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계 ‘빅3’는 잘나가는데, 중형사들은 ‘눈물의 빅세일’
  • 박치현 영남본부 기자 (sisa518@sisajournal.com)
  • 승인 2020.11.15 14:00
  • 호수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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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업계 수주 활성화에도 중형 조선사들 줄줄이 매각 절차‥새판 짜기에 주력

국내 조선업계에 모처럼 단비가 내리고 있다. 2016년 최악의 수주 가뭄이 시작된 지 4년 만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의 조선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은 최근 유럽 선사와 30만 톤급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2척, 2000억원 규모의 건조 계약을 체결했다고 11월9일 밝혔다. 앞서 지난 2일에도 유럽 선사와 17만4000㎥급 LNG운반선 2척 건조 계약을 체결했다. 수주 금액은 4250억원, 동급 LNG선 2척에 대한 옵션도 포함돼 향후 추가 수주도 기대된다.

한국조선해양은 올 들어 VLCC만 11척을 수주해 전 세계 시장점유율 55%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9월 이후에만 8척의 계약을 잇달아 성공시켰다. 이로써 한국조선해양의 올해 누적 수주 실적은 75척, 54억 달러(방산 부문 포함)다. 연초 목표액 110달러의 49%를 달성했다. 한국조선해양 관계자는 “수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룹 차원에서 일감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우조선해양도 4분기에 유럽 선사로부터 2조원 규모의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6척을 수주하는 ‘잭팟’을 터뜨렸다. 러시아 국영에너지회사 노바텍이 추진하는 북극해 LNG 프로젝트에 투입될 쇄빙 LNG 운반선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의 이번 LNG선 수주는 작년 12월 이후 10개월 만으로 올해 수주한 금액은 33억 달러에 이른다. 삼성중공업이 올해 수주한 금액은 10억 달러로 다소 부진했다. 하지만 연말 대규모 수주를 기대하고 있다. 앞서 노바텍이 추진하는 북극해 LNG 프로젝트에서 쇄빙 LNG선 5척을 수주했던 삼성중공업은 10척을 추가 수주할 가능성이 크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한진중공업

국내 조선업, 넉 달 연속 세계 선박 수주 선두 

한국의 조선산업은 ‘빅3’ 즉 한국조선해양·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이 주도하고 있다. 그동안 이들은 ‘덤핑수주’와 ‘출혈경쟁’으로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세계 수주 시장에서 저가공세를 앞세운 중국 조선사와 첨단기술로 무장한 일본 조선사 사이에서 우리끼리 싸우다가 ‘동반 몰락’의 쓴맛도 수차례 경험했다. 그런데 ‘코로노믹스(Coronomics) 시대’가 ‘상생의 지혜’를 제시했다. 국내 조선 ‘빅3’ 연합군이 카타르 국영석유기업 페트롤리엄(QP)과 체결한 23조원이 넘는 LNG 운반선 슬롯 계약 역시 이르면 연내 본계약이 체결될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공존전략’의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영국의 조선·해운 분석기관인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지난 10월 국가별 수주량은 한국 72만CGT(13척·69%), 중국 25만CGT(11척·24%), 핀란드 3만CGT(1척·3%) 순이었다. 7∼9월에 이어 한국이 4개월 연속 세계 선박 수주량 1위를 차지했다. 중국을 제치고 선두에 올라선 건 올해가 처음이다. 

한국조선해양 관계자는 "올해 LNG선 8척 수주 등 앞선 기술력과 풍부한 건조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선종에 걸쳐 수주가 진행되고 있다“며 “향후 예정된 글로벌 프로젝트 수주에도 역량을 집중해 좋은 결실을 맺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조선 발주는 3~4년을 주기로 오르내림을 반복하고 있다. 2016년 이후 4년 동안 국내 조선업계는 최악의 수주 가뭄을 겪었다. 전문가들은 올해가 바닥이라며 내년 하반기 이후 반등할 것으로 내다봤다. 양종서 한국수출입은행 선임연구원은 "내년에는 국내 조선업계의 수주량이 올해 대비 127% 증가할 것으로 보이나 2023년 이후에는 다시 일감 부족을 겪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STK조선해양 전경 ⓒSKT조선해양

중형 조선사들, ‘빅3’ 낭보는 딴 세상 이야기 

대형 조선사들의 낭보가 중형 조선사엔 ‘먼 세상 이야기’다. 여전히 ‘수주 절벽’에 갖혀 ‘생존 절벽’으로 내몰리고 있다.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중형조선사의 상반기 수주액은 2억80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44.5% 감소했다. 하반기 수주액은 전년 동기 대비 70.3% 감소한 1억 달러 수준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진중공업은 올해 한 건도 수주하지 못했다. 기업회생절차가 진행 중인 신한중공업은 일감이 바닥나 인적·물적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다. 신한중공업 관계자는 “중소 조선사들은 대부분 한계에 왔다”고 말했다. STX조선해양은 지난 6월말 전 직원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한진중공업 역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 코로나19 사태로 ‘흑자 도산’에 빠진 대선조선은 고육책으로 직원들의 임금을 절반만 지급했다. 

현재 중형 조선사들은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다. 버티다 못해 눈물의 '빅세일'에 나섰다. STX조선해양은 조만간 공개매각 절차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싱가포르 조선사 케펠(Keppel)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 한진중공업 매각 예비입찰에는 KDB인베스트먼트 컨소시엄과 한국토지신탁 등 7곳이 참여했다. 대선조선은 단독으로 참여한 동일철강과 9일 인수·합병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대선조선 관계자는 “기업 인수 뒤 정상화까지의 추가 비용 등을 고려할 때 본계약 체결을 지켜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올해 초 HSG중공업 컨소시엄에 매각된 성동조선해양까지 포함하면 국내 4개 중형 조선사들은 모두 매각됐거나, 매각 절차를 밟고 있다. 

일단 매각에는 청신호가 켜진 상태다. 남은 과제는 새 주인을 만나 회생의 불씨가 살아날지가 관건이다. 전문가들은 긍정적이다. '발주 기대감' 때문이다. 최근 10년간 중단됐던 중형 선박 발주가 조만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은창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그동안 구조조정을 해 온 중형 조선사들이 발주가 시작되면 기본적인 경영활동은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업계 입장은 다르다. 신한중공업 관계자는 “국제 경쟁력을 갖춘 대형 조선사들과 달리 중형 조선사들은 저가공세를 펴고 있는 중국의 견제를 뚫기가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중형 조선사 입찰에 참여하는 업체들은 배를 만드는 것보다 ‘땅 장사’에 더 관심을 가진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로 한진중공업 매각 예비입찰에는 예상을 깨고 7곳이 인수의향서를 제출했다. 업계 관계자는 ”부산 북항 재개발계획과 맞물려 있는 영도조선소 부지(26만㎡)가 개발 이익을 보장하는 ’흥행 요소‘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중형 조선사들이 ‘새판 짜기’에 나서고 있지만, 경영 정상화까지는 갈 길이 멀다. 대선조선 관계자는 “대우조선해양 회생을 위해 2조원을 쏟아 부은 것처럼 중형 조선사에 정부 지원이 없으면 중형 조선소 부활은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중형 조선사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자구 노력이 전제돼야 하며, 경영 정상화 때까지 포트폴리오 다각화 전략을 이어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백점기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성동조선해양이 매각된 이후 선박 대신 블록을 만들며 경영 정상화 기반을 다지고 있는 것처럼 일감이 없는 동안 해양을 이용한 에너지 확보·구조물 등 사업 다각화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지금 우리나라 조선산업은 기로에 서 있다. 대형 조선사들은 기사회생의 기회를 잡았다. 반면 사면초가에 몰린 중형 조선사들은 새 주인을 찾고 있다.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지만 '험로'를 건너기가 쉽지 않다. 양종서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박사는 “불황과 호황을 반복하는 조선업 고유의 장기적 변동성에 대한 대응 전략을 짜야 한다. 그리고 조선·해운·정보통신기술 등 연관 업계가 전방위적 협력과 융합을 통해 경쟁력을 유지·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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