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증이 나거든 영혼의 빈칸을 채워라”
  • 조철│문화칼럼니스트 ()
  • 승인 2015.07.0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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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필사> 엮어낸 고두현 시인

 

 

‘침묵은 때로 고독의 선물이다. 고독은 결핍에서 오고, 결핍은 상실에서 온다. 생의 굽잇길을 돌 때마다 하나씩 알게 되는 진실. 상실에서 얻는 것이 되레 많다. 어떨 땐 결핍이 완숙을 채운다. 사라지는 것들이 더 아름답다는 생의 비의(秘意)도 알게 된다. 그러니 먼저 버려야 한다. 새 옷을 입으려면 먼저 벗어야 한다.’

한 유명 작가의 표절 논란으로 시시비비를 떠나 실망한 독자가 많다. 이런 독자들은 위 글을 그 유명 작가에게 선물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이런 글을 마음에 베껴 써서 성찰해 다시 감동을 주는 작가로 돌아오기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이 글은 고두현 시인(53)이 최근 엮은 <마음필사>라는 책에 올린, 자신이 발표했던 에세이 일부다. 고 시인은 표절 논란으로 ‘필사’마저 눈총을 받을까 우려돼 자신의 책 홍보에 기꺼이 나섰다. 그는 필사에 대해 “잊고 있던 나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손으로 쓰고 손으로 생각하는 동안 삶은 새로운 지평을 맞이할 것이라는 그에게 필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고 했다.

ⓒ 고두현 제공

“필사는 한층 성숙해진 ‘나’를 발견하는 과정”

“세상이 빛의 속도로 변한다는 광속의 디지털 시대다. 거의 모든 걸 ‘스킵 & 스캐닝’(skip & scanning) 방식으로 대한다. 읽으면서 생각하고, 따라 쓰면서 음미하는 과정이 생략돼 있다. 아날로그 방식의 깊은 사고와 공감각적 감성 지능의 중요성도 잊히고 있다. 그 결과 이제는 ‘디지털 디톡스’에 발목을 잡히는 신세가 됐다. 필사는 예부터 문인들과 종교인들이 텍스트를 천천히 읽고, 그 의미를 느끼고, 깊게 이해하는 훈련과 성찰의 오랜 방식이었다. 유명한 시인·작가들은 거의 모두 ‘필사의 습작기’를 거치면서 자신만의 문법을 발견했다.”

고 시인은 자신도 신춘문예 당선 전까지 16년 동안 습작하면서 많은 낮밤을 ‘경건한 필사의 시간’ 속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해 서정과 서사의 깊이를 함께 아우르는 시들을 발표하면서 ‘잘 익은 운율과 동양적 정조, 달관된 화법으로 전통시의 품격을 한 단계 높였으며 박목월의 시에 방불한 가락과 정서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새 시집을 펴내는 대신 필사할 만한 남의 글들을 정리해 <마음필사>를 펴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독자들도 최근 컬러링북의 ‘색칠 바람’을 맛보았으니, 이제는 좀 더 근본적인 ‘마음 색칠’, 즉 우리 내면의 여백에 명시·명구의 의미를 새겨넣는 ‘마음 필사’의 맛을 즐기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기획하게 됐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처럼 우리 마음과 감성에도 균형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그는 필사를 하는 데도 제대로 하는 방법이 있다며 소개한다. 그렇게 하면 글만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층 성숙해진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 될 것이라고.

“베껴 쓴다는 것은 단순히 글자를 옮겨 적는 의미가 아니다. 연필심이나 펜촉이 종이에 글자를 그리는 그 시간의 결을 따라 문장 속에 감춰진 내밀한 의미가 우리 가슴에 전해진다. 행간에 숨은 뜻도 하나씩 드러난다. 여기에서 교감과 공감의 울림이 시작된다. 리듬을 타면서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써보라. 은은하게 소리를 내면서 쓰는 글은 우리 몸을 완전한 공명체로 만들어준다.”

“따라 쓰는 과정이 사각사각 재미있을 것”

고 시인은 이 책의 사용법에 대해 머리말에 미리 알렸다. “쓰는 시간만큼은 온전히 나를 위한 사색과 성찰의 시간으로 비워두라. 그렇게 석 달이나 대여섯 달쯤 지나면 한층 깊어진 생각의 단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빈 페이지를 하나씩 채워간 사유의 나이테에서 우리 삶의 비밀스런 정원을 만날 수도 있다. 그렇게 조금씩 빈 곳을 채우다 보면 스스로 완성한 책 한 권을 갖게 되는 행복까지 누릴 수 있다.”

고 시인은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온 시와 명문장 중에서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편린들을 골라 모았다. 삶의 질곡과 깊이를 아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그의 감성은 고단한 삶의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있지만 다시 꿈을 찾아 날아오르기 위해,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 옛사랑을 기억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을 살피는 마음, 그리고 삶의 애환과 이별 너머까지 생각의 고리를 엮어간다.

“서른이 되어서야 신춘문예에 당선됐으니 남보다 조금 늦된 편이다. 그 덕분에 습작기를 오래 거쳤다. 손때 묻은 습작 노트가 늘어나는 만큼 생각의 보푸라기도 많아졌다. 영혼의 빈칸을 채울 갈증 또한 커졌다. 그럴 때마다 ‘근본’을 생각했다. 복잡한 일이 생길 때는 더 그랬다. 그 뿌리감 덕분에 내 삶의 그루터기가 더 튼실해진 게 아닌가 싶다. 그 나무뿌리에 새겨진 수많은 나이테가 곧 오랜 필사의 세월과 같다.”

책의 제목이 독특하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고 했더니, 고 시인은 제목이 어떻게 정해졌는지 과정을 털어놓았다.

“서문의 소제목(온몸으로 교감하는 ‘마음필사’의 묘미)에 들어 있는 표현인데, 소제목에 넣어놓고도 워낙 마음에 들어서 계속 곱씹고 음미했다. 마지막 편집회의에서 수많은 제목 후보들이 나왔다. 그중 하나는 ‘연필의 질감을 즐기며 한 자 한 자 따라 쓰는 과정 또한 사각사각 재미있다’는 구절을 연결한 ‘사각사각 마음필사’였다. 토론을 거친 후 ‘사각사각’이란 수식을 빼고 4음절의 명료한 제목 ‘마음필사’로 결정했다. 여덟 자를 넉 자로 줄이는 건 의외로 쉬웠다. 눈빛만으로도 ‘순간 합체’를 이룰 정도로 마음이 잘 맞는 기획·편집위원들이 거의 동시에 낙점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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