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잉여인간’이 첩보 영웅 되다
  • 허남웅│영화평론가 (.)
  • 승인 2015.08.27 13:10
  • 호수 135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메리칸 울트라>로 보는 첩보영화의 변화

첩보물이 변하고 있다. 올해 개봉해 많은 관객을 모았던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킹스맨>)와 <스파이>는 첩보물이면서 심각하고 진지한 대신 코믹함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 특징이었다. 여기에 또 한 편이 가세했다. ‘병맛’을 지향하는 <아메리칸 울트라>다.

마이크(제시 아이젠버그)에겐 딱히 인생의 목표가 없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으로 대마초를 피우는 것이 낙이다. 그에게 이루고자 하는 것이 생겼다. 여자친구 피비(크리스틴 스튜어트)에게 프러포즈하는 것이다. 그녀가 왜 자신과 사귀는지 의문이지만, 피비가 없었으면 마이크는 벌써 폐인이 됐을지 모른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멋진 프러포즈를 상상하는 동안 의문의 여자가 접근해 이상한 말을 늘어놓는다. 그러자 마이크의 눈빛이 변하고 마침 그를 습격한 괴한 2명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자신도 모르는 괴력에 놀란 마이크에게 의문의 여자는 그를 가리키며 자신이 아끼던 CIA 요원이었다는 얘기를 꺼낸다. 마이크의 머릿속에서 그와 관련한 기억이 뜨문뜨문 되살아난다.

영화 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외부의 적 대신 내부 갈등으로 눈 돌려

<아메리칸 울트라>는 ‘울트라’로 불린 인체 실험 프로젝트를 모티브로 한다. 냉전 시절, CIA는 미국에 잠입한 소련 스파이를 잡아 쉽게 자백하도록 인체에 약물을 투여하는 실험을 했다. 이것을 좀 더 발전시켜 CIA 요원들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토록 한 것이 이 프로젝트의 정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힘을 발휘하는 요원이 바로 ‘아메리칸 울트라’인 셈이다.

이 모티브를 <아메리칸 울트라>에 앞서 활용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끈 작품이 <본> 시리즈였다. 실제로 <아메리칸 울트라>에서 코믹함을 증발시키면 남는 건 ‘제이슨 본’ 신화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이유 없이 쫓기던 중 상대방의 정체가 자신을 인간병기로 키운 아군임을 깨닫고 맞서는 이야기 말이다. 결국 내부의 싸움인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할리우드는 그들이 ‘악의 축’이라고 일컫는 주적을 악당으로 삼은 첩보 액션물로 미국의 힘을 과시해왔다. 미·소 갈등이 절정이던 1980년대에는 <람보> <코만도> <다이하드>와 같은 ‘하드 보디(Hard Body)’ 영화가 득세했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표적을 아랍의 테러리스트로 옮기자 <트루라이즈> 같은 영화가 흥행몰이를 했다. 그런데 9·11을 전후해 미국의 승리로 이라크 전쟁이 종식되고 오사마 빈 라덴마저 제거되면서 할리우드는 그럴싸한 악당을 잃고 말았다.

지금은 중국과 동북아 정세를 두고 앙숙 관계가 아니냐고? 농담하나. 할리우드가 중국 시장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 모르는가. 해외 영화 수입을 1년에 30여 편 정도로 제한하는 중국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할리우드고 뭐고 국물도 없다. 할리우드 입장에서는 중국에 잔뜩 엎드려 앞으로 더 많은 영화를 수출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고 임무다.

외부의 적이 사라지면서 할리우드 첩보물은 내부 갈등에서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요는 할리우드가 주도하는 첩보물이 갈 곳을 잃었다는 얘기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건재하고 곧 007의 24번째 편 <007 스펙터>가 개봉을 앞두고 있지만, 슈퍼히어로물이 주도하는 전 세계 영화 시장에서 첩보물은 이제 한물간 장르다. ‘잉여’가 되었다. 더는 효용 가치가 없거나 필요 없는 것이 되었다는 의미다. 이 지점에서 할리우드는 새로운 첩보물을 모색한다. 그 징후 같은 작품이 <아메리칸 울트라>를 위시한 ‘코믹’ 첩보물이다.

잉여는 다시 쓸모 있는 것이 되기 위해 기존의 상식과 규범을 벗어나려 발버둥 친다. 그 결과로 새로운 것이 발생한다. 우선 <아메리칸 울트라>의 마이크 같은 캐릭터가 그렇다. 기존 첩보물 기준에서 보면, 마이크는 서류전형에서 걸러지는 부적격자다. 제이슨 본처럼 머리 회전이 빠르기를 하나, 이단 헌트처럼 체격이 좋길 하나, 제임스 본드처럼 슈트가 어울리길 하나, 임무 수행 중 방해라도 되지 않으면 다행인 ‘잉여인간’이다.

그런 캐릭터가 첩보물의 주인공을 맡으면 자연스럽게 코믹한 분위기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말쑥한 옷차림에 카리스마 넘치는 요원이 산발 머리에 멍한 눈을 한 마이크를 찾아와 자네는 “최고의 CIA였어”라고 말하면 관객의 입에서는 웃음부터 새나오지 않겠는가. <스파이>가 많은 관객에게 웃음을 줬던 이유도 다르지 않다. 내근직에 어울릴 법한 XXL 체형의 여자 요원 수잔 쿠퍼(멜리사 맥카시)가 현장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전복의 쾌감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잉여’에 주목해 새로운 첩보 영웅 창조

그래서 이들 캐릭터는 우선으로 극 중 같은 편 내부의 선입견을 잠재우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아메리칸 울트라>는 CIA가 무슨 이유로 마이크의 기억을 지우고, 심지어 그를 제거하기 위해 병력과 화력을 총동원하는지 자세한 이유는 생략한다. 이는 역으로 마이크의 존재가 CIA의 위상을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거리의 싸움꾼 신세였다가 비밀 정보기구의 첩보원 테스트를 받으러 온 <킹스맨>의 애거시(태런 애거트)가 출신 성분 때문에 내부의 반발을 샀던 것과 궤를 같이한다.

내부의 편견과 알력을 이겨내고 <아메리칸 울트라>의 마이크(<킹스맨>의 애거시, <스파이>의 수잔 쿠퍼)가 획득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과 무엇보다 유능한 첩보원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기억을 강제로 삭제당한 채 잉여로 살아가던 마이크는 그를 반대하는 CIA의 모든 공격을 이겨내고 다시금 요원이 되는 데 성공한다. 피비와 짝을 이뤄 오랜만에 현장에서 활약을 펼치는 마이크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첫 장면의 어리숙한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어진다.

그런 의도였을 테다. 이제 할리우드의 첩보물은 이미 존재하는 패러다임으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잉여’에 주목한바, 새로운 첩보 영웅을 얻게 됐다. 물론 이들 캐릭터를 창조했다고 해서 첩보물이 단숨에 트렌디한 장르로 올라서는 것은 아니다. 우선 미국을 위협하는 새로운 적을 찾는 것이 과제지만, <인터스텔라>의 그 유명한 대사를 살짝 변형하면, 할리우드는 해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시간문제이기는 해도 ‘병맛 첩보물’의 유효 기간이 길지 않을 것을 참작하면 쉽지 않은 과제다. 잉여의 문화학이랄 수 있는 ‘병맛’이 유행하면서 그것이 또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모양새다. <아메리칸 울트라>는 <킹스맨>이 제시한 새로운 첩보 영웅과 <스파이>가 제공한 뜻밖의 코미디를 고루 갖추고 있되 이를 합쳤을 때 발생하는 폭발력에서는 다소 못 미치는 인상이다. 할리우드 첩보물이 이 과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진화를 이루어낼지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