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도 없이》, 이토록 반가운 ‘장르 비틀기’ 신공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you@sisajournal.com)
  • 승인 2020.10.24 12:00
  • 호수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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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를 그린 영화

새롭다. 반갑다. 범죄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패턴을 보란 듯이 비켜간다. 그것이 장점인가. 적어도 빵틀에 찍어낸 듯 비슷비슷한 영화들이 연이어 쏟아지며 피로감을 안기고 있는 현시점에서는 반가운 일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친절하게 손 흔드는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영화라는 세계를 진전시켜 온 힘은 누군가의 새로운 시도와 결기였다. 《소리도 없이》에는 그런 호기로운 힘이 있다. 영화는 단편영화 《서식지》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소개됐던 홍의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주목해야 할 창작자의 등장이라는 점에서도 《소리도 없이》는 조금 더 소리 내서 알리고 싶은 영화다.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기이한 세계, 아이러니한 상황

트럭에서 달걀을 파는 두 남자가 있다. 태인(유아인)과 창복(유재명)이다. 태인은 말을 안 하고 창복은 한쪽 다리를 전다. 태인이 궂은 육체노동을 하면 창복은 짐칸에 앉아 특유의 입담으로 손님을 불러 모은다.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는 관계다. 이들의 호흡이 조금 더 빛을 발하는(?) 일은 따로 있다. 범죄조직의 뒤처리를 해 주는 일이다. 그러니까 ‘시체 처리’다. 끔찍한가. 그래야 마땅한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이들에게 시체 처리는 달걀 파는 일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참, 열심히도 ‘일(?)’한다.

이 세계는 어딘가 조금씩 비틀어져 있다. 먼저 음지의 범죄를 일상적이고 코믹하게 표현한 톤 앤 매너가 그렇다. 시체 처리 작업에 들어가기 전, 태인과 창복이 환복하는 모습을 보자. 우비와 헤어캡, 고무장갑이 시체 처리 작업복이다. 세상에! 그런 그들 위로 ‘성실한 땀방울, 내일의 미소’라는 문구가 잡힌다. 웃음을 자아내는 이 장면은 감독이 관객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초대장 같다. “기이한 나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세계에서 자주 발견되는 건 ‘아이러니’다. 태인과 창복에게 ‘시체 처리’는 노동 조건이 조금 고된 일용직 업무와도 같다. 그들은 무감하다 못해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퇴근길 배경에 걸리는 노을 지는 시골의 고즈넉한 풍광이 이들의 상황과 대비되고, 경찰은 종종 범죄자 같고, 범죄자가 친근한 이웃의 형상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이 영화의 장점은 블랙 유머가 순간의 흐름을 비트는 데 단순히 낭비되지 않고, 영화 전체 스타일과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점이다. 넘치면 민망하고, 부족하면 안 하니만 못한 게 블랙 유머다. 영화는 그 적정선을 영리하게 걷는다. 사실 이것은 연출자 감각의 문제이기도 한데, 이 분야의 거성으로 평가받는 이는 알다시피 봉준호 감독(의 빡사리)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건들이 충돌하며 기이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봉준호의 장점이 《소리도 없이》에서도 감지된다.

‘죽은 사람’을 담당하던 태인과 창복의 삶은 ‘살아 있는 사람’이 들어오면서 꼬인다. 범죄조직이 유괴한 11세 아이 초희(문승아)를 잠시 맡아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창복은 외떨어진 곳에 사는 태인의 집에 아이를 두기로 한다. 후배인 태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초희를 떠맡는다. 이때부터 관계의 축은 태인-창복 복식조에서 태인-초희로 옮겨간다. 홍의정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소리도 없이》가 전래동화 별주부전에서 출발했다고 소개했는데, 그 연결성을 파헤쳐보면 상당히 흥미롭다. 주지하다시피 ‘별주부전’은 죽을병에 걸린 용왕으로부터 약에 쓸 토끼의 간을 구해 오라는 명을 받고 세상에 나온 자라와 그런 자라의 감언이설에 속아 용궁으로 갔으나 내막을 알고 꾀를 내 도망친 토끼의 이야기다(그러고 보니 이 전래동화, 엄밀히 말하면 소재가 장기매매 아닌가).

흥미롭게도 범죄조직에 납치된 초희가 영화에 처음 등장할 때 쓰고 있었던 건 토끼 가면이다. 초희는 부모가 자신을 구하는 데 그다지 열과 성을 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태인의 집에 머무르면서 태인이 그다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나 초희는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또래보다 조숙한 초희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그러니까 초희는 별주부전의 토끼다. 그런 초희를 본의 아니게 집에 두게 된 태인은? 용왕의 명으로 토끼 간을 찾게 된 자라와 같다. 그러면 물을 수밖에 없다. 충성심을 위해 토끼 간을 노린 자라는 나쁜 놈인가 충신인가. 그런 자라를 꾀를 써서 따돌린 토끼는 영리한 것인가 교활한 것인가. 직접 범죄에 가담한 건 아니지만 초희를 붙잡아 둔 태인은 범죄자인가 아닌가. 태인의 손을 잡을 듯 말 듯 애태우는 초희는 도대체 어떤 소녀인가.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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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잡을 수 없는 유아인

영화는 모든 이분법적 사고를 경계한다. 선과 악을 단정 짓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의 상관관계도 들여다본다. 선한 의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로 도출되는 게 아니듯, 나쁜 의도가 의외의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걸. 아이러니로 가득 찬 세상에 태인과 초희가 서 있다. 난처하게도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납치된 소녀보다 태인의 처지를 더 우려하게 한다. 이래도 되나 싶은 물컹한 감정이다.

초희의 등장과 함께 떠오른 태인의 욕망을 대변하는 건 양복이다. 시체를 처리하다가 몰래 가져온 (살해된 누군가의) 양복이다. 음지에서 양지의 세계로 나가고 싶은 순간, 태인은 그 양복을 꺼내 입는다. 그 양복은 어떻게 될까. 아니, 태인은 그 양복을 어떻게 할까. 더 정확히 말하면 태인의 욕망은 어디로 갈까. 영화의 끝에 그 해답이 있다.

배우들 연기 역시 흠잡을 데 없다. 스포일러라 밝힐 수 없지만, 유재명이 연기한 창복은 아이러니 그 자체인 인물이다. 아이러니를 유재명은 온몸으로 껴안아 표현한다. 유재명이 아이러니라면, 초아를 연기한 문승아는 이 영화에서 미스터리다. 태인과 관객에게 병도 주고 약도 준다. 다음이 궁금해지는 배우다. 그러나 《소리도 없이》는 유아인의 영화다. 얼굴 근육과 몸짓만으로 태인의 심리는 물론 극의 공기와 분위기를 장악한다. 자신의 필모를 영리하게, 흥미롭게, 종잡을 수 없게 또 한 뼘 넓힌다.

소리도 없는 캐릭터들

대사는 배우에게 캐릭터를 깊게 전달할 수 있는 무기와도 같다. 그런 무기를 뺀다는 건, 배우에게 일종의 모험인 셈이다. 《소리도 없이》의 유아인처럼 이런 모험을 감행해 눈길을 끌었던 배우들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제인 챔피온 감독의 《피아노》(1993)에서 말 대신 피아노로 세상과 소통하는 에이다를 연기한 홀리 헌터다. 홀리 헌터는 에이다의 내면을 대사 하나 없이 섬세하게 표현하며 아카데미와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명량》에서 왜군에 의해 가족을 잃고 벙어리가 된 정씨 여인을 연기한 이정현은 천만 관객을 불러 모은 이 작품으로 배우로서의 자신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배우 신하균도 대사 없는 인물들과 인연이 깊다. 그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2002)에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캐릭터 류를 비극적이면서도 안타깝게 소화해 호평받았다. 신하균은 《예의없는 것들》(2006)에서 혀가 짧아서 말할 때 폼이 안 난다는 이유로 말을 하지 않는 킬러 ‘킬라’로 등장, 몸의 언어에 최적화된 배우임을 다시금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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