도 워낙 땅값이 떨어져 있어 이참에 투자 목적으로 매입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국내 한 유아·아동복 업체는 최근 서울 외곽 교통 요지에 1만㎡가 넘는 부지를 사들였다. 땅값이 많이 떨어졌고, 자재 값이 비싸지 않아 물류기지를 세울 수 있는 적기라 판단한 것이다. 이 업체 대표인 김 아무개 사장은 3년 전 아동용 청바지 시장에 뛰어들어 지난해 7백억원이 넘는 매출을 일으켜 ‘대박’을 터뜨렸다. 이 회사처럼 현금 자산이 많은 기업 위주로 부동산 매입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김 아무개 사장은 “주변에 유동성이 풍부한 업체들은 지금을 자산 매입의 적기로 판단하고 부동산을 사들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봄소식 있지만 서리 걱정해야 할 시점”

▲ 서울 강남 재건축 아파트의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뛰고 있다. 위는 대치동 은마아파트. ⓒ시사저널 유장훈

경기 완화 징후가 가장 뚜렷한 곳은 주식시장이다. 주식시장은 과열 조짐까지 보이면서 봄이 아니라 초여름 열기마저 느껴지고 있다(22쪽 딸린 기사 참조). 세계 금융 위기가 진정되는 징후가 보이고 미국 주택 경기가 바닥을 쳤다는 지표가 발표되었다. 이 와중에 국내 경기 침체가 다소나마 개선될 기미가 보이자 외국인 투자자 위주로 투자자들이 주식시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종합주가지수는 지난 한 달 3백 포인트가 올랐다. 4월 초 잇따라 발표된 삼성전자·신세계·포스코 같은 시가총액 상위 업체의 1분기 실적이 당초 기대보다 높게 나온 것도 투자 심리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 4월13일 주식 거래 대금이 12조원까지 늘면서 사상 최고치에 근접했다. 신규 개설 계좌 건수도 계속 증가하고, 지난 6개월 동안 한 차례 이상 거래가 이루어진 활동 계좌 수도 1천2백33만개로 늘어났다.

원자재 펀드 수익률도 지난 한달 동안 20% 가까이 올랐다. 알루미늄과 니켈 값이 지난 한 달 사이 10% 이상 급등했다. 구리는 올해 초에 비해 43% 이상 올랐다. 산은자산운용이 운용하는 원자재 펀드 상품인 ‘산은짐로저스앤그리엔덱스파생1ClassA’는 최근 한달 수익률이 19.4%, 슈로더투신운용의 ‘슈로더이머징마켓커머더티주식-자A종A’가 한 달 사이 19.19% 수익을 거두었다. 채권시장도 기지개를 켜고 있다. 현대증권이 지난 4월6일 선보인 A등급 이상 회사채 5종은 1주일이 지나지 않아 1천100억원어치가 모두 소진되었다.

자산 시장의 분위기가 좋아진 것으로 경기가 회복기에 접어들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아직 겨울이 가지 않았는데 섣불리 동면에서 깼다가 얼어죽을 수 있다는 뜻이다. 비관론자는 조만간 위기가 재연될 것이라 주장한다. 베리 아이켄그린 버클리 캘리포니아 경제학과 교수나 누리엘 루비니 뉴욕 대학 경제학과 교수는 ‘아직 파국은 오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21세기 카산드라’를 자처한다. 그들은 ‘주요 경제 지표가 1930년대 대공황 시절보다 좋지 않다. 더 큰 위기가 닥칠 것이다’라고 예언한다. 신중론자들은 미국 금융시장이 안정되었다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섣부른 데다 유럽을 비롯해 주요 경제 권역에서 위기가 재발할 소지가 충분하다고 지적한다.

한국 경기 흐름은 국내 주요 경기 지표보다 외생변수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미국이나 유럽의 대형 금융 기관이 다시 부실해지고 세계 경기 침체가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국내 경기가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 수석부총재를 역임한 앤 크루거 존스홉킨스 국제대학원 교수는 지난 4월15일 세계경제연구원 초청 강연에서 “봄 소식은 있지만, 아직 봄 서리를 걱정해야 할 시점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기 흐름을 결정할 주요 변수 가운데 하나가 투자 심리이다.

앤 크루거 교수는 “주식과 주택 시장에서 많은 긍정적인 조짐이 보이고 있어 희망이 있다. 비관론이 팽배하면 오히려 소비를 줄이게 되지만 좋은 소식이 나오면 소비가 더 빨리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동차 부품업체 대표인 이 아무개 사장(44)은 지난 4월 둘째 주 친구들과 골프장에 나왔다. 그는 평소 워낙 골프를 좋아해 한 주에 2~3번씩 라운딩을 가졌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처음 필드에 나왔다. 자동차 완성업체들이 잇달아 조업을 중단하거나 줄여 이사장은 창업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주문 물량이 줄다 보니 공급처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다. 요즘 간신히 한숨을 돌리고 있다. 이사장은 “(자동차 부품 업종) 경기가 나아지지 않았으나 그나마 숨통을 트일 만한 조짐이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날 그의 골프 스코어는 형편없었다. 안심하기에는 이르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아직 남아 있는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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