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판박이 드라마’
  • 변혜정 | 서강대 성평등상담실 상담교수 ()
  • 승인 2010.07.26 18:5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희롱 행위자의 행태, 아동 성폭력과 구조적으로 일치…왜곡된 ‘젠더 시스템’ 존재하는 한 악순환 계속

이 더운 여름에 공포영화보다 더 우리를 전율시키는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다. 국내 최고 명문 대학 졸업의 학력, 법조인, 현직 국회의원, 하버드 대학 유학 등등. 이른바 최고 엘리트인 행위자의 배경뿐 아니라 성희롱으로 추정되는 내용까지, 한 편의 ‘재미없는’ 영화를 보는 듯하다. 언론과 네티즌들은 그날의 각본에서부터 행위자의 과거 행적, 가족력까지 거론하면서 모든 것을 낱낱이 벗겨내고 있다. 또 행위자도 언제나 그랬듯이 “그런 일이 없었다”라는 절대적 부인을 하고 있다. 거기다가 자신의 사건을 기사화한 기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반면에 그 의원이 속한 당 윤리위원회는 신속하게 행위자를 제명했다. 언제나 시작부터 결론까지 판에 박은 듯 똑같다. 이제는 분노를 넘어 할 말이 없다. 아니, 지겹다.

물론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고, 화학적 거세 등등의 법안이 통과된 지 정말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발생한 이 성희롱 사건이 어떻게 결말을 맺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필자는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아동 성폭력 사건과 이번 사건의 공통점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성희롱적 일상을 밝히려 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어떻게 감히 아동 성폭력과 성희롱을 비교할 수 있는지’에 의문을 품을지 모른다. 아동 성폭력과 이러한 성희롱 사건들은 법적 처벌에서부터 끔찍함의 정도 등에 대한 정서상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희롱 사건을 발생시키는 행위자 맥락 등은 성폭력 사건들의 가해자 맥락과 놀랍게도 비슷하다.

첫째, 누가 행위자인가? 경찰청 통계를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남성들이 절대 다수이다. 직업·학력·연령 등에 관계없다. 물론 법적 처벌을 받는 자는 계층적으로 빈곤층이 많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있는 자들은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법망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처럼 너무 유명한 자는 유명하기 때문에 언론에 노출되는 것뿐이다. 똑똑하고 유명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자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파장이 큰 것일 뿐이다.     

둘째, 행위자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해명하는가? 가해자 교육 현장에서 만난 대다수 가해자는 처벌받는 그곳에서조차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지 않는다. 다른 범죄와 달리 자신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른다. 최근 아동 성폭력 가해자가 범죄 현장을 재연하면서도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인터넷 기사가 거짓이 아닌 것이다. 하물며 이렇게 ‘사소한’ 성희롱 사건을 어떠한 행위자가 인정할 것인가? 전에 한 국회의원이 기자를 대상으로 했던 성희롱에 대해 술집 여성인 줄 알았다고 변명한 것도 웃기는데, 이번 행위자의 해명은 단순하다. 그런 일이 없었다는 절대적 부인이다. 언제나 가해자들은 절대적 부인, 술 때문에 기억이 안 남, 상대방에 대한 착각 등의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단지 그날의 상황에 맞게 조금씩 내용을 달리할 뿐이다. 이번 사건 행위자의 경우, 절대적 부인을 했지만 그날 같이 있었던 학생들이 그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참 곤란하게 되었다.  

셋째, 피해자는 누구인가? 언제나 그렇듯이 행위자보다 약한 위치에 있는 아동이거나 여성이다. 이번 경우, 행위자의 조언과 격려를 듣기 위해 술자리에 동석한 여성(학생)이었다. 즉, 술자리에서 진행된 농담에 대해 혹 기분이 나쁠지라도 그냥 침묵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약자인 것이다. 심하기는 해도 면전에서 그 언행에 대해 지적할 자는 그리 많지 않다. 과한 성적 농담이지만 무시하거나, 불쾌하지만 그냥 넘어가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할 뿐이다. 

 

▲ 서울 한 초등학교에서 초등생을 납치해 성폭행을 한 혐의로 구속된 김수철이 지난 6월15일 현장 검증을 위해 범행 현장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성희롱에 무식해도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번 사건 핵심

그렇다면 왜 이렇게 남성들은 성폭력을 포함해 성희롱을 하는가? 이것에 대한 대답은, 정말 그들이 그 행위가 문제인 줄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말 모르는 것이다. 이번 사건처럼 동석한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입증할 경우, 그 다음 행위자의 각본은 ‘그런 말은 했지만 그것이 성희롱인 줄 몰랐다’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이번 사건의 행위자는 법을 제안하는 국회의원이기 때문에 ‘성희롱인 줄 몰랐다’는 것은 ‘나 무식하오’라는 무지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므로 이 각본으로 가기는 어렵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 그들이 성희롱에 대해 ‘무식’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희롱에 대해 무식해도 그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번 사건의 핵심이다. 이것은 성희롱 사건이 그들의 일상과 붙어 있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남성들이 생각하는 남성성의 핵심은, 상대방인 여성을 힘으로든 재미로든 돈으로든 아니면 폭력을 쓰더라도 ‘즐겁게’ 만들어야 한다는 과도한 ‘책임 의식’이다. 그것이 남성의 즐거움이며 권력이다. 이때 여성은 성적 대상일 뿐이다. 이처럼 사실로 인정하기 싫은, 그러나 여성의 역사에서 사실이기도 한, 성상납·성매매·성폭력 등은 성적 농담을 통해 희화화된다. ‘여성은 역시 예뻐야 한다’ ‘용감한 자가 미인을 차지한다’ ‘지위를 막론하고 남성은 예쁜 여성에게 접근한다’ ‘여성이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몸을 바쳐야 한다’ 등등의 말이 성적 농담에서부터 역사적 진실까지 언제나 중요하게 등장했다.

행위자도 이번 사건의 공간인 술자리에서 어린 학생들을 즐겁게 만들어야 하는 권력의 중심이었다. 선배로서 조언도 해야 했다. 성적인 언동을 즐거움이자 조언으로 생각하는 행위자는 이런 식의 농담 이외에 재미있게 분위기를 만드는 방법을 몰랐다. 거기다 그것이 성희롱인 줄 모르는 무식함으로, 자신의 농담이 상대방에게 재미가 아니라 불쾌감으로 작동하는지도 몰랐다. 특히 많이 배운 사람으로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으로서 이러한 습관은 굉장히 유용한 권력의 도구이자 결과일 수 있다. 더구나 힘 있는 자로서 이러한 행위가 좌중을 웃기는 그 사람의 유머 능력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희롱 사건의 스토리는 언제나 비슷하다. 많이 배운 것과도 무관하고 진보적인 지식인이라도 비켜가지 않는다. 권력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언동과 오히려 더 가까울 수 있다. 단지 힘이 있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었다. 문제는 누구나 각본을 알고 있는 그런 사건이 근절되지 않고 언제나 비슷하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 사회가 이러한 각본을 추종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남성은 남성답게’ ‘여성은 여성답게’라는 일상적인 성별 고정 관념·역할·기대 등으로 만들어진 젠더 시스템 안에서 어쩌면 성희롱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성희롱의 예방은 인간을 성희롱적인 방식으로 키워내는 성별화된 사회(gendered society)에 대한 각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약간의 내용만 달라질 뿐 언제나 그 뿌리는 같기 때문이다.

 성희롱에 대해 근본적인 처방을 하지 않은 사회, 언제나 이러한 각본들을 재미있어 하며 사건 발생 이후에만 냄비 끊듯이 와글와글하는 사회, 자신의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위해 오히려 성희롱을 이용하는 사회에서 성희롱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필자는 조금 있다가 이와 비슷한 사건이 또 발생할 것이라고 감히 예언한다. 또 그 사건에 대한 반응도, 해결도 비슷할 것이라고 감히 장담한다. ‘남성다운 것’이 무엇인지, 재미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만들기 전까지는! 일상을 관통하는 젠더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말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