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TV도 ‘막장 방송’으로 요란
  • 파리·최정민 | 통신원 ()
  • 승인 2010.03.3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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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죽음의 게임> 만들면서 설정한 가상 게임 쇼 싸고 논란 분분

 

▲ 프랑스의 공영방송 프랑스2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에서 내보낸 TV 쇼 프로그램의 방송 장면. ⓒ시사저널 이종현

5백만의 철학자가 사는 나라인 프랑스에서 현대 미디어 사회의 총아인 텔레비전에 대한 논의가 화두로 떠올랐다. 그 시발점은 공영방송 프랑스2가 1년여에 걸쳐 제작하고 지난 3월17일 방영한 <죽음의 게임-존 엑스트렘(극한 지대)>이라는 다큐멘터리이다. 그동안 심심치 않게 논의되어온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필두로 나날이 강해져만 가는 텔레비전의 영향력과 그 문제점을 직접적으로 해부한 것이다.

이번 다큐는 ‘극한 지대’라는 프로그램을 설정해놓고 참가자들을 관찰했다. 모델은 지난 2차 대전 직후 미국의 예일 대학 교수였던 스텐리 밀그람이 실행한 ‘복종 실험’이다. 당시 밀그람 교수는 “2차 대전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이 나치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실험했다. 문제를 못 맞추면 다른 사람에게 전기 충격을 주어야 한다는 설정으로 과학이라는 권력에 복종하는 사람들의 경향을 연구했다.

이번 다큐는 그 권력의 주체를 과학이 아닌 텔레비전으로 옮겨놓았다. 참가자들은 캡슐 안에 갇혀 있는 다른 참가자가 문제를 맞추지 못할 때마다 전기 충격을 주는 스위치를 누르도록 설정되었다. 물론 그 캡슐 안에서 전기 충격을 받는 사람은 배우이며 전기 충격도 거짓이다. 그런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1965년 밀그람 실험에서는 62.5%의 참여자가 극한 지점인 4백50볼트까지 갔다면, 이번 실험에서는 81%의 참여자가 최고점인 4백60볼트까지 진행해 제작진을 당황케 했다.

연출자인 크로스토프 닉은 제작 후 “제작진 모두 참여자가 반항해주기를 간절히 바랐었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번 프로그램의 의도에 대해서는 “우리는 죽음이 전제되어 있는(실제로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는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경고를 밝힌다) 상황 속에서 텔레비전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를 밝히고자 했다”라고 말했다.

크리스토프 닉은 “흥미로운 사실은 참여자에게 전권을 줄수록 게임의 룰에 철저히 복종했다는 사실이다”라고 덧붙였다. 텔레비전이라는 환경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이제 텔레비전에서 생방송으로 죽음을 보여주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현실이 된 셈이다.

사실 이번 실험을 벌인 프랑스 방송의 표현 수위는 다른 나라보다 약하다. 유럽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의 프로그램은 극한 일로를 걷고 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선구자였던 네덜란드의 경우 일반 집단을 가두어놓고 촬영하는 기초적인 단계를 벗어난 지 벌써 오래다. 미국의 경우 유명인과 얼굴을 비슷하게 만드는 리얼리티 성형 프로그램이 있는가 하면, 네덜란드에서는 LSD 환각제나 성적 자극에 대한 반응을 보는 프로그램도 등장했다. 러시안 룰렛 게임을 방영하는 나라도 있다. 참가자에게 극심한 고통을 체험케 하는 일본의 오락물은 흔하디  흔하다.

이런 상황에 대해 소르본누벨 대학 시청각연구소장인 프랑스와 조스트 교수는 “프랑스는 미국이나 일본처럼 사형 제도가 존재하는 나라들과 그 방송 수위가 다르다. 일본이나 미국처럼 방송한다면 시청각위원회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미 케이블방송의 유입으로 그러한 울타리도 불안해진 실정이며, 그러한 우려 속에서 텔레비전을 둘러싼 이번 분석이 제기된 것이다.

프로그램의 의도는 좋아도 자극적이고 직설적인 내용은 ‘끔찍’

▲ 다큐멘터리 을 연출한 프로듀서 크리스토프 닉(위)은 ‘TV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AP연합

<텔레비전의 종말>의 저자 쟝 루이 미시카는 “이 프로그램의 의도에 대해서는 지지한다”라고 전제한 뒤 “그러나 이제는 텔레비전을 넘어 사회나 학교에서 어떠한 억압과 폭력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야 할 때이다”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존 엑스트렘>의 참가자 중 한 사람이었던 필립 씨는 “사실 나는 사회에서도 복종에 익숙했던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울러, 미시카 박사는 “텔레비전의 폭력성은 심각하지만 이제 미래에는 인터넷이나 다른 매체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텔레비전과 관련해 그동안 프랑스에 문제 프로그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2001년 프랑스 최대 민영방송인 tf1이 제작한 <마이요 페블>이라는 퀴즈 프로였다. 당시 사회는 프랑스어가 유창한 영국 출신의 로랑스 비콜리니가 맡았다. 게임은 각 단마다 출연자들이 탈락자를 지적하게끔 설정되었다. 그리고 사회자는 “너희들은 서로 일말의 동정심도 갖지 마라. 그것도 못 맞추는 네 머리가 이상한 것이 아니냐”라고 자극적이고 직설적으로 참가자들을 부추겨 당시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이를 두고 일간지 피가로는 “이제 프랑스의 텔레비전도 갈 데까지 갔다”라고 걱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폭력성과 함께 거론되는 것은 영향력이다. 이번 다큐멘터리의 공동 연출자였던 미셀 엘챠니노프는 “브라운관이라는 작은 화면 뒤에 국가가 존재하면 그것은 바로 사회나 개인을 억압할 수 있는 힘이 된다”라고 말했다. 사실 텔레비전의 영향력을 걱정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프랑스의 정치인 가운데 텔레비전을 가장 잘 이용한 정치인으로 평가받은 사람은 드골 대통령이었다. 그는 시민의 반발이 있을 때마다 텔레비전 담화로 진정을 호소했다. 그러나 68혁명 당시 편파적인 보도는 오점으로 남아 있다. 60여 일의 소요와 파업 기간 동안 뉴스가 방영한 것은 교통 체증 장면이 전부였다.

텔레비전의 덕을 본 정치인도 있다. 바로 지르카르 데스탕 대통령이다. 집권 기간 중 난제에 부딪혔을 당시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던 전설적인 문학 토론 프로 <아포스트로프>에 출연해 모파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선보였다. 다음 날 서점에서는 모파상의 책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기현상이 벌어졌으며, 데스탕 대통령은 정치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 텔레비전을 아트에 최초로 차용한 백남준은 “빙하기 시절 사람들은 달만을 보아야 했으며, 21세기의 달은 바로 텔레비전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비판적인 시각 또한 잊지 않았다. 철학자 김용옥씨와의 대담에서 그는 “텔레비전은 정보 전달 방식이 일방적이다. 텔레비전이야말로 현대 사회 최대의 독재자이며 반민주의 상징이다”라고 경고했다.

9·11 사태 이후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세르는 “현대 서구 사회에서 14세의 소년은 14년 동안 1만4천번의 죽음을 텔레비전을 통해 본다”라고 지적했다. 텔레비전, 21세기의 달 치고는 참 끔찍한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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