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폭동 불러온 ‘스탈린 유산’
  • 조홍래 |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06.22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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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스스탄 민족 분규의 원인 / 옛 소련 위성국이었다가 1920년대 강제 분할되면서 충돌 ‘불씨’ 생겨

옛 소련 위성국 키르기스스탄에서 인종 폭동이 일어났다. 폭동 7일째가 되는 6월16일 현재  2백여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부상했다. 터키계 무슬림인 다수 키르기스족과 러시아계인 소수 우즈베크족 사이에 사소한 시비로 촉발된 충돌은 순식간에 제2의 남부 도시 오쉬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살인·방화·약탈·강간이 자행되었다. 수적으로 열세인 우즈베크족 20만명은 이웃 우즈베키스탄으로 피신했다. 지난 4월 친미 정권을 전복하고 출범한 친소 임시정부는 러시아에 평화유지군 파견을 요청했다. 러시아의 주도로 탄생한 지역 동맹 집단안보조약기구(CSTO)는 비상회의를 소집했으나 내정 간섭이라는 이유로 병력 파견을 보류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폭동을 “용인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상황이 더 악화될 경우 파병을 검토하겠다고 위협했다. 정부군에는 폭도들을 현장에서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래도 사태는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무법천지가 되었다.

 

▲ 지난 6월14일 키르기스스탄 오쉬 주 키르기스 시에서 우즈베크족 난민들이 폭도들에게 살해당한 이웃들의 시체와 함께 피신해 있다. ⓒAP연합

현지에서 전해지는 뉴스는 참담하다. 임시 수용소에서는 설사병이 만연하고 식품이 동났다. 무장한 폭도들이 우즈베크인들을 마구 사살하기 때문에 난민들은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우즈베키스탄은 난민 수용 능력이 한계에 이르자 일부 국경을 폐쇄했다. 2008년 소수의 오세티아족을 위해 그루지야를 침공했던 러시아에 이번 사태는 또 다른 악몽이다. 옛 위성국들에 대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정책에 복병이 나타난 셈이다. 사상자는 확인된 것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 나라에서는 시신을 24시간 안에  매장하는 무슬림의 전통에 따라 미처 신고도 하지 않고 매장된 시체가 많아 정확한 사망자를 파악하기 어렵다. 

키르기스스탄 전체 인구 5백40만명 가운데 15%를 차지하는 우즈베크인들은 대부분 이 나라 남부 페르가나 지역에 거주한다. 이 지역은 1920년대 스탈린에 의해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으로 강제 분할되었다. 그 결과 여러 소수 민족들이 본의 아니게 뒤섞여 살게 되었다. 당시에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인위적 국경은 증오와 갈등의 상징으로 변했다.  

지난 4월에 역시 폭동으로 탄생했던 임시정부에게는 폭력을 진압할 능력이 없다. 로자 오툰바예바 임시정부 대통령의 파병 요청을 거부했던 러시아는 하루 만에 태도를 바꿔 북부 칸트 군사 기지를 보호한다며 공정대를 파견했지만 폭동을 진압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미국도 북부에 군사 기지를 두고 있으나, 병력 파견 요청을 받지는 않았다.

▲ 지난 6월14일 우즈베키스탄 국경 부근에서 키르기스스탄 군인들이 몰고온 장갑차 주위를 우즈베크족 난민들이 둘러싸고 있다. ⓒAP연합

지난 4월 우즈베크인들이 바키예프 정부를 전복시키면서 갈등 커져

분쟁의 바닥에는 두 종족 간의 오랜 증오가 도사리고 있다. 폭동의 전조는 지난 4월에 나타났다. 당시 우즈베크인들은 쿠르만벡 바키예프 대통령 정부를 전복하고 임시정부를 탄생시켰다. 바키예프는 현재 벨라루스에 망명 중이다. 임시정부는 이번 폭동이 그의 조종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바키예프는 부인했다. 6월27일에는 새 헌법을 만들기 위한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바키예프와 그 지지자들은 이 선거에 반대하는 반면, 우즈베크인들은 과거의 권위주의 정부를 청산하는 정치 개혁에 찬성한다. 이 와중에서 두 종족의 반목은 폭동으로 분출했다. 

목격자들에 다르면 주로 키르기스인으로 구성된 군부는 폭동을 진압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은근히 키르기스 편을 든다고 한다. 양측이 모두 폭력을 행사하고 있으나 수적으로 다수인 키르기스인들에 의한 잔혹 행위가 많은 편이다. 오쉬에 있는 우즈베크인들의 집은 거의 불탔다. 가스와 전기 공급이 끊어져 도시는 폐허화되었다. 가게들도 문을 닫아 생필품을 구하기도 어렵다.

주로 여자·어린이·노인인 우즈베크인들은 이웃 우즈베키스탄으로 필사적으로 피신한다. 뉴욕타임스는 폭동 자체보다 난민 위기가 더 심각하다고 전했다. 뉴욕에 본부를 둔 인권단체의 조사원 안드레아 버그 씨는 이 사태가 21세기 최악의 인권 재앙이라고 말했다. 폭동의 발상지 오쉬를 방문하던 중 현장을 목격한 그녀는 구원을 요청하는 수많은 전화를 받았으나 키르기스 폭도들이 설치한 장애물 때문에 많은 사람이 아직 탈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국경에 몰려 있는 우즈베크인들은 두고 온 가족들의 안부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른다. 

이번 충돌은 지난 20년 이래 최악이다. 오쉬에서는 1990년에도 두 종족 간에 충돌이 벌어져 수백 명이 죽었다. 당시에는 소련군의 개입으로 폭동은 신속히 진압되었다. 사태를 진압했던 아스카르 아카예프 대통령은 2005년 튤립 혁명으로 추방되고 바키예프가 그의 뒤를 이었으나 그 역시 지난 4월 폭동으로 실각했다. 5년 만에 혁명이 두 번 일어나고 두 달 만에 폭동이 재연된 셈이다. 1인당 소득 2천 달러인 최빈국의 미래는 그래서 막막하다.

폭력이 폭력을 낳는 악순환은 미국과 러시아가 이 나라 북부에 유지하고 있는 군사 기지와도 무관하지 않다. 정부는 지난 5월 추방된 바키예프의 아들 막심이 미군 기지에 석유를 팔아 거액을 벌고도 탈세를 한 사건을 조사했다. 임시정부 관리들에 의하면 바키예프의 아들 회사는 미군 기지에 석유를 대주고 월 8백만 달러의 이익을 챙겼다고 한다. 바로 이 비리 때문에 4월 폭동이 일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막심은 영국으로 잠입해 망명을 요청했다. 미국은 미국대로 미군 기지의 유지를 허용한 전 정권에 대한 배려로 문제의 암거래를 묵인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미국은 키르기스스탄과 러시아에서 구매하는 석유의 절반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사용하고 매월 3만명의 병력과 군수 물자도 이곳 공군 기지를 경유해 아프가니스탄으로 수송한다.

키르기스스탄 폭동의 씨앗은 멀게는 스탈린이 뿌렸고, 최근에는 러시아와 미국이 조연을 맡은 형국이다. 워싱턴 소재 브루킹스연구소의 피오나 힐의 논평이 함축적이다.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약소국 사태에 개입하지만 약소국이 개입을 요청할 때는 몸을 사린다’는 것이다. 2차 대전 말 소련의 개입으로 생긴 한반도의 대치 국면도 강대국들이 추구하는 편의주의의 희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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