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나는 ‘특수·임무·수행·화가’인가?
  • 김정헌 화가 4·16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5.22 18:00
  • 호수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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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해선 나의 출신 대학을 말하지 않아 왔지만 오늘은 먼저 밝혀야겠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그 대학원 출신이다. 지금도 나는 미술대학이 국립 서울대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이유보다 내가 다닌 ‘서울미대’가 그렇게 썩 훌륭한 미술대학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1년 꿇어 1965년도에 입학한 대학은 매 학기 정상적인 학기로 끝난 적이 없었다. 학기마다 조기방학이다 위수령이다 해서 학교에 들어가기조차 힘들 때가 많았고 교수님들에게 ‘정상적’으로 지도받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 한 학기에 한두 번 마주친 교수님들에게 얻어들은 건 물감 개는 방법, 어떻게 화면에 색감과 질감을 효과적으로 만들지 등 실기에 대한 얘기가 거의 전부였다. 

4학년 때 군대 갔다 와서 1학기를 더하고 끝마쳤는데 그때는 또 박정희의 유신정권으로 뭔가 더 숨 막히는 답답한 분위기 속에서 앞으로 사회에 나가면 어떻게 먹고살아야 되는지 가늠이 안 되던 더 불안한 시기였다. 별 할 일이 없어 들어간 대학원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 연합뉴스
ⓒ 연합뉴스

그런 와중에도 섬광처럼 나에게 꽂힌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작고하신 나의 은사님인 임영방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미술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어떤 강의 텍스트로부터였다. ‘미술의 사회적 역할’이라고 무릎을 치고 있었는데 그해(1966년)에는 《창작과 비평》이라는 진보적인 문예지가 창간되고 거기에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실리기 시작했다. 이때 젊은 나는 미술이 우리가 사는 사회와 관련이 있다는 걸 알고 무언가 나의 앞길을 밝혀주는 십자성이 내 머리 위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1970년대는 엄혹한 유신 시절이라 중·고교 미술교사로서 기회만 있으면 동료 교사들과 미술 선후배들이 모여 혜화동 근처 술집을 전전했다. 그런 와중에 태어난 것이 민중미술의 선배 그룹인 ‘현실과 발언’(현발)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 ‘현발’의 탄생과 나의 참여는 내 미술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미술이 그냥 수동적인 ‘표현’이 아닌 사회적 ‘(현실에 대한) 발언’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의 미술이 ‘표현’에서 ‘발언’으로 바뀌자 모든 사회의 활동도 적극적으로 변했다. 

내가 30년을 재직한 공주대에서는 일찍이 진보적인 교수로 찍혔다. 공주교도소의 벽면에 《꿈과 기도》라는 대형 벽화도 이때 그렸고 공주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공주의 시민단체들과 같이 답사하고 나중에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추모 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서울에서의 6월 항쟁 및 거의 대부분의 시위에 참여하고 마지막 촛불시위에도 빠지는 법이 없었다. 

또한 거의 모든 시민단체 활동도 했는데 그중에 ‘문화연대’ 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한때 문화예술위원회의 위원장을 했으나 이명박 정부의 유인촌 장관에 의해 해임당해 이를 법적으로 뒤집는 ‘한 지붕 두 위원장’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서울시 문화재단 이사장을 거쳐 세월호 참사로 만들어진 4·16재단의 이사장으로 있다. 

나의 이러한 ‘기구한’ 사회적 활동은 화가로서의 활동과 배치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림이란 본래 이상적인 가상의 세계를 캔버스 위에 옮기는 것인데 나의 모든 사회적 활동도 결국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나를 화가와 사회적 임무를 오가는 ‘특수·임무·수행·화가’로 자칭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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