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좌우로 나란히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7.27 09:00
  • 호수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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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으로 학교라는 곳에 갔을 때 맨 먼저 배운 것은 줄 서기였다. 선생님들이 구령을 하면 천방지축이던 코흘리개들이 용케도 줄을 잘 맞춰서 섰다. 그렇게 커다란 운동장에 조금은 삐뚤삐뚤하지만 오와 열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그러면서 ‘앞으로 나란히’나 ‘좌우로 나란히’를 통해 줄 맞춤이 이끄는 질서의 세계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갔다.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강제되어 학습한 ‘타율의 질서’였다.

그 아이들이 이제 훌쩍 자라서 또 다른 질서의 세계와 만난다. 지금 마주치는 질서는 타율과 자율이 어우러져 이뤄낸 합의의 질서다. 그 질서의 규칙에 따라 우리는 마음이 구령하는 ‘앞으로 나란히’와 ‘좌우로 나란히’에 맞춰 코로나19에 대처하는 생활 속 거리 두기를 이어가고 있다. 이 가공할 팬데믹 사태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가 이미 오래전부터 적정한 거리를 지켜야만 함께 웃으며 살 수 있도록 구조된 공간이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반드시 필요한 거리를 힘으로 제압하거나 몰염치로 무시할 경우 분란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즉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어 ‘안전거리’를 파괴하면 여러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고(故) 박원순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 사건도 이와 무관치 않다. 전말이 어떠하든 그의 충격적인 죽음이 직장 내 구성원 간에 필요한 거리 두기에 균열이 생겨 일어난 문제와 연관돼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의 사망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일고 있지만, 박 전 시장과 관련한 성추문이 불거졌고 고소를 한 피해자가 있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부정될 수 없는 객관적 사실로서 존재한다. 이 일로 인해 우리 사회가 엄청난 혼돈에 빠져든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22일 오전 서울 중구 한 기자회견장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 2차 기자회견'을 앞두고 참석자들이 착석해 있다. 왼쪽부터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연합뉴스
22일 오전 서울 중구 한 기자회견장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 2차 기자회견'을 앞두고 참석자들이 착석해 있다. 왼쪽부터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연합뉴스

지금 그에 따른 후유증이 엉뚱한 형태로 전이되고 있는 점은 우려스럽기 짝이 없다. 많은 사람이 이 사건과 관련해 분명한 입장을 밝히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그 대표 사례로 꼽힐 만한 이가 자신이 겪은 일을 어렵게 꺼내들며 검찰 내 ‘미투 운동’에 직접 나섰던 서지현 검사다. 박 전 시장 사건 이후 그를 향해 “왜 이번에는 침묵하느냐”는 비판이 잇따랐고, 그는 공황장애가 도져 한마디도 더 하기 힘들다며 “참으로 세상은 끔찍하다”는 말을 남긴 채 SNS를 닫았다고 한다.

서 검사뿐만 아니라 ‘누구 편이냐’를 묻는 질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 곳에서 끊임없이 던져지고 있다. 지난날 ‘조국이냐, 아니냐’를 물었던 것처럼 ‘박원순이냐, 피해자냐’라고 앙칼지게 물으며 자기편이 아닌 사람에 대해서는 ‘적대’를 당연시하는 상황은 전쟁이나 다름없다. 이 갈등을 멈추게 하려면 정치권이 먼저 이 사건에 대해 명확한 판단을 하고 입장을 밝혀야 한다. 정치세력이 애매모호함 뒤에 숨으면 숨을수록 이 편 가르기 전쟁은 더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누구 편이냐를 묻는 질문의 무게는 결국 정치권이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애먼 사람들이 편 가르기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다.

“침묵도 2차 가해”라거나 “침묵은 동조”라면서, 그저 조용히 지내기만을 바라는 사람들까지 발언대로 밀어 올리려는 것은 범인(凡人)들의 처지에서 볼 때 정말 가혹한 일이다. 이 나라는 정녕 ‘좌우로 나란히’를 하며 살아가면 안 되는 곳인가. 근원적인 질문이 가시지 않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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