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도전하라, 그리고 즐겨라”
  • 조현주 기자 (cho@sisapress.com)
  • 승인 2010.06.08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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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민태원의 수필 <청춘예찬>의 첫 문구는 이렇게 짧지만 강렬하다. 하지만 이 순간, ‘20대 청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설렘’과는 거리가 멀다. 대학 입학식 날부터 도서관으로 달려드는 세대, 취업 전쟁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밤낮으로 공부하며 ‘고(高)스펙’을 쌓지만 ‘청년 실업’이라는 한마디에 무참히 무너지고 마는 세대. 언제부터인가 20대 청춘은 ‘듣기만 해도 가슴 철렁한 말’로 변질되어 버렸다. <청춘예찬>은 ‘청춘은 인생의 황금시대다. 우리는 이 황금시대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기 위하여, 이 황금시대를 영원히 붙잡아두기 위하여, 힘차게 노래하며 힘차게 약동하자!’라고 끝맺는다. 그렇다. 청춘에겐 특권이 있다. 청춘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해도 아름다운 유일한 시기이다. 새로운 도전을 한다면 늘 새로운 길이 열리는 법이다. 지금부터 약동을 꿈꾸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메신저가 되어줄 ‘20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2010년, 지금의 20대는 오로지 ‘취업 생각’에만 몰두하는 맹목적인 집단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럼에도 항상 ‘88만원 세대’라는 암울한 굴레가 뒤따른다. 과연 20대 모두를 이런 식으로 규정해도 되는 것일까. <시사저널>은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나만의 꿈’에 도전해 성공을 거둔 7인의 열혈 20대를 만나보았다.

■“실패해도 그 경험에서 기회가 찾아온다” 장애인 크로스컨트리 부문 국가대표 여성 선수 서보라미씨

크로스컨트리 부문 국가대표 선수인 서보라미씨(24)는 장애를 이긴 여전사이다. 서선수는 지난 3월19일에 개최된 캐나다 밴쿠버 동계 장애인올림픽에 국내 여성 장애인 최초로 출전했다. 그녀는 여자 크로스컨트리 5km 좌식 경기에서 완주하면서 한 편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비록 16명의 선수 중 14위(1명 기권)를 기록했지만, 서선수의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앞서 열렸던 10km 경기에서는 스키가 부러져 경기를 포기해야만 했기에 더욱 의미가 컸다.

서보라미 선수는 당시 상황에 대해 “5km 코스를 완주하고 나서 결승 지점에 도착했을 때 장애를 겪으며 살아온 지난 몇 년이 필름처럼 흘러 지나갔다. 처음으로 맛보는 승리감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서선수가 크로스컨트리를 시작한 지는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동계 장애인올림픽에 국가대표 자격으로 출전했을 당시만 해도 정식 훈련을 받은 기간은 채 1년을 넘지 않았다. 게다가 좌식 스키 10km 코스는 한 번도 뛰어본 적이 없었다.

서선수에게 6년 전인 2004년 4월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아차 하는 사이에 계단에서 넘어졌고, 하반신이 마비되어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고3이라는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떻게든 살아보자”라는 생각으로 독하게 마음먹었다. 그녀는 “장애를 겪고 나서 삶의 목표가 생겼다. 이제 장애인 스키 부문에서 최고의 선수가 되는 것이 내 꿈이다”라고 말했다.

서선수는 자신의 장애를 이겨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의 인생을 스키에만 다 걸지 않았다. 2009년 한국재활복지대학을 졸업하면서 ‘사회 복지’와 관련된 자격증도 땄다. 서선수는 “장애를 가지게 된 이후 ‘재활 치료’나 ‘사회 복지’ 부분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하면서 진로를 다르게 고민했다. 우선 내 몸이 불편하다 보니 다른 장애인들을 돌볼 때 어려움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서선수는 자신을 ‘도전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크로스컨트리 부문 금메달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다른 종목들도 다 체험해보고 싶다며 도전에 대한 열망을 나타냈다. “예전에는 도전하기 전에 미리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우선 도전하고 나서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나가는 식으로 바뀌었다”라고 말한다. 서선수는 같은 또래인 20대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최대한의 도전이 최고를 만든다. 단순히 ‘하고 싶다’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을 뿐, 겁먹어서 실천을 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다. 그러면 결국 내가 무얼 하고 싶고 무얼 잘하는지 찾는 기회가 없어지고 만다.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경험해보라. 그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들이 있고, 그것이 실패이든 성공이든 모두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시사저널 박은숙

■“20대여서 목표 향해 끊임없이 달릴 수 있었다”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 작곡 부문 1위, 작곡가 전민재씨

한국인의 감수성이 세계를 울렸다. 지난 5월23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의 작곡 부문에서 한국인 작곡가 전민재씨(23)가 1위에 오른 것이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폴란드 쇼팽 콩쿠르,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와 함께 세계 3대 음악 경연대회로 꼽힌다. 전씨는 1937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시작된 이래 작곡 부문 최연소 우승자라는 기록도 세웠다.

전씨가 음악에 두각을 나타낸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전씨의 아버지 전준엽씨(화가)는 일찍부터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선생님 역할을 도맡았다. 전씨가 작곡에 전념하기 위해 다니던 고등학교를 그만두었을 때에도 아버지는 아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나서 정말 열심히 곡을 썼다. 당시 1시간 분량의 첫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아버지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씨가 ‘평생의 모델’로 삼는 작곡가가 있다. 바로 프랑스 작곡가 세자르 프랑크이다. 세자르 프랑크는 과거의 음악, 특히 바흐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통해 자신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나간 인물이다. 전씨는 “나 역시 프랑크처럼 평생에 걸쳐 연구와 노력을 거듭해 나만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나가고 싶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현재 전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작곡과 4학년에 재학 중이다. 졸업을 앞둔 시기인 만큼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고민도 많다. 그는 “졸업 후 유럽을 주 활동 무대로 할 생각이다. 이번 콩쿠르를 통해 많은 음악가와 작업하면서 자극도 되고, 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도 깨달았다. 그들과 경합하며 앞으로 내 음악을 더 정교하게 다듬고 싶다”라고 말했다.

전씨는 20대라는 어찌 보면 이른 나이에 작곡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이에 대해 그는 “사실 나를 빛나게 하는 것은 ‘작곡가’라는 타이틀보다 ‘20대’라는 타이틀이다. 20대는 멋진 시기이다. 자신의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달리고 있다면 20대들 모두가 누군가의 롤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강조했다.


ⓒ시사저널 임준선

■ “구직자들이 모두 웃는 그날 위해 함께해요” 청년 노조 결성한 ‘청년 유니온’ 김영경 대표

먼저 다음 세 가지 조항을 살펴보자. 어느 회사에서 인턴사원으로 일하다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이 있다. 법정 최저 임금인 4천1백10원에도 못 미치는 시급을 받고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다. 시간 외 근무를 하면서도 용역직이라는 이유로 항의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이 가운데 자신이 한 가지 이상이라도 해당된다면, 주저하지 말고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바로 ‘청년 유니온’이다.

청년유니온은 기존 기업별·산업별 노조에서 소외된 아르바이트생, 인턴, 청년 실업자, 취업 준비생, 단기 취업자, 비정규직 등 이른바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15~39세 청년을 가입 대상으로 하는 국내 최초의 세대별 노동조합이다. 지난 3월13일에 결성된 이후, 현재는 1백3명의 조합원이 활발히 활동 중이고 인터넷 카페 회원 수도 1천5백명이 넘었다.

청년유니온의 김영경 대표(29)는 “청년유니온의 조합원들 대개가 구직 활동을 하고 있는 20대들이다. 물론 나도 ‘구직자’이다. 1주일 전까지만 해도 아르바이트를 해왔는데 학원 사정이 나빠지는 바람에 또다시 ‘구직자’가 되었다”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김씨는 스스로를 ‘한 달 살이형’ 인간이라고 표현한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한 달씩 버티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한 달 동안 일해서 번 돈을 생활비로 모두 써버린 바람에 집밖에 나오지 못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청년유니온에는 김씨와 같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

김씨가 청년을 위한 노조를 결성하는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대학 시절 학비를 벌기 위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 중 대학교 2학년 무렵의 경험은 세상의 쓴맛을 더 빨리 맛보게 했다. 당시 김씨는 한 대형 마트의 판매직으로 일했다. 용역업체 소속으로 마트에서 일하다 보니 부당한 대우를 감수해야만 했다. 김씨는 “나중에 알고 보니 용역업체에서 월급 1백20만원 중에 40만원을 가로챘다. 게다가 마트 쪽에서도 용역직들을 함부로 대했다. 하루 2교대로 9~10시간 정도 일해야만 했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는 부당한 고용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연대의 힘’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씨는 “청년유니온은 그동안 침묵해 온 다수의 청년을 하나로 모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라고 말했다. 김씨의 앞에는 여전히 장애물이 많다. 먼저 청년유니온의 활동이 정식으로 인정을 받는 과정에서부터 걸림돌이 많다. 헌법에서 구직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는 구직자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네트워크가 마련되어 있지 못했다. 김씨는 “청년유니온이 만들어진 자체만으로도 구직 청년들에게는 든든한 ‘백’이 생겼다. 하지만 조합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희망을 얘기할 때 그 ‘백’이 제대로 활용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청년 구직자들이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만들어지기까지 청년 활동가 김영경씨의 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시사저널 임준선

■ “꿈꾸던 모습 그대로 배우는 자세 잃지 말아야” 롯데호텔서울 프렌치 레스토랑 ‘피에르 가니에르’ 요리사 박성훈씨

역시 노력파였다. 지난해 8월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제40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국내 최초로 요리 부문 금메달을 수상한 박성훈씨(20)가 그랬다. 박씨는 서울 중구 소공동에 있는 롯데호텔의 프렌치 레스토랑 ‘피에르 가니에르’의 요리사이다. 

박씨는 기능올림픽을 준비하면서 하루 13~14시간가량 똑같은 요리를 반복해서 만들었다. 요리를 완벽하게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시간을 투자해 연습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씨가 수상의 기쁨을 누리게 된 비결은 ‘인내심’이었던 셈이다.

그는 “잡생각을 없애려고 일부러 친구들도 멀리했다. 힘들 때도 많았는데, 이런 고비를 넘기고 늘 꿈으로만 여겨왔던 기능올림픽대회에서 수상을 하게 되어 무척 기뻤다”라고 말했다.

그가 요리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었다. 당시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조립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요리도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백지에 여러 색을 채우면 화려한 그림이 생겨나지 않나. 요리도 마찬가지다. 재료들을 하나하나 조합해서 결국 새로운 메뉴가 만들어진다”라고 말했다.

어린 나이에 호텔 조리장이 되고 국제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니 자만심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겸손했다. “호텔에서 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새롭게 요리를 배우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실물 요리는 시각적인 것을 더 중요시하는 대회 요리와는 다르다. 음식을 드시는 분들이 극찬할 수 있도록 더 완벽하게 만들어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라면서 계속 배우는 자세로 임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박씨는 어릴 적부터 요리사라는 하나의 꿈을 향해 달려왔다. 아직 20대인 그의 꿈은 초등학교 무렵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요리사’가 되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 무대에서 실력을 발휘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 “도전을 두려워하기보다 그 상황을 반겨라” 스타리그 프로게이머 이윤열씨

‘천재 테란’이라고 불리는 프로게이머 이윤열씨(26)에게는 늘 뒤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불굴의 의지’이다. 곧 지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주춤하다가도 불굴의 의지로 부활해 우승컵을 거머쥐던 이윤열의 모습을 기억하는 팬들이 많기 때문이다.

스타리그 12년의 역사 속에서 이윤열의 위용은 대단했다. 그는 스타리그에서 3회를 우승해야 주어지는 ‘골든 마우스’의 첫 번째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2003년 ‘8회 파나소닉배 스타리그’, 2005년 ‘14회 아이옵스배 스타리그’, 2006년 ‘19회 신한은행 스타리그 2006 시즌2’에서 우승해 스타리그 최초의 ‘골든 마우스’ 주인공이 되었다.

이윤열은 이제 스타리그 팬들 사이에서는 ‘영웅’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가 공식적으로 스타리그계에 데뷔하게 된 지난 2000년도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이윤열은 “당시 선생님이나 부모님 모두 걱정이 많았다. 게임하는 것을 운동 경기와는 다른 식으로 보는 것 때문에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에는 경기를 치를 때마다 고생도 많았다고 한다. 스타리그 대회는 대개 서울에서 열리는데, 그는 구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윤열은 “서울에서 대회에 참가한 뒤 구미에 도착하면 새벽 3시쯤이었다. 학교에서 운동선수처럼 나를 배려해주지는 않았다. 고2 때까지만 해도 야간 자율 학습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는데 게임 연습과 수업을 병행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 와중에 이윤열은 ‘아마추어 문화부장관상’을 받는 등 두드러진 성과를 보였고, 고3 때부터는 학교측의 배려로 프로게이머 생활에 매진할 수 있었다.

물론 ‘천재’라 불리는 이윤열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지난 2008년 말부터 프로리그에 나서지 못하면서, 이윤열의 ‘선수 생명’이 다한 것이 아니냐는 식의 추측도 난무했다. 그는 “그때만 해도 매우 힘든 상황에서 내 존재가 잊혀지는 것 같아 씁쓸했다”라며 아쉬운 마음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덕분에 그는 두 배의 노력을 할 수 있었다. 최근 이윤열은 프로 리그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면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의지를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윤열은 “그동안 다시 한번 우승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승부욕을 믿는 것도 일종의 훈련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종종 후배들에게도 같은 조언을 한다. 그는 “대회를 앞두고 승패 결과를 두려워하는 후배들에게 ‘내가 반드시 이긴다’는 자신감을 가지라고 한다. 자기 자신을 믿어야 상대방의 기에 눌리지 않기 때문이다. 게임뿐만 아니라 어떤 도전이든 마찬가지가 아닐까. 도전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그 상황을 즐기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우태윤

■ “불투명한 시기라서 여러 분야 경험 쌓다 보니 재능 발견” 시인 오은씨

요즘 시를 읽는 20대가 그리 많지 않다. 시를 쓰는 20대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와중에 20대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시집까지 출간한 청년이 있다. 지난해 3월 시집 <호텔 타셸의 돼지들>을 펴낸 시인 오은씨(28)는 “나는 ‘시 쓰는 사람’이면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어떤 일이든 재미없으면 못한다. 나에게 시 쓰기는 혼자 할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놀이이다”라고 말했다.

오씨는 자신이 스무살 때인 2002년 등단했다. 오씨는 대학 합격 발표 다음 날 ‘뜬금없는’ 등단 소식을 전해듣고 많이 놀랐다고 한다. 한 살 위의 형이, 재수 시절 써두었던 오씨의 시를 한 문예지의 작품전에 공모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오씨처럼 어린 시인이 등단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워낙 어린 나이에 등단한 탓에 주위에 또래 문인이 많지 않았던 것도 어려움 중 하나였다. 오씨는 “또래가 없다 보니 시 쓰기에 대한 고민을 터놓고 이야기하기가 힘들었다. 주위에서 하는 말도 대부분 불투명한 조언이었다”라고 말했다. 오씨는 등단과 함께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청탁이 무엇인지 시집은 어떻게 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시간은 흘러만 갔다. 무엇보다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시 속에 나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6년부터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공부할 무렵이었다. 대학원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시집을 정리하는 작업을 병행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오씨는 “사회학을 공부하다 전공을 바꿔 공대 과정을 밟았기 때문에 모든 과정에서 부딪히는 일들이 많았다. 1년에 세 편 정도의 논문을 쓰는 것도 꽤 힘들었다. 이상하게도 이때 오히려 시에 대해 더 목이 타올랐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여러 가지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경험을 쌓다 보면 재능도 일찍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늘 도전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20대는 불투명한 시기이다. 하지만 그 불투명한 점으로 인해 10~20년 후에 큰 성과를 얻게 된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박은숙

■ “불안감이 오늘의 동력이 될 수 있다”강상욱 상명대 교수

올해 3월 상명대 화학과 교수로 채용된 강상욱씨(29)는 강단에 선 지 이제 갓 두 달을 넘긴 새내기 교수이다. 지난 2월 상명대에서 강상욱 박사를 교수로 채용하겠다는 공고가 뜬 이후, 그는 본의 아니게 유명 인사가 되었다. 20대에 교수로 채용된 국내 최연소 남자 교수라는 타이틀이 붙었기 때문이다.  

강교수는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박사 통합 과정을 마친 후 한양대와 미국 MIT에서 박사 후 과정(포스트 닥터)을 끝냈다. 그동안 그가 석·박사 과정을 거치며 작성한 논문은 30여 편에 이른다. 대학원 때 논문을 1년에 4~5편씩 작성한 셈이다. 

논문 작성도 일종의 아이디어 싸움이다. 강교수가 자신의 연구 성과를 수많은 논문으로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특유의 ‘긍정적 마인드’ 덕이었다. 강교수는 “10개의 아이디어를 낸다면 통상적으로는 2~3개 정도가 논문에 실릴 가치를 지니고 있다. 으레 8개는 실패할 것이라는 가정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연구이든 일단 시작하고 본다. 이런 식으로 아이디어 100개를 생각해내면 적어도 20개의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대개 마흔이 넘어야 교수로 채용되는 현실을 감안할 때, 강교수는 ‘젊은 교수’라기보다 ‘어린 교수’에 가깝다. 강교수와 같이 특별한 경우가 아닌 다음에는, 교수가 되기를 희망하는 대개의 박사 출신들은 불안한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강교수는 “나 역시도 무작정 공부만 하고 있다는 생각에 늘 불안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 불안함 때문에 오늘 하루를 더 열심히 살게 되는 것 같다. 바로 내일이 어찌 될지 몰라 두려워하는 20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마찬가지다. 불안해하며 주춤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가는 ‘계기’와 ‘동력’으로 삼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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