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세 넘어서도 시간 죽이며 살아선 안 되죠”
  • 윤영무│MBC아카데미 이사 ()
  • 승인 2015.07.15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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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 협력업체 대표 지내다 산골 들어가 수목원 만든 임지수씨

 

10년 전, KT의 아웃소싱업체 사장인 임지수씨(55·여)에게 인생의 회의가 찾아온다. 20년 가까이 70여 명의 종업원을 성공적으로 부양해온 그였다. 그것이 기업을 해서 돈을 버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느닷없이 돈과 명예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쉰 살 이후에도 자신의 시간을 죽이면서 살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을 신나고 즐겁게 하고 싶었다. 결심이 섰다. 생각은 잠시지만, 행동은 단호했다.

5평짜리 컨테이너 숙소 만들고 나무 심어

자신의 회사가 있는 서울 광화문의 이름을 따서 ‘광화문 탈출’이란 귀농 블로그를 만들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의 애마인 ‘컨버터블 폭스바겐’을 몰고 땅을 보러 다녔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귀농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동산 투자는 환금성이 작았고, 농작물을 갈아엎는 날이면 보상받을 데가 없었다. ‘귀농을 하되 농사는 짓지 말자. 농지가 아닌 산지(山地)를 구입해 나무를 심자.’ 자신이 원예에 취미가 있고, 그 일을 좋아하므로 관상수 수목원을 만들어 나무를 팔기로 했다. 수소문 끝에 전북 장수군 장계면에 있는 해발 510m의 산지 2만7000평을 3억여 원에 매입했다. 거기에 5평짜리 컨테이너 숙소를 놓고, 소나무 등 100여 종에 이르는 나무 4000여 주를 심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그녀의 수목원을 찾아가는 동안 필자와 동행한 일행에게서 들은 정보는 거기까지였다. 과연 1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서울 남부터미널을 출발한 고속버스는 정확히 3시간 후 장수군 장계면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거기서 택시를 타고 그의 집으로 갔다.

“어서 오세요.”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웃으면서 우리를 맞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구였다. 적당히 들어간 눈에서는 교양 있는 여성의 풍모가 느껴졌다. 분홍빛 철제 기와를 얹은 집 내부에는 부엌과 방을 바닥으로 연결한 거실, 황토벽돌 찜질방이 있었고, 비행기 화장실같이 물을 쫙 빨아들이는 좌변기가 놓여 있었다.

“화장실만큼은 최고급으로 했어요. 대지 100평짜리 초가삼간을 1800만원에 샀는데, 안 판다고 해서 더 드렸어요. 개조 비용 4000만원 등 모두 7000만원 정도 들어갔습니다. 농촌에서는 새로 짓는 것보다 이렇게 개조한 집이 어울리고 편해요.”

“수목원에 있는 컨테이너 집에서 사시는 줄 알았는데. 그럼, 이 집에서 수목원으로 출퇴근하시겠네요?”

“그렇지요. 바쁠 때는 어쩔 수 없이 산에서 잘 때도 많다”면서 마을회관 공터에 주차시킨 ‘컨버터블 폭스바겐’을 타고 10분 정도 떨어진 수목원으로 향했다. 지방도로에서 좌회전해 좁은 길로 100m쯤 들어가자 수목원이 나왔다. 좌우 능선을 경계로 오르막 산길이 끝나는 봉우리까지 거대한 부채꼴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능수화·백합 등 수십여 종의 꽃이 교목 사이에서 무리를 이루며 원색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기온차가 심해 꽃잎 색깔이 유달리 진하다고 한다. 수목원 정면의 왼쪽에 남덕유산(1507m)이 있었고, 오른쪽으로 비슷한 높이의 어떤 산정(山頂)이 마주보고 있었다.

“심은 나무는 다 어디 갔지요?”

“거의 다 팔렸지요. 할인 행사도 많이 했지만, 나무들이 워낙 예뻤거든요. 연 평균 2000만원이 넘는 수입을 올렸는데, 이곳에서 그런 돈은 도시에서 연봉 7000만원 수준입니다. 이 돈으로 산길을 내고, 집을 장만하고, 돌담을 쌓고, 블루베리 묘목도 사서 2600주를 심었습니다. 사과나무는 농약을 치지 않으면 열매가 열리지 않아 그만두었습니다.”

잔디가 깔려 있는 수목원 중심부에는 5평짜리 컨테이너 숙소가 있었다. 1층을 주방으로 사용하는 원두막, 작은 판잣집 창고, 톱밥을 사용하는 무공해 친환경 화장실 등 작은 건물들이 있었다. 주거환경 비용으로 1500만원을 넘기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지은 것들이었다.

“먹고 자고 생활하는 데 그 이상의 돈을 쓰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했지요. 자연에 들어와 좋은 공기를 마시며 살 바에는 자연 스타일로 살자. 그렇게 내 몸을 자연에 맞추고 나니, 몸이 건강해져 더위나 추위를 이겨내게 되더군요. 실어증까지 겪은 제가 건강을 되찾은 것도 그 덕일 겁니다. 여기서는 세탁기도 쓰지 않습니다.”

“여성이 산속에서 그렇게 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한국의 ‘타샤 튜터’ 소리 들을 때 행복

“이거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지요. 빨랫감은 모아서 동네 분들 집에 가서 빨면 돼요. 처음부터 아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전부 일하러 가서 배웠지요. 예초기 사용법을 배워 가로수 풀을 벴더니, 동네 분들이 ‘뭐 저런 여자가 다 있나’ 하면서 친해졌어요. 저는 할머니가 아니니까 사다리를 타고 사과나무에 올라 작업을 할 수 있어요. 제 일당은 5000원 더 비싼 5만5000원입니다. 돈도 벌고 일을 배우니 좋잖아요. 집 같은 것은 맨 나중에 지어도 되지요. 나무는 지금 심고 가꿔야 10년 걸리지만 집은 한 달이면 뚝딱 짓잖아요. 집 짓는 게 뭐 그리 바쁘다고 집부터 짓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이 저를 보고 ‘타샤 튜더’ 같대요. 중년이 되어 미국 버몬트에 농가를 짓고 정원을 가꾸며 자연주의대로 살다 간 분 말입니다. 저도 거기를 갔었지만 저는 한참 멀었어요. 그래도 기분은 좋았어요. 제가 아는 사람들이 저희 시골집과 수목원에 와서 잠시 쉬었다 가면서 몸과 마음을 치유하길 바랄 뿐입니다.”

저녁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필자는 목 스웨터를 빌려 입어야 했지만 분홍빛 체크무늬 셔츠에 긴 치마를 입고, 카우보이 모자를 쓴 그녀는 개척자처럼 끄떡없이 부침개 재료를 힘차게 손으로 섞고 있었다.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해가는 긴 여행길’이 인생이라 한다면, 대충대충 살 게 아니라, 그녀처럼 다부지게 도전하며 사는 것은 또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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