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패션 왕국’의 자존심
  • 파리·최정민 통신원 ()
  • 승인 2009.09.01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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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표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라크루와, ‘파산 선고’…경제 위기에 아성 와르르

▲ 7월7일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라크루와(가운데 오른쪽)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델을 에스코트하고 있다. ⓒAP연합


프랑스 하면 뭐니뭐니해도 예술의 나라, 그것도 패션의 나라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한 프랑스의 자존심인 패션업계가 경제 위기를 맞아 그 위상을 위협받고 있다. 바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디자이너인 크리스티앙 라크루와의 패션하우스가 파산 선고를 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프랑스 패션계에서 쟝 뽈 고티에와 함께 프랑스인의 자존심을 지켜온 그였기에 이번 파산의 충격이 더 컸다.

현재 프랑스 패션계를 주도하는 명품업체의 수석 디자이너는 샤넬의 칼 라거필드와 크리스디앙 디오르의 죤 갈리아노인데, 이들은 독일과 영국 출신이다. 따라서 프랑스의 자존심과도 같았던 라크루와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애정은 남달랐다. 남부 프랑스 아를르 태생인 라크루와는 패션업계에 입문한 이후 두 차례나 황금골무상을 수상했으며, 2002년에는 레종 도뇌르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파리의 장식미술박물관에서 ‘의상의 역사’라는 대규모 회고전을 치르기도 했으며, 2000년 프랑스의 자랑인 TGV가 지중해 노선을 개통했을 때 열차 내부의 디자인을 맡은 것도 그였다. 또, 프랑스 체신부가 발행하는 성 발렌타인 우표를 디자인했는가 하면, 프랑스 국민 사전인 <라후소>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감독했고, 2004년에는 에어프랑스 승무원의 의상을 선보였다. 그야말로 ‘국민 디자이너’였던 셈이다.

국민의 사랑을 받아왔던 라크루와였지만 그의 사업체의 대주주는 미국 기업이었다. 그는 명품업계의 지존인 LVHM(모에헤네시 루이비통)의 회장인 베르나르 아르노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1987년 ‘라크루와 패션하우스’라는 이름으로 명품업계에 뛰어들었으나, 2005년 경영진과 마찰을 빚어 미국계 면세 업체인 FALIC에 매각되었다. 이때 얼마에 팔렸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FALIC는 할리우드에 기반을 둔 면세 전문 체인으로 미국 내 2위 규모이다. 새로운 주인을 맞은 라크루와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추진했으나 경제 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지난 5월 파산 신청을 하게 된 것이다.

그의 위상이 남달랐기에 파산 신청 이후 프랑스 정부 및 패션계는 다각도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7월28일 크리스티앙 에스트로지 산업부장관은 라크루와를 만나 사안을 직접 챙겼다. 면담 직후 라크루와는 “이렇게 빨리 그리고 심도 있게 경청해 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다.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미테랑 전 대통령의 조카로 사르코지 내각에 새로 입각한 프레데릭 미테랑 신임 문화부장관 또한 라크루와를 직접 면담했다.

지난 7월6일, 라크루와는 마지막이 될지 모를 2009/2010 가을·겨울 컬렉션을 주변 지인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무대에 올렸다. 이제 앞길이 불투명한 그의 구세주로 거론되고 있는 인물은 2006년 프랑스의 대표 백화점인 프랭땅을 인수했던 이탈리아의 거부 마우리찌오 보를레티(Maurizio Borletti)이다. 크리스티앙 에스트로지 프랑스 산업부장관은 “현재 이탈리아의 베를레티 그룹만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인수자이다”라고 언급했다.

중국도 프랑스 명품시장 흔들어

▲ 7월28일 산업부장관과 면담을 끝내고 산업부를 나서는 크리스티앙 라크루와. ⓒAP연합

사실 프랑스 패션업계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명품시장이 중국에 매각되기 시작한 시발점은 프랑스 1위의 향수 및 화장품 매장 체인인 마리오노의 매각이었다. 지난 2005년 중국계 거부인 리카싱에게 A.S. 왓손트 사를 통해 매각되었다. 그러나 이후 행보는 순탄치 않았다. 매입 직후 25개 직판장이 폐쇄되었고, 4백50여 명의 직원이 해고되었다. 또한, 이번 경제 위기 여파로 지난 6월 7백여 명 규모의 해고를 추가로 발표했다.

이런 와중에 지난 6월 프랑스 패션계의 산증인인 피에르 가르뎅 상표가 중국에 팔린다는 소문이 프랑스를 충격에 빠뜨렸다. 6월29일 AFP 통신은 피에르 가르뎅 중국 책임자인 팡팡 씨의 말을 인용해  “현재 피에르 가르뎅 씨가 피에르 가르뎅의 상표를  중국의 2개 업체에 2억 유로의 규모로 일괄 매각하는 것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파장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급기야 피에르 가르뎅측은 중국 책임자의 인용 보도를 즉각 부인하며 “상표가 아닌 중국 영토 내의 사업권만을 고려중이다”라고 서둘러 진화 작업에 나섰다. 피에르 가르뎅은 1978년에 중국에 진출해 1979년 서방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베이징에서 패션쇼를 선보인 주인공이며, 보수적이기로 소문난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 한림원)에 디자이너 자격으로 들어간 최초 회원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상표가 중국인들에게 넘어간다는 소식은 진화되기는 했으나 프랑스 여론을 술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현재 프랑스 명품시장을 흔들고 있는 신흥 강국은 중국이다. 시장 규모 면에서 세계 1위인 일본을 위협하고 있다. 2008년 중국인들의 명품 소비는 총 86억 달러에 이르며, 이것은 세계 명품시장 규모의 18%이다. 중국 세계 명품 연구소(World Luxury Research Center)의 궈주리 소장은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명품업체들이 중국이라는 거대한 잠재 시장을 잡기 위해 달려드는 것은 분명하다. 중국 시장은 이번 위기 동안에도 탁월한 탄력성을 보이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현재 중국에서 명품을 소비하는 인구는 13%이며, 2010년에는 2억5백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 상무부는 2014년쯤이면 중국 시장이 세계 명품 시장의 34%를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 명품시장의 일방 독주는 앞으로도 수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 현재의 경제 여파 속에서 명품산업이 기댈 곳이 중국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 파리 패션가는 빙하기이다. 패션계의 대부인 샤넬의 칼 라거필드마저도 “소박한 시대가 올지 모른다”라는 예고와 함께 2백여 명의 계약직 사원을 해고했으며, 대규모 패션쇼는 종적을 감추었다. 올 초 모든 컬렉션은 조용하고 검소하게 치러졌다. 이런 전대미문의 침체 와중에 중국 시장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것은 에르메스의 선전이었다. 에르메스는 올 1월 분기 실적 12% 증가를 달성해 업계를 놀라게 했다. 이 실적은 모두 중국 시장에서 이루어낸 결과이다. 이미 발 빠른 이탈리아 명가 아르마니와 프랑스의 루이비통 그룹은 중국 시장에 매장을 내고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현재 명품시장이 타격을 받고 있는 곳은 프랑스만이 아니다. 독일의 명품업체인 에스카다도 지난해 7천만 유로의 적자를 낸 데 이어 올해 9천2백만 유로의 적자를 내며 파산 신청에 들어갔다. 덴마크의 모피 명가인 비르게르 크리스텐센의 경우 15년 만에 적자로 돌아섰다.

현재 프랑스 의류업계에서는 ‘명품 패션들의 몰락’을 전통적인 경영 방식을 고수하는 프랑스 명가들이 신흥 시장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경제 위기와 중국의 부상 속에 자신들이 패션을 선도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 프랑스인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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