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구열만 있다면 노숙자가 문제랴
  • 로스앤젤레스·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9.07.01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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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여고생 카디자 윌리엄스의 하버드 입학 화제 미국 명문 대학들, 잘난 학생보다 잘할 학생 선호

▲ 6월1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제퍼슨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카디자 윌리엄스 학생이 연단에 서 있다(맨 왼쪽). 졸업 앨범에 사인해줄 친구를 찾고 있는 카디자(가운데). 카디자가 졸업을 앞두고 수전 선생님과 포옹을 하고 있다(맨 오른쪽). ⓒLA TIMES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근 산타 클라리타의 한인 대상 대입학원인 ‘Dr. KIM SAT 아카데미’는 처음 찾아오는 학부모들에게 매번 같은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몇 해 전 이 지역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예일 대학에 입학했던 P양의 슬프고 안타까운 얘기이다.

P양은 입학 첫해 겨울방학을 맞아 집에 왔다가 새 학기가 시작되기 며칠 전 부모에게 충격적인 말을 털어놓았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P양 부모는 경악했다.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예일 대학에 합격해 기뻐한 것이 엊그제인데 딸이 그 대학을 포기하겠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P양 부모는 자초지종을 물었다. P양은 공부를 따라갈 수 없다고 대답했다. 산타 클라리타의 최고 수재로 꼽히던 P양의 고백을 부모는 수긍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 학기만 더 노력해보라고 설득했다.

방학이 끝나자 학교로 돌려보내기 위해 P양 부모는 로스앤젤레스 공항으로 딸을 데려갔다. 슬프고 안타까운 얘기는 공항 가는 길에서 일어났다. P양이, 고속 주행하는 차에서 갑자기 차문을 열고 길바닥으로 뛰어내려 현장에서 사망했다. P양은 대학으로 돌아가기가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에 죽음을 택한 것이다.

P양의 얘기는 대입 준비생을 둔 한인 학부모 사이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P양 부모의 절절한 아픔이 남의 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비리그를 비롯한 미국 사립 명문 대학의 신입생 입학 사정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사정 자료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시험 점수는 물론 특별활동, 스포츠 역량, 사회 봉사, 대외 학술 활동, 친우 관계, 추천서 등 따지는 항목도 여러 가지이다. 뛰어난 성적을 앞세운 지원자 가운데 대학에 가장 적절한 학생을 고르기 위해 지원자 이상으로 입학사정관들도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학생들이 합격 통지를 받기는 무척 어렵다.

이들 대학의 신입생 선발은 학교 성적(GPA)이나 수능시험(SAT) 점수 순이 아니다. 아이비리그나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다른 공·사립 대학들이 제시하는 합격 사정 기준은 수준이 높고 공부량이 많은 자기 대학의 교과 과정에서 낙오하지 않고 학업을 마칠 수 있느냐이다. 명문 대학일수록 중퇴자 비율이 낮은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내놓은 교육 통계에 따르면 2005년 미국 대학생 40%가 학위 없이 대학을 마친다. 이들 중 75%는 입학 후 2년 내 학교를 떠난다. 중퇴 이유는 경제 문제가 38%로 가장 많지만, 수업 능력 미달로 자퇴하는 비율이 28%로 그 다음을 차지한다. 명문 대학의 입학 사정관들로서는 이처럼 수학 능력 미달로 자퇴하는 숫자를 줄이는 것이 지상 과제이다.

‘내신·수능 최고’라도 까다로운 입학 사정 뚫기 힘들어

해마다 입학 시즌이 되면 GPA·SAT 최고 점수를 받은 지원자가 지원한 대학 어디에서도 합격 통지를 받지 못했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나돈다. 그리고 카디자 윌리엄스 양(18)이 올해 하버드 대학 합격자 순위 1위였다는 사실은 명문 대학들의 입학 사정 현실을 잘 보여준다.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 우범 지역의 홈리스인 흑인 소녀 카디자는 가난한 학생들이 많은 로스앤젤레스 제퍼슨 고교를 졸업했다. 학교 내 성적 순위는 상위에 속했지만, 카디자의 GPA 평균점은 4.0 미만으로 다른 명문 고교 우등생들에 비하면 한참 아래이다. 학교의 명성이나 성적으로 따질 경우 웬만한 주립대학에도 지원하기 어렵다. 가정 배경으로 보면 등록금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사립 대학은 아예 꿈도 꿀 수 없다. 그러나 카디자는 오는 8월 당당히 하버드 대학생이 된다.

이는 보통 부유하거나 명문인 집안 출신에다 명문 고교를 우수하게 졸업한 수재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진 유명 사립 대학들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 사정 결과이다. 하버드 대학이 카디자를 신입생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은 카디자가 하버드의 교과 과정을 무난히 통과하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카디자는 태어날 때부터 홈리스였다. 어머니 찬투완 윌리엄스(32)는 14세 때 카디자를 낳은 뒤 집을 나왔다. 갓난 딸 때문에 다니던 중학교도 포기한 찬투완은 그때부터 밑바닥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여러 도시를 거치며 18년간 대부분을 홈리스로 살았다.

찬투완은 최저 빈민 생활을 하면서도 기회가 닿는 대로 카디자를 학교에 보냈다. 카디자는 어머니의 떠돌이 삶으로 인해 학교를 12번이나 옮겨야 했다. 그마저 4학년과 5학년은 학년 절반밖에 다니지 못했고, 6학년은 건너뛰었다. 7학년(중1)은 중간에 학교를 옮겼고, 8학년은 받은 수업 일수가 2주일에 불과했다.

홈리스 수용 시설인 센터에 머무를 때 카디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샤워를 한 뒤 냄새가 나지 않는 옷으로 갈아입고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갔다.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면 밤 11시가 되었다. 모자라는 잠은 버스 안에서 떼웠다.

센터에 머무를 때 주변에는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 등 각종 우범자들이 득실했다. 이들 우범자의 빈정거림과 핀잔에도 불구하고 카디자는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극한 상황에서도 한 달에 책 4~5권을 읽어냈다.

책만 읽은 것이 아니었다. 카디자는 사회 여러 곳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띄웠다.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공부하고 싶다는 의지를 전했다. 카디자의 편지를 받은 여러 단체가 도움의 손길을 보냈다. 로스앤젤레스 인근 도시의 한 의사는 2년에 걸쳐 카디자를 도와 그녀가 무사히 고교를 졸업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버드 대학은 카디자가 공부에 대한 집념이 투철하고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면서도 성적이 상위권에 속할 정도로 탁월한 성취도를 보이며, 좌절하지 않고 여러 곳에 도움을 요청한 적극성 등을 높이 샀다.

카디자를 둘러싸고 하버드 대학이 객기를 부린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해이다. 콜럼비아, 브라운, 엠허스트, 윌리엄스 같은 명문 대학에서도 카디자에게 합격 통지를 보냈다. 이들 명문 대학이 자신들이 원하는 학생상을 공유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카디자는 미국 명문 대학가의 신데렐라가 아니다. 미국 대학들이 진정으로 어떤 학생을 원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이다.

한국에서도 대학들이 입학사정관 제도를 도입한다고 해서 시끄러운 것 같다. 카디자의 사례는 아주 좋은 본보기가 될 만하다. 입학 사정은 공부를 잘해 점수가 좋은 학생이 아니라, 앞으로 공부를 잘할 수 있는 학생을 뽑는 데 맞춰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P양의 비극을 양산하는 시행착오를 겪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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